# 432
회귀의 전설
432장. 내 소원은……
‘조금만 더! 조금만!’
스위스 국가대표 다리오가 힘을 바닥까지 짜냈다.
오늘을 위해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투자했다.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간발의 차이로 2등을 했지만 올림픽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국 대표들이 예상을 깨고 큰 선전을 했다.
시작 전까지 그들을 앞에 두고 무시하고 조롱했었다.
동료들과 면전에서 비웃음을 날려줬다.
동양계 선수들의 실력은 허접하다는 우월의식이 암암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경기 결과로 갖고 있던 편견이 깨졌다.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휴식처에 들어가 물만 마시고 나왔다.
37분대 초반에 들어가야 그나마 메달을 딸 수 있게 됐다.
스키복 안은 땀이 흥건하게 고일 정도가 됐다.
오버페이스처럼 보일 정도로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였다.
직전에 세계 선수권 대회 1위를 차지한 노르웨이 한센은 무리하게 스퍼트를 내다가 뒤쳐졌다.
마지막 주자로 따라오던 그의 모습이 멀게 느껴졌다.
오늘은 그에게 승리의 영광이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한센도 자신처럼 한국 선수들에게 놀라 페이스 조절에 실패했을 것이다.
“후우욱! 후우욱! 후우욱!”
그동안 연습량이 적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뱉으며 앞으로 쭉쭉 나갔다.
‘이대로라면…… 30초대다!’
코스를 수없이 다녀봤기에 자신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다리오.
저 멀리 결승점이 보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다리오! 다리오! 다리오!”
스위스 관중들이 함성을 질러줬다.
다리오 이름과 함께 전광판에 그의 개인 기록이 떴다.
이대로만 가면 금메달이었다.
‘가자!’
촤아아앗 촤아아앗.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며 열심히 달려가는 다리오.
휘이이잉 휘이이잉.
“???”
그때 갑자기 정면에서 맞바람이 불어왔다.
오늘은 분명 뒷바람이 강했는데 예상치 못한 바람과의 조우였다.
파라라라랏.
다리오의 스키복이 바람을 맞아 펄럭였다.
생각보다 강력했다.
힘을 짜내고 있는 선수에게는 버티기 힘들 정도의 강풍이었다.
“허억…… 헉.”
다리오의 숨이 풀려버렸다.
눈에 띄게 그의 속도가 느려졌다.
전광판에 기록되는 그의 시간도 느려졌다.
3분 35초를 지나갔다.
‘안 돼!!!’
꼭 따고 싶었던 금메달이 물 건너갔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은메달.
휘리리링.
이번에는 갑자기 전면에서 불던 바람이 뒤에서 불었다.
촤아아아아앗.
스키 앞부분이 결승점을 스쳤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은메달이야! 은메달!”
환호하는 스위스 관중들.
금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스위스 관중들은 자국 선수의 기량에 만족했다.
“하아아아아 하아아아아.”
길게 호흡을 하며 숨을 조절하는 다리오.
아쉬웠지만 내심 만족했다.
바람이 불어와 힘이 달리지만 않았어도 거머쥘 수 있었을 영광의 면류관은 다음 기회로 넘겼다.
“와아아아아! 금메달이다! 금메달!!!”
그 와중에 숨을 죽이고 있던 한국인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무명의 한국 신인 스키어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순간이었다.
다리오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출발 전에 우습게 보고 무시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가 한국 선수들에게 다가갔다.
“축하합니다.”
간단한 영어로 금메달리스트에게 축하를 전했다.
“땡큐!”
활짝 웃는 한국 선수.
‘뭐야! 저 친구는 표정이 왜 저래?’
금메달을 딴 선수 옆에서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동메달리스트.
다리오와 눈이 마주치자 엄지 척을 내밀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가까이 다가와 독일어로 속삭이는 남자.
“다음에는 당신이 먹어요.”
“???”
다리오는 어이가 없어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
[금메달입니다! 금메달!!! 대한민국 시청자 여러분! 오늘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가 크로스컨트리 스키 역사상 처음으로 메달을 땄습니다! 그것도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금메달입니다!!!]
해설자의 흥분한 거친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금메달이다! 금메달!!!”
“대한민국 만세! 만세!”
“캬아…… 눈물 난다…….”
“세상에 저기서 금메달이라니…….”
숨죽이며 TV를 지켜보던 1사단 15연대 본부대 대원들이 막사가 떠나가라 환호성을 터트렸다.
내기는 다 잊어버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 스키를 타던 조영준 선수를 보며 모두 몰입해 버렸다.
처음에는 시큰둥하게 바라봤다.
어차피 메달권이 아니라고 해설 위원이 초를 치고 시작한 마당이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내기가 걸려 있어 결과만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초반 스타트를 지나쳐 중반을 넘어서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시끄럽게 소리를 쳤다.
37분대면 메달을 기대할 수 있을 거라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고조됐고 병사들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조영준 선수가 결승점을 통과할 때쯤에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졌다.
장태산 선수가 넘어졌을 때도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몰입했다.
모두 다 김형철 병장 눈치만 봤다.
TV에서 금메달 확정이라고 자막이 뜨자 그제야 눈치가 사라졌다.
국뽕에 취했다.
금메달이라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져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저, 정말 대단하군요…….]
[양수혁 해설 위원님. 오늘 금메달과 동메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경기 시작 전 절대 불가능하다 말씀하셨는데요.]
[제가요? 하, 하하. 절대 불가능이 아니라 쉽지 않다는 의미였습니다. 일단 오늘 금메달을 딴 조영준 선수 축하드립니다! 이름도 없는 신예가 올림픽에 나와 금메달을 땄습니다! 오늘은 한국 노르딕 스키 역사의 전환점을 맞는 터닝 포인트가 되겠습니다!]
양수혁 해설위원이 능글맞게 말을 돌렸지만, 메달 획득 소식에 누구 하나 더는 따지지 않았다.
“아우……. 나 조금 전 심장 쫄려서 죽는 줄 알았다.”
“저도 그랬지 말입니다.”
“부럽다. 군대는 안 가도 되는 거 아냐?”
“아! 진짜네요.”
병사들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조심스럽게 김형철 병장 눈치를 살폈다.
내기에서 홀로 승리한 김형철 병장.
느긋하게 처음 자세 그대로 누워 부처님의 염화미소를 짓고 있었다.
“봤냐?”
무심한 듯 툭 던지는 한 마디.
“네…… 넵!”
“정말 대단하십시다! 병장님!”
“김 병장님은 처음 볼 때부터 저의 우상이셨습니다!”
“모두 찬양하라! 위대한 존재를!”
다소 과장된 격한 찬사가 막사에 울렸다.
“오 일병.”
“넵!”
“장부.”
“여기 있습니다!”
오 일병이 내기 장부를 김형철 병장에게 넘겼다.
“으으…….”
살생부를 맞닥뜨린 듯 병사들이 떨었다.
김형철 병장의 패배를 예상하고 자신들의 전 재산을 걸었다.
대한민국 국민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서민에(?) 속하는 군바리들.
김 병장 말 한 마디에 거지가 될 수 있었다.
“내 친구 봤지?”
“넵! 봤습니다! 엄청나신 우주인 급이십니다! 그런 친구 분과 우정을 맺고 계신 김형철 병장님도 우주인이십니다!”
“못생긴 우주인이라고?”
“아, 아닙니다! 신이십니다! 우주신!”
“존경하옵고 찬양해 마지않는 김형철 병장님의 하해와 같은…….”
울상이 된 병사들이 최대한 먹힐 만한 아부를 던지며 빌었다.
긴긴 겨울 날 냉동만두 하나 사먹을 수 없는 군바리는 죽은 군바리밖에 없었다.
“그래……. 코 묻은 애들 돈 받아서 뭐하겠냐. 모두 면제!”
“야호!!!”
“김형철 병장님은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막사 안에 다시 한 번 환호성이 터졌다.
“유 병장!”
“넵! 이 막사 안의 위대한 지존이시여.”
“늦었어~.”
“네?”
“나 물러날 왕고라고 폐물 취급했지?”
“아, 아닙니다! 전 절대 그런 적이…….”
“얘들아. 유 병장 완전군장 준비해라! 복장은 팬티 하나면 된다고 했다. 사나이는 두 말 하지 않는 법! 만약 내 말에 동조하지 않는 자는 돈을 돌려받음과 동시에…… 알지?”
“네에에엡!”
“그럼 바로 실시!!!”
“시이이일 시이이이이이!”
복창하는 병사들.
“으아아악! 안 돼!!! 강 상병! 조 일병!!!”
“저부터 살고 봐야겠습니다!”
“얘들아 뭐하냐! 빨리 벗겨!”
“으아아아아아아아……. 니들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유 병장은 울부짖었지만 누구 하나 동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1사단 15연대 본부대 눈 내리는 연병장에서 말년급 병장의 솔선수범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팬티 바람으로 정신통일을 외치며 완전무장한 채 뺑뺑이를 돌았다는 전설적 괴담이 탄생한 날이었다.
***
“국기는?”
“…… 겨우 입수했습니다.”
“이 거야?”
“네. 벤쿠버 조직 위원회에서 헬기로 배송 받았습니다.”
“아우. 미치겠네. 누가 이런 사태가 터질 줄 알았나…….”
“그러게 말입니다.”
“후우우우우.”
캐나다 동계 올림픽 조직위원회 휘슬러 파견 직원들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몰라 대한민국 국기 하나만 준비했다.
지금껏 시상식에서 계양해 본 적이 없어 더 느긋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터졌다.
대한민국 크로스컨트리 스키 대표 두 사람이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버렸다.
시상식이 바로 이어졌기에 부랴부랴 본부에 연락해 군용 헬기로 대한민국 국기를 받았다.
자칫 전 세계 생중계 중에 망신을 당할 뻔했다.
메달 국가 국기를 준비하지 않는 올림픽 대회라는 타이틀을 달 뻔했던 것이다.
“빨리 가져가야겠습니다.”
“그래. 가자.”
국기 문제로 잠시 시상식이 지연됐다.
핑계를 댔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대한민국 국기를 들고 시상식장으로 향했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가는 시상식장.
준비하고 있던 봉사자들이 태극기 두 개를 달았다.
“선수들 입장하라고 해.”
“넵!”
IOC 위원이 메달을 증정하기로 했다.
대기 중인 선수실로 빠르게 연락이 갔다.
날이 저물기 전에 시상식이 끝나야 했다.
“괴물들이야…… 괴물…….”
국기가 모두 걸리자 이제야 한 시름 놓고 낮에 있었던 일을 상기하는 조직위원회 관리자.
아직도 결과가 믿기지 않았다.
***
“다니엘…… 축하해요.”
“겨우 동메달인데요~.”
“미안해요. 당신과 친구를 무시해서.”
“아닙니다. 모르면 그럴 수도 있죠.”
시상식 대기실에 소피아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그녀와의 약속은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처음에는 흥미가 갔던 여자로서의 매력도 좀비가 되어 쫓아오던 그 날 밤 이후 싹 사라졌다.
조영준과 함께 제일 앞줄에서 달려오던 소피아.
그녀의 침 질질 흘리며 눈 돌아가 있던 모습은 죽어서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약속 지킬게요. 뭐든.”
파란 눈을 반짝이는 그녀.
스키 선수가 오늘따라 달콤한 향수를 잔뜩 뿌리고 나타났다.
“그래요?”
“네…….”
눈을 반짝이며 뭔가 크게 기대를 하고 있는 소피아.
그녀에게 다가갔다.
움찔 놀라지도 않고 웃는 눈으로 당당히 맞이하는 소피아.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그녀가 뿌린 향수 냄새가 진하게 맡아졌다.
그리고…….
“내 소원은…….”
조용히 그녀의 귓속에 속삭였다.
“네? 뭐, 뭐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