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0화 (429/1,284)

 # 430

회귀의 전설

430장, 메달을 따야 하는 이유 (2)

“오늘 어디에서 중계해?”

“KBC에서 중계합니다.”

“빨리 켜봐!”

“넵!”

“김 병장님 시작합니다!”

[2010년 캐나다 동계 올림픽 크로스컨트리 15km 프리스타일 경기가 바로 시작합니다. 기상 상태가 양호하지 않아 2시간 정도 경기가 지연되었습니다. 오늘 이 경기에는 대한민국의 유망주 선수 두 사람이 출전합니다. 양수혁 해설위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 경기 메달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제 예상으로는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아직 스키 분야에서는 걸음마 수준입니다. 특히 노르딕 스키는 신체적 역량 차이로 인해 선두 그룹을 따라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나 희망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영준 선수와 신인 장태산 선수에 대해 대회 관계자는 메달을 한 번 노려봐도 좋다고 전해왔습니다.]

[그래요? 하하. 그 관계자 저도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 이제 경기가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선수들이 출발 선상에 몸을 나타냈습니다. 해설위원님 노르딕 스키, 그중에서 크로스컨트리는 어떤 스키입니까?]

[노르딕 스키 중 하나인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다들 생소할 겁니다. 북방을 의미하는 ‘노르드’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발달한 스키입니다. 보통 크로스컨트리, 스키점프, 노르딕 복합 이렇게 3종목으로 나눠집니다. 그중에서 지금 펼쳐지는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15km, 30km, 50km 종목이 있습니다.]

[한국 선수들은 이 종목에서 메달을 딴 적 있습니까?]

[1960년 스쿼밸리 동계올림픽에서 기하윤 선수가 처음으로 출전했고 메달은 동계아시아게임에서는 몇 번 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에서는 메달과는 거리가 먼 성적을 냈습니다.]

[경기 방식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지금 펼쳐지는 15km 프리스타일 경기는 인터벌 스타트 경기로 진행됩니다.]

[인터벌 스타트 경기요?]

[최소 10초에서 30초 간격으로 개인 출발을 하는 경기입니다. 결승 지점에서 출발 시간과 합산해 순위가 매겨집니다.]

아나운서의 차분한 목소리가 TV를 통해 전해졌다.

“이건 예선도 없나 봅니다. 바로 달린답니다!”

“흐흐흐. 김 병장님 제대하기 전에 크게 털리겠습니다.

“전 재산 담배 다섯 갑 걸었지 말입니다. 올해부터 면세담배 사라져 PX에서 제값 주고 사온 녀석입니다.”

“제가 아는데 크로스컨트리 스키에서는 메달 못 땁니다. 우리는 유럽 애들에 비하면 유치원 수준이라고 들었습니다.”

“오늘은 무조건 파티입니다!”

한국시간 새벽 6시.

캐나다 시간 오후 1시에 크로스컨트리 경기가 시작 됐다.

갑자기 강풍이 불고 눈이 내려 예정 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어졌다.

일요일이었던 어제 오후 갑자기 쏟아진 폭설 재설 작업 때문에 쉬지 못했던 1사단 15연대 본부대 병사들은 오전 자유 시간을 명받았다.

어차피 군단 동계 훈련도 1월 초에 모두 끝났다.

전방에서 동계 훈련이 없는 사단은 대부분 눈과 씨름하거나 편안하게 시간을 보냈다.

괜히 움직였다가 병사들 사고라도 나면 간부들만 골치 아팠다.

그렇게 혜택 아닌 혜택을 누리고 있는 본부대.

월요일 아침 늦잠을 자야 할 병사들이 일찍부터 부산을 떨었다.

아침 식사도 거른 채 TV를 켰다.

부대 내에서 철저히 금지가 됐지만 오늘은 은밀한 내기가 걸렸다.

김형철 병장 친구인 장태산이 메달을 따느냐 마느냐에 다들 촉을 세웠다.

“흐흐흐. 오 일병 다 적었지?”

“넵! 김 병장님.”

“니들 경기 끝나면 바로 상납해라.”

김형철이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아니 김 병장님 이건 아니라니까요. 그냥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제가 애들 말려보겠습니다.”

“맞습니다. 이건 분명히 질 게 뻔합니다. 아시안 게임에서도 금메달 따기도 벅찬데 올림픽 메달이라니요. 저기 유럽 선수들 보십시오. 떡대가 다릅니다.”

“와아아아. 피지컬 장난 아니네.”

화면이 돌아가며 대기 중인 선수들을 한 번씩 카메라에 담았다.

그냥 봐도 190cm 장신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동양 선수들의 왜소한 체격과 대놓고 비교가 됐다.

“난 내 친구 장태산 믿는다. 그놈은……. 학교 다닐 때부터 전설이었다.”

“에이~ 그래봐야. 동네 전설이겠죠.”

“17대 1로 싸움 좀 했습니까?”

말년 병장이 돼 가는 김형철을 향해 아래 기수인 두 사람이 편하게 말을 나눴다.

지는 해처럼 왕고에서 밀려나는 뒷방 병장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17대 1? 아그들아. 그 정도로 되겠냐? 장주시 조폭들 모조리 아작냈어~.”

“네? 조, 조폭을요?”

“혹시…… 몇 년 전 뉴스에 나왔던 장주시 조폭 검거 이야기 주인공이…….”

“그래. 내 친구 장태산이 뒤집어 놓은 거야.”

“와아아……. 대단하십니다!”

“그뿐만이 아니지. 공부도 갑자기 엄청나게 잘하게 되면서 한국대 법학과 들어갔다. 그리고 니들도 봤다시피 FOB랑도 엄청나게 친해. 그 놈은…… 너희 상상을 뛰어넘는 탈 지구인 급이다.”

김형철은 장태산에 있어 신급에 해당하는 경외심을 품었다.

“흐흐. 그래도 메달은 힘듭니다. 유나 양과 스피드 스케이팅, 쇼트 트랙 말고는 모두 메달 꽝입니다.”

하지만 휘하 소대원들은 김형철과 생각이 달랐다.

다음 주에 분대장 견장이 예약된 넘버 투 유 병장이 고개를 저었다.

“맞습니다! 이건 보나 마나입니다.”

“흐흐흐. 오늘 복 터졌습니다.”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다는 표정들이었다.

“새끼들 속고만 살아가지고……. 긴 말 할 것 없다. 똥인지 된장인지는 먹어보면 아는 거고~ 오늘 난 친구에게 모두 걸었다.”

깔깔이 두 개를 입고 베게로 팔베게를 만든 김형철 병장이 느긋하게 모포 위에 누웠다.

“설마…….”

“아, 아닐 거야. 공부벌레 한국대 생이 언제 운동했다고 무슨 올림픽 메달이야…….”

“그렇지?”

“만약에 김형철 병장님 말대로 된다면…….”

“오늘 한국 선수가 크로스컨트리 스키에서 메달 따면……. 완전무장에 팬티만 입고 연병장 돌겠다!”

“꺄아아! 역시 떠오르는 태양 유 병장님이십니다!”

“저도 같이 돌겠습니다!”

“저도요!”

막사 안에 머물고 있는 병사들 중에 일병 이상 참가한 내기 대결.

걸린 판돈 20만 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걸 모두 혼자 감당한 김형철 병장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워낙 자신감 넘치는 말과 행동에 도리어 내기를 건 나머지 병사들이 긴장했다.

아닐 거라 애써 믿었지만 혹시나 하는 사건이 터질 수도 있었다.

모두 숨을 죽였다.

타앙!

TV에서 출발 신호가 힘차게 울렸다.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오늘 이곳 캐나다 휘슬러에서 펼쳐지는 크로스컨트리 스키 15km 프리스타일에 출전한 대한의 건아들이 메달을 딸 수 있도록 모두 기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흥분한 아나운서 목소리가 막사 안에 울렸다.

그리고 긴장한 병사들이 눈이 빠져라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타앙!

전자총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오르막과 평지, 내리막으로 각각 3분의 1로 구성된 코스를 향해 첫 번째 선수가 내달렸다.

바로 뒤에 다음 선수가 대기했다.

30초 간격으로 선수들이 출발했다

강풍과 눈으로 2시간 동안 경기가 지연됐지만 문제 없었다.

촤아앗 촤아앗.

첫 번째 선수가 힘차게 튀어 나갔다.

팔과 엉덩이 근육이 보기 좋게 씰룩거렸다.

설원의 마라톤으로 불리는 크로스컨트리는 주법에 힘이 많이 필요했다.

특히 프리스타일은 스키를 신고 뛰듯이 달려야 했다.

15km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무지막지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게 하는 경기였다.

조영준과 나는 선두 그룹에 속했다.

세계 랭킹에 따라 출발 순서가 정해졌다.

이렇다 할 국제 성적이 없는 우리는 들러리 정도로 취급당했다.

뒤에 대기 중인 세계 기록 선수권자들은 우리를 보며 비웃기까지 했다.

“저것들은 뭐야? 괜히 눈길 어지럽히지 말고 제대로 뛰어라. 헛발질로 넘어져 앞길 막으면 안 돼~.”

“킬킬킬. 원숭이들이 눈은 잘 타나 몰라?”

“엄마 젖 더 먹고 와야 하는 거 아냐? 크크크.”

“칭총들 짧은 몸뚱이 봐라. 흐흐흐흐.”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놈들도 보였다.

유럽 국가 선수들이 다수였다.

아무리 선진국이라 해도 유럽 놈들 중에 양아치들은 섞여 있었다.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페인,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캐나다 선수들 대부분 나를 비롯해 동양 선수들을 비웃었다.

긴장감을 풀기 위해 약한 자에 대해 무시와 경멸,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자기들끼리 은밀히 나누는 대화였지만 특출한 나의 귀에는 다 들렸다.

영어를 비롯해 각국 언어로 욕을 해대고 있어서 알아듣는 동양 선수들이 드물었다.

나만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게 가능했다.

중국과 일본, 대만, 한국 선수가 동양권 선수들의 다였다.

모두들 주눅이 들어 있었다.

언어는 알아듣지 못하지만 덩치와 기세로 이미 기가 죽어 있었다.

오늘 메달을 따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 됐다.

“……쟤들 뭐라는 거야?”

잠시 후에 출발해야 할 조영준이 기분 나쁜 듯 놈들을 노려보며 물어왔다.

아침 대기 시간부터 우리를 보고 실실 쪼개는 놈들의 비웃음을 모를 수 없었다.

“원숭이들 엄마 젖 더 먹고 오라는데요~.”

“뭐, 뭐라고! 이 금털 오랑우탄 같은 새끼들이!”

조영준 선수 성깔 있었다.

키는 크지 않지만 깡다구가 넘쳤다.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왔다.

“신경 꺼요. 실력으로 저 새끼들 큰 코를 납작하게 눌러버려요.”

“알았어! 오늘…… 내가 피똥 싸는 한이 있어도 달린다!”

조영준 선수가 결의를 다졌다.

자극제로 아주 좋았다.

“……한국 새끼들 시끄럽네.”

바로 앞에서 출발할 중국 놈도 우리 편이 아니었다.

중국어로 중얼거렸지만 바로 직역되어 귓속을 파고들었다.

중국 놈은 ‘칭총’이라는 중국인 비하 발언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짱깨 가다가 콱 엎어져 대가리 깨져라. 흐흐.”

저주를 뿌렸다.

“뭐라고!”

개폼 잡고 있던 짱깨가 뒤를 돌아봤다.

“어이구~ 그게 들렸어요? 한국어로 한다는 게 중국어가 나갔네~. 크크크.”

전혀 사과할 의사 없는 표정을 지으며 짱깨를 놀렸다.

강한 유럽 선수들에게는 찍소리 못하고 괜히 조영준과 나에게만 시비였다.

저열한 짱깨 본성이었다.

힘이 없을 때는 고개를 숙이다 어느새 뒤통수를 치는 족속들다웠다.

대국이라 스스로 부르지만 밴댕이 소갈딱지만도 못한 짱깨들.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타고난 민족성 자체가 돈 말고는 누구를 믿지 못했다.

인의예지를 한참 더 배워야 할 민족이었다.

“다카이시 할아버지, 미네코 할머니…….”

그에 반해 내 뒤에 선 일본 선수는 양반이었다.

눈을 감고 정신집중 주문을 외웠다.

들어보니 고조할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조상들 이름을 쭉 불렀다.

천황을 위해 목숨을 버렸던 2차 세계 대전의 정신 유산을 엿볼 수 있었다.

“준비!”

중국인 선수가 출발 자세를 취했다.

“출발!”

심판의 명령에 중국 선수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다른 선수보다 더 빨리 달렸다.

한눈에 봐도 오버페이스 주법.

오래 못가 지쳐 떨어질 게 뻔했다.

그 뒤를 이어 조영준도 자세를 잡았다.

“천리마처럼 달려요!”

힘차게 뒤에서 응원했다.

“준비! 출발!”

그리고 조영준이 출발선을 벗어났다.

스타트가 좋았다.

처저적.

출발선에 자세를 잡았다.

카메라가 날 찍고 있는 게 보였다.

전국에서 보고 있을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오늘은 서비스를 날릴 시간.

“준비! 출발!!!”

심판의 말에 출발선을 박찼다.

촤아앗 촤아앗 촤아앗.

힘차게 스키를 신고 달렸다.

근육이 팽팽하게 당겼다.

물론 힘 조절을 했다.

앞서가는 조영준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번 대회 메달권은 최소 37분대.

아직 조영준의 실력으로는 힘들었다.

그러나 뒤에 내가 있었다.

조영준의 등을 바라보며 가볍게 입술을 뗐다.

“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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