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3화 (422/1,284)

 # 423

회귀의 전설

423장. 개막식 (1)

“놈은?”

“개막식장에 있습니다.”

“준비는?”

“피의 전사들이 대기 중입니다. 명을 내리시면 오늘이라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때가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놈 하나다. 내일 경기장으로 이동하면 그 때를 노린다.”

“명을 받드옵니다.”

뭉클뭉클 핏빛 기운이 넘실거리는 휘슬러의 가정집.

노르딕 스키 경기장과 가깝지만 도시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집안은 참혹했다.

주인이었던 늙은 노부부의 머리는 목이 베인 채 카펫 위를 뒹굴었다.

흡혈귀에게 피가 빨린 듯 미이라 상태의 시신 주변으로 몇 구의 시체가 더 보였다.

지난 며칠 동안 방치된 시신들은 버석하게 마른 채였다.

악마의 소행이었다.

목숨이 끊어지던 순간까지 고통을 받은 듯 공포에 젖은 두 눈을 부릅뜬 시체들.

사체 사이로 몇 명의 아랍 사내들이 핏발 선 눈동자로 대화를 나눴다.

손목 위로 드러난 타투 비슷한 문신들이 음울하고 어두운 기운을 더했다.

맥이 뛰는 리듬에 맞춰 혈류가 지날 때마다 문양이 스스로 빛을 뿜어냈다.

괴기스러운 악마들의 파티장이 따로 없었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하라.”

“실패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일개 개인의 청부에 1억 달러가 책정됐다.

아사신 역사상 이런 청부는 없었다.

단체의 수장도 아니고 고작 한국의 스키 대표 선수 한 명에 불과했다.

정보에 의하면 수상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아사신의 피의 전사들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힘을 보충하라. 오늘 밤은……. 양껏 포식해도 된다.”

“크크크크크.”

아사신 살수들의 눈동자에 핏빛 광망이 번들거렸다.

지하 창고에 가둬놓은 10여 명의 인간들.

그들의 피를 빨 생각에 흥분해서 눈동자가 돌아갔다.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드디어 2010년 동계 올림픽 시작을 알리는 공연이 끝나고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켜놓은 TV에서 흘러나오는 흥분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대하고 화려한 겨울 축제의 막이 드디어 올랐다.

오늘을 위해 캐나다 정부는 4천만 달러를 개막식 비용으로 지불했다.

볼거리가 풍성했다.

캐나다 동계 올림픽을 상징하는 단풍잎 무대 장치를 비롯해 각종 공연이 펼쳐졌다.

그리고 입장하기 시작하는 각국 대표단.

호명과 함께 기수를 선두에 세우고 그 뒤로 선수들이 따라 입장했다.

아사신의 살수들은 침묵으로 그 장면을 지켜봤다.

[와아아아아아아!]

환호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드디어 기다리던 장면이 보였다.

46번째 입장하는 국가.

[SOUTH KOREA!]

호명되는 국명.

기수 뒤를 따르는 선수들 선두에 세계적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유나와 나란히 걸으며 들어서는 한 남자.

“크크크크.”

아사신 살수들의 빨간 눈동자가 남자를 노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진득하게 흘렸다.

***

“김 병장님, 오늘 완전 땡잡았습니다~. 눈도 더 이상 안 올 거 같은지 비상 해제입니다!”

“이게 다 김 병장님 영도력 덕분입니다!”

“찬양하라 김형철 병장님을~.”

“오! 그대는 나의 왕이십니다.”

한 겨울의 맹추위가 들이닥친 파주의 군부대.

최신식 막사로 인해 과거와 달리 따뜻함이 도는 내무반에 찬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끼들~ 낯간지럽게~ 옛다. 일병과 이병 나부랭이들은 PX 수라간에 달려가 각종 냉동 시리즈를 구매하여 풍족함을 더하라~.”

“충성! 충성!”

“오! 나의 찬란한 태양이신 주군의 명을 받드옵니다!”

“오예!!!”

고참 일병이 휘하 이병들을 이끌고 후다닥 뛰어갔다.

몇 달 사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던 왕고참들이 모두 제대한 후 내무반의 명당자리를 차지한 김형철.

자신의 친구 덕분에 열린 걸그룹 FOB의 위문 공연 직후 그날부터 그는 부대의 전설이 되었다.

간간이 괴롭히던 병장들 갈굼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수시로 대대장을 비롯해 부대 장교들이 김형철을 불러댔다.

그때마다 야식으로 라면뿐만 아니라 커피와 간식을 배불리 먹었다.

FOB 위문 공연 성사로 사단장 표창과 휴가도 받았다.

친구 면회 한 번으로 대대에서는 준부대장처럼 편의를 누리며 지냈다.

지금도 김형철의 관물대에는 FOB와 딱 찍은 사진이 별처럼 빛났다.

성격 좋고 집안도 먹고 살 만한 형철은 비상금도 두둑이 풀어 내무반에서 인기가 가장 좋았다.

오늘도 5만 원을 투척했다.

눈치 빠른 병장들이 1만 원씩 각출하자 순식간에 10만 원이 넘었다.

그들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김형철 병장 앞으로 가끔 날아오는 FOB 소속사 위문품에 들어 있는 싸인 CD와 홍보물 사진은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김형철 병장 눈에 들어야 하사품을 받을 수 있었다.

내무반은 대대에서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훌륭하게 굴러갔다.

김형철 병장 한 마디면 소대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2010년 들어 군통령으로 자리 잡은 FOB.

그녀들과 친분 있는 김형철은 왕에 버금가는 위세를 누렸다.

배고픈 병사들은 입맛을 다셨다.

잠시 후 도착할 각종 먹거리에 기대를 걸었다.

10만 원이면 거하게 냉동만두, 냉동핫도그, 냉동피자, 냉동 떡볶이, 냉동 떡갈비와 음료로 파티를 열 수 있었다.

며칠 동안 내렸던 하얀 똥 덩어리를 치웠다.

그 일을 두고 대대장님 명으로 오늘과 내일은 강제 휴식이 정해졌다.

2010년 2월 13일 토요일 오전 11시.

오늘은 눈 때문에 토요일 휴무를 반납하지 않아도 됐다.

따뜻한 내무반에서 TV를 봤다.

오늘 낮 메뉴로 선정된 군대리아 버거는 모두 패스하기로 무언의 약조가 됐다.

냉동식품으로 배를 불리고 동계 올림픽 개막식을 보는 개꿀 같은 휴식 시간.

생중계 되는 개막식은 볼거리가 넘쳤다.

개막식장은 실내 센터였다

전혀 춥지 않을 것 같았다.

인공적 레이저로 터지는 불꽃 모양과 웅장하게 울리는 사운드는 진짜 불꽃이 터지는 환상을 만들어 냈다.

캐나다를 상징하는 단풍잎으로 물들인 무대장식이 돋보였다.

“캬아~ 저거 다 돈 아닙니까?”

“저게 다 세금이지. 나 대학 시절에 왔던 코미디언이 그러더라. 저기 여러분의 등록금이 펑펑 터지고 있습니다~.”

“학생회 간부 새끼들 그걸로 뒷돈 많이 처먹었습니다.”

“흐흐흐. 캐나다 미녀 다리 길이는…….”

“와아아아. 다 미인들만 있지 않습니까?”

“죽인다……. 크으!”

혈기 넘치는 청춘들은 이것저것 대화를 하다 결국은 여자 얘기로 귀결됐다.

세계 축제고 뭐고 필요 없었다.

환상적인 연극이 펼쳐질 때마다 병사들의 눈은 화면에 잡힌 미녀를 쫒았다.

미녀들이 등장할 때마다 약속이나 한 듯 환호성이 터졌다.

어차피 연극 내용을 해석해낼 만한 문화적 감수성이 뛰어난 자들도 몇 명 없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죽입니다!”

“제대 후에 반드시 캐나다에 갈 겁니다!”

“나도 같이 가자~.”

편하게 앉아 올림픽 개막식을 시청했다.

그사이 일병과 이병 나부랭이들이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각종 먹거리를 들고 왔다.

“콜라! 콜라!”

“난 쿨피스~.”

병사들은 입에 먹거리를 쑤셔 넣으며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반인 시절과 달리 겨울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TV밖에 없었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 야외 체육 활동은 전면 금지 됐다.

[SOUTH KOREA!]

“오! 드디어 등장입니다!”

“대한민국~♬”

군인이라 더 국뽕 감동에 취할 수밖에 없는 병사들이 대한민국을 연호했다.

지루한 입장식 중간에 등장하는 대한민국 국기와 선수들.

“김유나다!!!”

“오! 나의 여신님…….”

“김유나는 사랑입니다.”

“어? 그런데 뭡니까 저 남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기, 김 병장님. 그분 아닙니까?”

“누구?”

아랫것들 노는데 함께할 수 없는 고독한 제왕(?) 김형철 병장은 핫도그 하나 물고 책을 보는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응?”

그리고 보았다.

김유나 옆에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입장하는 선수 하나.

키도 크고 압도적으로 잘생긴 얼굴.

절대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는 존재였다.

김형철의 큰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졌다.

“자, 장태산……. 니가 왜 거기서 나와!!!”

***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귀청을 때리며 파고들었다.

각 국가가 등장할 때마다 터지는 환호성.

파바바바바밧.

관람석에서 터지는 카메라 불빛이 눈에 아리게 박혔다.

둥두루당 둥둥~♪.

흥겨운 음악 소리에 맞춰 캐나다 남녀들이 원을 이루며 춤을 췄다.

원주민 복장을 하고 있는 그들은 힘든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와우.”

짧은 감탄이 터졌다.

TV에서 봤던 것과 실제 참여해 경험하는 건 천지차이였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러나 얼굴 표정은 기계적 미소를 유지했다.

지금 전 세계에 생중계 중이다.

자리가 너무 좋았다(?).

대한민국 기수 바로 뒤 첫줄이었다.

그것도 김유나가 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우리 뒷줄부터는 다섯 명이 한 줄이었지만 우리만 두 명이었다.

옆에 나란히 걷는 김유나가 보조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바쁘게 흔들었다.

“유나아아아~ 사랑해요!”

“빙판의 여왕 만세!!!”

유나를 부르는 소리가 귀에 착착 들렸다.

그에 반해 난 무명의 신인.

전생 촌놈이 출세해서 국가대표가 되었다.

이 자리가 몹시 불편하고 반갑지 않았다.

웬만하면 뒤로 빠지고 싶었다.

오늘 김유나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대한민국 남자들의 공공의 적이 될 수 있었다.

조용히 메달 따고 떠나고 싶었지만 선수촌장님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보통 대회 관계자들이 앞에 섰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선수들 중에 가장 잘났다는 이유 하나로 뽑혔다.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태릉 선수들에게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특히 여자 선수들이 나를 몰표로 밀었다.

어쩔 수 없이 얼굴마담이 됐다.

김유나 옆에 서자 카메라가 더 많이 터졌다.

앞으로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왕 그렇게 된 것 마음을 열고 즐겼다.

열심히 손을 흔들며 대한민국 대표 선수 흉내를 냈다.

트랙을 한 바퀴 돌고 선수들 좌석으로 이동했다.

실내 경기장은 바람 한 점 없이 아늑했다.

개막 전에 선수 한 명이 연습 중에 죽은 일로 애도의 시간을 가졌지만, 축제 분위기는 쉬이 꺾이지 않았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지난 생과 확연히 달랐다.

김유나와 내가 대한민국 선수 전면에 섰다는 것.

작은 변화가 폭풍이 되어 미래를 변하게 할 수 있다는 나비 효과를 무시할 수 없었다.

최대한 겸손한 자세를 보이며 내숭을 떨었다.

자리에 앉아 각국 선수들이 입장하는 걸 지켜봤다.

둥둥 터지는 음악과 흥겨운 퍼포먼스의 연속이었다.

또 이런 맛에 국가대표도 하고 그러는 것 같다.

그렇게 선수들이 모두 입장했다.

교장선생님 훈화 시간처럼 여럿 유명 인사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역시 분위기 깨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간단한 축사를 왜 저렇게 길게 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망의 성화 점화.

“오오오오!”

“그레잇!”

지하에서 솟아오른 특이한 성화대.

개막식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

지난 생에는 군대에서 눈을 치우느라 시청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당시 토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연대장님 명령으로 대민 봉사를 나갔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눈앞에서 밴쿠버 동계 올림픽을 즐기고 있다.

4명의 성화 주자들이 성화를 들고 섰다.

그그그그그.

성화대를 향하는 세 개의 봉화연결대가 나왔다.

“뭐야? 네 개 아니야?”

“……고장 났네.”

“이게 뭐야?”

자원봉사자들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돈을 처발라도 어쩔 수 없는 실수는 막지 못하는 법.

성화봉을 들고 있던 한 명이 당황했다.

화르르르르르르.

고장난 것을 어쩌지 못하고 속절없이 타오르는 찬란한 성화.

인류의 번영과 공동평화를 상징하는 올림픽의 상징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일제히 터지는 함성.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흥겨운 축제.

둥두랑 둥두~?.

흥겨운 음악 소리와 함께 각국 선수들이 성화대를 중심으로 뭉쳐 흥겹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국 선수들도 나가 한 자리를 차지했다.

자원봉사들과 선수들이 뒤엉키며 나이트클럽 분위기를 방불케 했다.

“오빠!”

김유나가 활짝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분위기에 휩쓸려 흥분한 김유나 볼이 분홍빛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유나야 멈춰!!!

더 이상 다가오면 내가 위험해!

김유나를 향해 경고를 보냈다.

여기서 유나와 춤을 춘다면 빼박 증거가 남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고 점점 더 다가오는 유나.

스윽.

그때 내 앞으로 뻗어진 팔 하나…….

응? 누구 건데 무슨 팔이 이렇게 길어?

갑자기 쓱 나타난 낯선 팔이었다.

절로 고개가 팔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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