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3
회귀의 전설
413장. 확실한 한 방 (1)
“누구십니까?”
“딸 구하고 싶지 않나?”
“당신……. 누구야!”
“딸 목숨보다 내 정체가 더 궁금하나?”
“…….”
천일그룹 비서실장 진광형은 딸을 언급하는 정체모를 자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사실 천해운 부회장이 주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큰 아들 천민재가 선수촌에서 나와 룸에서 술을 마시다 적발되면서 그 스트레스는 더 심해졌다.
평소라면 조용히 넘어갈 일에 불과했지만 몇 곳의 인터넷 신문들이 자료를 쏟아냈다.
병신 같은 자식이 동료들과 안마시술소로 들어간 사진까지 찍혔던 것이다.
재벌 집 아들들답지 않게 안마시술소를 자주 드나들며 그곳에 재미를 붙였다.
민간인이라면 크게 상관없었겠지만 국가대표에 군인 신분이었다.
다른 신문들도 기다렸다는 듯 거들고 나섰다.
어디서 수집했는지 천민재가 선수촌 통금 시간에 나이트에 출입한 것과 술 취한 여자를 끼고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도 첨부됐다.
그러면서 여론이 들불처럼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재벌 집 자식이 벌이는 망나니짓에 관심 없던 국민들도 함께 분노했다.
손쓸 틈도 없이 천민재는 헌병 수사를 받게 됐다.
천일 그룹이 사방에 도움을 청했지만 여론이라는 감시벽에 막혀 힘을 쓰지 못했다.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형식적으로나마 영창에 들어가 있도록 윗선과 약조를 했다.
이런 이유로 큰 아들 사태에 부회장 천해운은 뻗치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곳을 들쑤셔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그 화가 비서실장이나 기타 직원들에게로 향했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그 화를 받아주고 새벽 1시가 돼서야 집에 귀가한 진광형이었다.
뺨을 몇 대나 얻어맞아 얼굴은 퉁퉁 부었다.
병신, 개새X라는 욕을 숨 쉴 때마다 들었다.
망한 안아 그룹 오승혁 회장과 형 동생하던 천해운 회장이었다.
지랄 같은 성격도 아주 많이 닮았다.
술에 취한 그를 겨우 첩의 오피스텔에 넣어주고 집에 돌아왔던 진광형.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다시 집 앞 공원으로 나온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다.
어제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
차가운 공원 벤치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대화를 나눴다.
달리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덩치가 꽤 큰 남자와 단 둘이었다.
“……누가 보냈습니까?”
딸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진광형은 위험을 무릅썼다.
“이거 받아.”
“뭡니까?”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고 우리 보스가 그걸 마시면 당신 딸 차도가 있을 거라고 말했어. 확인해 봐.”
“독약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남자가 들고 있는 파란색 병을 받아들고 진광형이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어차피 몇 달 안 남은 걸로 아는데?”
“…….”
냉정한 남자의 말에 진광형은 다시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딸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더 이상 약을 쓸 수 없어 진통제만 투여하고 있었다.
백혈병이지만 골수이식도 소용없다는 소견을 받았다.
급기야 딸이 죽으면 같이 세상을 뜨겠다고 마음먹은 진광형이었다.
설사 독이라도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억지로라도 먹여야 했다.
“독약 아니야.”
“그런데 왜…….”
“공짜는 아니지~.”
“뭘 원하십니까?”
“당신 딸의 목숨을 대신할 네 목숨.”
“그 무슨…….”
“당신이 그 일을 해주면 딸은 평생 공주처럼 살 수 있어. 엄마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갈 수 있도록 주선하지. 도망친 당신 아내도 딸 병원에 자주 가는 걸 모르지? 식당에서 일하는 돈으로 딸 병원비도 가끔 내고 있어. 티도 안 나지만.”
‘도대체 누구?’
진광형은 자신도 모르는 주변 사정을 알고 있는 남자를 유심히 쳐다봤다.
곰 같은 몸뚱이는 다소 둔해 보였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얼굴도 곰 같았다.
하지만 풍기는 기운이 여느 건달들처럼 깡패 짓이나 하는 그런 인물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통장에 50억 쏴줄 거야. 그 대신……. 같이 했던 공범 짓을 불고 3년만 썩고 나와. 어때 간단하지? 최고 변호사들을 붙여줄게.”
“원하는 게 정확히 뭡니까?”
“천일 그룹 비서실장이라는 양반이 말 귀를 못 알아듣네. 아직도 분위기 파악 안 돼?”
“설마!!!”
“흐흐흐. 이제 눈치챘네.”
진광형은 눈이 번쩍 떠졌다.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파악됐다.
허울만 비서실장이지만 천일 그룹의 은밀한 비밀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엮인 사건들이 암암리에 많았다.
딸이 아픈 걸 핑계로 종처럼 부려먹는 천일 그룹에 진심으로 충성하는 마음은 없었다.
다만 대한민국에서 재벌을 건드려 편한 꼴 못 본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어차피 막장 아닌가? 이거 먹여서 딸이 차도를 보이면 그때 실행하면 되는 거고~”
“그게…….”
“여기 계약금 5억. 법적으로도 10%니까 받아둬”
1억짜리 무기명 채권 다섯 장을 건네는 남자.
꿀꺽.
진광형은 이런 큰돈을 처음 손에 쥐어봤다.
월급과 부회장이 가끔 던져주는 용돈은 딸 병원비로 그때그때 다 쏟아 부었다.
“딸이 완치된 후 해외로 나가면 나머지는 1년에 3억씩 지급할 거야. 당신도 마누라 싫은 건 아니잖아?”
남자의 말에 진광형은 아내를 떠올렸다.
사랑해서 만났지만 바쁘고 소홀했던 탓에 평범했던 가정이 깨졌고 아내를 떠나보내야 했다.
아내는 진광형 인생에 보석이었다.
그런 아내가 딸까지 아프게 되자 패닉에 빠져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하지만 그간 병원에 몰래 드나들었다는 말에 그간 서운했던 분노가 사르르 녹았다.
“조, 좋습니다!”
진광형도 언젠가는 모멸을 끝없이 당했던 천일 그룹에 한 방 먹이고 싶었다.
“가지고 있는 거 있지?”
“네.”
진광형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래봬도 한국대 출신이었다.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해 천일그룹 엿 먹일 자료를 몇 개 가지고 있었다.
“그거 바로 지금 넘기고 나머지 화끈한 걸로 준비해줘. 일단 딸에게 그걸 먹여보고 차도 없으면 그 돈 그냥 먹어도 돼.”
남자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빙긋 웃었다.
“믿겠습니다.”
“아니 믿지 마. 우리가 언제 봤다고~. 그러니 확인하고 믿어. 집으로 가지. 나도 5억짜리 증거가 맞나 확인해야 하니까.”
한밤중에 불러내 이제는 함께 집으로가 가자고 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진광형.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나타나 동아줄이 되어 주는 그가 이제는 한없이 고마웠다.
손에 쥔 5억은 일이 잘못 돼 자신이 죽으면 딸과 아내에게 위자료로 줄 수 있었다.
사락 사락 사락.
하늘에서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나비처럼 떨어지는 굵은 눈꽃송이.
하늘이 주시는 마지막 축복 같았다.
***
“회장님이 지시한 대로 자사주 매입이 끝났습니다. 주식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 매입이 쉬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상장폐지 하시려는 이유가…….”
하관우 회장과 독대 중이다.
그가 갑작스런 주식 회수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귀찮아서요.”
“네?”
“계속 상장 유지하고 있으면 이것저것 간섭할 것 아닙니까. 그런 싹은 애초에 잘라야 합니다. 앞으로 TS 그룹은 대한민국 어떤 그룹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갈 겁니다.”
“……네.”
대답은 하지만 하관우 회장은 선뜻 믿지 못하는 것 같다.
대한민국 재벌 순위가 쉽게 바뀌지 않다는 걸 그는 그간의 기업 경영으로 잘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재상장 할 생각입니다.”
“회장님의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지주회사로 전환한다는 미명하에 TS 그룹 주식들을 긁어모았다.
세계경제위기로 주식이 바닥을 쳤다.
로버트의 자금과 그룹 자체 주식 매입으로 95% 자사주 매입이 완료됐다.
2008년 금융위기 여파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때가 좋았다.
오정이 무너질 때 사채 시장에 담보로 잡혀 있던 주식들을 끌어왔던 게 주효했다.
본래 소유했던 주식까지 합치자 어려움이 없었다.
개미들은 금융위기에 망하기라도 할까 봐 가격이 좀 오르자 투매하기에 바빴다.
그걸 모조리 쓸어 담았다.
“자진상장폐지 바로 신청하세요. 95% 지분을 소유했기에 공개매수 할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요즘 거래량도 미미했고 주식분산율도 요건에 맞지 않으니 바로 받아들일 겁니다. 정리매매 기간에도 주식이 나오면 모조리 매입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거래소에 계속 상장되어 있다면 골치 아플 일이 많았다.
지금은 몇 푼 안 되는 그룹이지만 벌레들이 달려들 일이 앞으로 많을 것이다.
해외 자본 뒤에 숨고 상장폐지 된다면 벌레들도 조심할 게 뻔했다.
강한 자에게는 고개 숙이고 약한 자에게 망나니 칼을 휘두르는 정치권에 약점을 보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폐지를 결정하게 됐고 계획대로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구입하는 모든 그룹이나 회사는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칠 것이다.
공시의무를 지킬 필요가 없게 된다.
상폐된 이후에는 오너의 자율권이 엄청나게 보장된다.
한미 FTA가 앞으로 2년 뒤에 발효될 것이다.
그 때는 지금보다 더 큰 위력으로 작용한다.
투자자 국가소송제라 불리는 ISD가 도입되면 대한민국 정치권은 함부로 해외 자본이 대주주인 TS 그룹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물론 대박을 터트리는 사람도 나타날 수 있었다.
이런 판에도 팔지 않고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때는 초대박을 맞을 것이다.
TS 물산 현재 시장가는 3만 원 수준이다.
몇 년 뒤에는 장외가가 최소 수백만 원 이상이 될 것이리라.
“천일 그룹에 대한 실사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회장님이 지시한 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재정 상황이 탄탄하지만……. 횡령이나 배임 문제가 심각합니다.”
하관우 회장이 파악했을 정도라면 정치권이나 검찰도 알고 있다는 소리다.
최고 권력자들에게 뒷돈이 들어간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2010년에 뒷돈 없이 기업인이 살아남는 경우는 희박했다.
정경유착은 어떤 시대나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했다.
“로비자금이겠군요.”
“뿐만 아니라 해외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자금이 계속 빠져 나가고 있습니다.”
“자료만 확보하면……. 쉽게 끝나겠군요.”
“확실히 보낼 한방이 필요합니다.”
측근에게 맞는 한 방이 가장 뼈저리게 아픈 법이다.
그래서 그룹들이 가족 경영을 이어가는 것이다.
천일 그룹은 인심을 잃었다.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은 악인의 관상이 아니었다.
그런 그를 노렸다.
어제 비서실장을 통해 몇 개 자료를 얻었다.
터트리기에는 살짝 아쉬웠지만 언론에 뿌려 분위기 잡기에는 그만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일이 진행될 겁니다. 접수할 수 있도록……. 능력 있는 인재들을 준비시키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요즘은 확실히 세상 이치를 좀 더 깊게 깨달아 가는 중이다.
적이 될 놈은…….
화끈하게 조져서 다시는 대갈빡을 굴릴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과정에 찍힌 천일 그룹.
캐나다 가기 전에 가볍게 디저트로 먹기에 안성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