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5화 (404/1,284)

 # 405

회귀의 전설

405장. 빙판 위의 왕과 여왕

‘오빠?’

김유나의 엄마 예미정은 딸의 입에서 나온 오빠라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친오빠가 없는 유나가 저렇게 반갑게 부를 남자는 대한민국에 없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한 남자.

키가 훤칠한 미남이 링크장 입구에서 유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장태산이라고 했지…….’

어젯밤 사건으로 예미정은 예민해져 있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김유나의 컨디션 조절이 쉽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연습에 만족을 해야 집에 돌아오던 딸이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하게 딸에게 문제가 생겼다.

천민재라는 녀석이 기어코 사고를 쳤다.

평소 녀석이 유나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이스링크 장에 간식을 가져온다거나 일부러 찾아와 파이팅을 외칠 때 눈치챘다.

유나가 인상을 찡그렸지만 예미정은 천민재를 괜찮게 생각했다.

천일 그룹의 장손이었다.

외모도 출중하고 국가대표답게 체격도 좋았다.

현재 유나가 주목을 많이 받고 있지만 이 분위기가 언제 시들해질지 몰랐다.

기업 스폰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터라 천민재의 행동을 깊이 염려하지 않았다.

명색이 그룹 손자에 국가대표라는 인물이 설마하니 양아치일 거라고 의심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현재는 국가대표로 참여하고 있어도 군인 신분이었다.

그런데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천민재가 야밤에 찾아와 유나에게 손찌검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미치는 줄 알았다.

경찰까지 출동했을 만큼 사건이 커졌다.

급하게 유나의 연락을 받고 찾아와 집으로 데려갔다.

눈물을 흘리며 경찰서에 가봐야 한다는 걸 겨우 말렸다.

사방에 유나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뭐든 기사화하려는 기자들 투성이었다.

어제는 어찌 입막음이 됐지만 자칫 왜곡돼 알려지면 이미지에 타격을 받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없었던 일처럼 덮고 싶지 않았다.

자초지정을 알아보고 최대한 대처를 해볼 생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천민재를 감옥에 처넣고 심정이었지만 자세하게 아는 게 없었다.

아는 기자들 명단을 뒤져보고 있을 때서야 유나가 말했다.

잘 해결됐다는 문자가 오빠에게서 왔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유나에게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다.

어떤 문자가 오갔는지 모르지만 유나의 얼굴이 한결 밝아진 후였다.

푹 잠을 자고 늦은 오후에 선수촌에 함께 왔다.

유나 훈련 스케줄이 단체 훈련과 달라 선수촌 제약이 많지 않았다.

유나를 향한 국민적 기대가 컸다.

그걸 어깨에 지고 살아가는 딸이 한편으로 측은하면서 또 대견했다.

자신을 닮지 않은 강심장이었다.

김유나를 품을 때 태몽이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온 선녀였다.

그것도 양손에 스케이트 날 같은 칼을 든 채였다.

어릴 때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했던 유나였기에 예미정은 딸을 믿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어느새 장태산이 가까이 다가왔다.

고개를 꾸벅 숙여 정중한 자세로 인사를 해왔다.

‘가까이 보니 더 잘생겼네.’

거리를 두고 봤을 때와 달리 가까이 다가오니 뚜렷한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유나 인기 덕분에 만나봤던 그 어떤 스타들에 뒤지지 않고 차라리 빛났다.

“반가워요. 유나 엄마예요.”

“유나가 어머니를 닮아 예쁘군요.”

웃으며 말하는 장태산 말이 귀에 착착 감겼다.

목소리 톤도 적당하고 말투도 부드러웠다.

“오빠 그건 아니거든! 난 아빠 닮았다고~.”

“아닌 것 같은데? 어머님 젊은 시절 엄청나게 인기 많으셨죠~?”

“그럼~ 내가 유나 아빠만 안 만났어도 강남에서 자가용 끌고 사모님 소리 들었을 거야.”

싫지 않은 농담에 자연스럽게 박자를 맞춰줬다.

‘유나에게 특별히 관심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장태산이 유나를 보는 눈빛은 천민재가 보였던 눈빛과 전혀 달랐다.

차라리 동생을 보는 것처럼 담백하다는 걸 예미정은 알아봤다.

“와아! 아빠 알면 가출할 말을…….”

유나도 더없이 편하고 즐거워 보였다.

올림픽이 가까워오자 스트레스를 받아 요즘 들어 웃음기가 사라지던 딸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어제 일은 고마웠어요.”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요?”

“잘 처리 됐습니다. 녀석이 세상 무서운 걸 모르는 바보가 아니라면 여기 다시는 찾아오지 못할 겁니다.”

‘그래? 천일 그룹 장손을 이렇게 무시할 정도인 거야?’

예미정도 얼마 전 나름 장태산에 대해서 알아봤다.

유나는 작은 일도 속이거나 거짓말을 안했다.

아이스링크 장에서 넘어졌을 때 처음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물리치료 얘기까지 들었다.

부랴부랴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장태산은 한국대 법학과에 다니는 건실한 청년이었다.

집안이 제법 부유하고 어린 나이임에도 벌써 투자회사를 경영했다.

그런 장태산이 천일 그룹 장손인 천민재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시했다.

“다음에 나타나면 내가 죽빵을 날려버릴 거야!”

김유나가 야무지게 각오를 다졌다.

“유나야! 아가씨가 죽빵이 뭐야…….”

“뭐~ 아빠가 가르쳐줬어. 그런 놈은 선빵과 죽빵이 답이라고.”

“내가 못살아.”

“하하하. 아버님 멋지신데? 한번 뵙고 싶네.”

“아빠도 보고 싶다고 했어. 언제 날 잡자. 우리 엄마 음식 솜씨가 예술이야~. 흐흐흐.”

김유나는 장태산을 진짜 오빠라도 되는 양 말을 놓고 편하게 대했다.

‘편하네……. 아들 같아.’

아들이 없어 아들에 대한 환상이 누구보다 큰 예미정.

싹싹한 장태산이 마치 큰 아들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오빠. 그거 뭐야?”

“스케이트.”

“선물이야? 내 거치고는 큰데?”

“내가 신을 거야.”

“오빠가? 왜?”

“피겨 스케이팅에 대해서 한 수 가르쳐 주려고.”

“뭐? 오빠가 피겨를?”

김유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가 피겨를 탄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운동마다 사용하는 근육이 달랐다.

일반인에 비해 운동신경은 발달하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운동에 전문가가 될 수는 없었다.

“농담이 지나치면 못써요.”

예미정도 믿지 못했다.

허세라고 생각했다.

“말보다는 실력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씨익 웃는 장태산.

“진짜 농담하지 말고. 오빠 나 화낸다.”

유나는 피겨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강했다.

“오빠가 엉망이면……. 아이스링크 장 하나 사줄게.”

“그,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예미정이 말을 더듬었다.

아이스링크 장 건설비가 만만치 않았고 운영비도 많이 나갔다.

대충 지어도 수백억이다.

농담으로 던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미국 친구가 한국 스포츠계에 투자하고 싶어 해서 생각 중입니다.”

“오빠…… 진짜 탈 거야?”

“기다려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피겨 스케이팅 스케이트를 착용하는 장태산,

김유나와 예미정은 뜬금없는 사태에 멍하니 바라만 봤다.

***

촤아아앗.

빙판 위를 가볍게 가르는 장태산.

‘뭐, 뭐야!’

김유나는 장태산의 매끄러운 동작에 눈이 커졌다.

언제 준비했는지 운동복 안에 검은색 경기 복장을 입고 있었다.

올 블랙은 새하얀 얼굴과 대비됐다.

환복한 후 가볍게 얼음 위를 미끌어지는 장태산의 모습은 한 명의 완벽한 피겨 스케이팅 선수였다.

“쟤…… 피겨 하니?”

엄마가 놀라 물었다.

“나도 처음 봐…….”

“폼은 그럴싸하다.”

그럴싸한 게 아니라 죽여줬다.

큰 키에 어울리는 날렵한 몸매, 복장 밖으로 드러나는 세세한 근육과 새하얀 피부는 환상이었다.

저렇게 잘생긴 피겨 스케이팅 남자 선수를 유나는 본 적이 없었다.

요즘 잘나가는 일본 남자 선수들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준비됐다~.”

연습 점프도 뛰지 않고 중앙에 자리 잡은 장태산.

“오빠……. 살살 뛰어.”

얼음 위를 달리는 것과 점프는 달랐다.

유나는 지금이라도 말릴까 싶을 만큼 걱정이 컸다.

준비된 배경 음악은 없었다.

고개를 속이고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세를 잡았다.

김유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

‘세르게이…… 야구딘!’

만년 2등의 서러움을 날리고 2002년 솔트레이크에서 만점에 가까운 연기를 펼쳤던 빙상의 킹.

쿵! 쿵!

김유나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의 우상이던 야구딘이었다.

만년 2인자 소리를 들으며 악착같이 살아남아 화려하게 비상한 전설이 되었던 스케이터.

그가 지금 이곳에 재림한 것 같았다.

‘설마…….’

김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줬다.

하도 많이 봐서 머릿속에 야구딘의 모든 동작들이 들어가 있었다.

특히 2002년 올림픽 경기 때의 모습은 수백 번도 더 봤다.

“야구딘…….”

엄마도 알고 있었다.

쿵!

그리고 시작된 장태산의 연기.

따아아아안……. 따아아아안~♫.

환상처럼 정말 들려오는 것 같은 야구딘의 프리 경기 배경 음악인 ‘The Man in The Mask’.

거친 삭풍 속에서 장태산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이겨내고 철의 가면을 쓴 남자의 거친 폭주.

두 손을 힘차게 쳐내고 빠르게 빙판 위를 달렸다.

드디어 펼쳐지는 첫 번째 점프.

장태산의 손동작은 완벽했다.

강인하면서도 역동적이고 또 부드러웠다.

애절한 한의 연기를 펼치는 김유나와 또 다른 감정의 표현.

촤아아아아앗.

장태산의 몸이 얼음 위를 날아올랐다.

그리고 회전하는 그의 몸.

점프 높이가 달랐다.

지금껏 김유나가 보았던 그 어떤 남자 선수보다 높게 얼음 위를 뛰어올라 날았다.

높은 점프는 언제나 가산점을 받았다.

만약 지금 경기가 펼쳐졌다면 장태산은 높이에서 이미 가산점을 확보하고 시작할 것이다.

촤라라라랏.

허공에서 몸이 돌았다.

하나, 둘, 셋……. 넷!

“헛!”

“아!”

김유나와 예미정 입에서 동시에 비명이 터졌다.

여자 선수들은 불가능한 쿼드러플 플립이 펼쳐졌다.

모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환영이 김유나를 덮쳤다.

몇 번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던 쿼드러플 플립.

끝이 아니었다.

연달아 펼쳐지는 슈퍼 토룹.

그것도 쿼드러플 토룹!

휘청 김유나의 몸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자신의 장기인 트리플 풀립과 트리플 토룹을 훨씬 능가하는 쿼드러플 플립과 토룹.

정말 빙판의 왕이 이곳에 재림했다.

프로그램은 세르게이 야구딘을 따라 하고 있었지만 모든 동작들의 차원이 달랐다.

인간이 점유할 수 없는 공중에서 장태산의 몸은 자유롭게 날고 또 돌았다.

촤아아아아앗.

음악이 없어도 부셔버릴 듯 거칠 게 빙판 위를 달리는 왕의 몸짓.

멍하니 지켜보며 그의 동작들 하나하나를 김유나는 눈에 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점프.

장태산의 몸이 그 어떤 때보다 빠르고 강력하게 빙판 위를 미끌어지듯 달렸다.

‘뭐, 뭐하려는 거야!’

이미 지금 가진 실력으로도 충분히 금메달을 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뭔가 하나 더 높은 목표가 있는 것 같았다.

뛰기 전 자세를 잡는 장태산.

프로그램 상 지금 뛰는 점프는 악셀 점프.

휘이이이잇.

장태산의 몸이 새처럼 다시 빙판 위를 박찼다.

그리고…….

상당히 높은 공중까지 치솟아 돌기 시작하는 그의 몸.

“!!!”

더할 나위 없이 커지는 김유나의 눈동자.

0.72초 이상 체공해야만 가능하다는 피겨의 전설 퀀터플 점프.

그 전설이……. 김유나 눈앞에서 충격적이면서도 완벽하게 실체를 드러냈다.

“쿼, 퀀터플…….”

예미정 입에서 터지는 한마디.

촤아아앗.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점프와 착지를 끝낸 장태산이 김유나에게 다가왔다.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싱긋 웃는 장태산.

김유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

입술을 질끈 깨문 김유나.

빙판의 왕을 향해 빙판의 여왕이 힘차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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