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4화 (403/1,284)

 # 404

회귀의 전설

404장. 전생 공주

문정왕후였다.

놀랍게도 상궁 한 명 거느리지 않은 그녀가 곁에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머리에 올린 두툼한 가채와 화려한 붉은 비단에 새겨진 봉황, 황금비녀가 그녀의 기품을 더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날 어의에 임명했던 그녀.

귀신이 되어서도 왕후의 기세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았다.

중년의 단아함과 수렴청정을 실시했던 여장부의 기질이 그대로 느껴졌다.

얼굴 또한 곱고 아름다웠다.

귀신은 자연 조명빨이 달랐다.

괜히 사람들이 귀신에 홀리는 게 아니었다.

“어제는 고마웠다.”

자신의 관할 구역이라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문정왕후.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네가 어제 징치한 자는 대대로 충신을 배출한 가문을 배신하고 왜국에 밀고한 집안의 핏줄이다.”

놀라웠다.

하관우 회장이 보고했던 내용과 같았다.

친일파의 역사는 이미 귀신도 다 알고 있었다.

“주인을 밀고하고 그 가문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주인이 특별히 어여삐 여겨 집안 대소사를 맡겼건만…… 그런 주인이 배신을 당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 놈은 지금 지옥에서 억겁의 고통을 받고 있다.”

하늘이 살아 있다면 당연한 처벌이다.

살아서는 훔친 남의 것으로 풍요를 누렸을지 몰라도 죽어서는 그 죄값이 가볍지 않을 것이다.

“어제 그놈이 증손자입니다.”

경찰서에서 반성하지 않고 악을 쓰던 천민재가 떠올랐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 나를 향해 저주를 뿌리고 있을 것이다.

“사특한 기운을 몰고 다니는 자였다. 녀석이 저 아이에게 눈독을 들였다. 탐욕에 물든 지 조상들과 다르지 않았다.”

문정왕후 목소리에 은은한 분노가 담겼다.

그래서 씨 도둑질 못한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천민재를 보고 있으면 그 아비와 조상이 훤히 보였다.

싹수부터 노란 집안이었다.

“나쁜 놈입니다.”

“벼락 맞을 놈들이지.”

확실히 벼락이 칠 거다.

하늘을 대변해 쌍 벼락을 때릴 생각이다.

“마마께서 일찍 징치하지 않으시고…….”

태릉은 문정왕후의 영역이었기에 그간 왜 두고 보았는지 궁금했다.

이곳은 특히 선수들의 기를 북돋워주고 포인트를 받는 귀신들이 살고 있었다.

“죽은 자들은 행동에 제약이 많다. 내 마음 같아서는 저 아이를 위해 놈을 제거하고 싶었지만 이승과 저승에 있어 정한 신들의 법칙을 깰 수는 없는 법이다. 특히 산자에게 복과 달리 해코지를 하면…… 그 죄는 무겁고 준엄하다.”

신급인 문정왕후가 두려워 할 정도의 엄한 규칙이 존재했다.

그만큼 하늘의 법칙은 무서웠다.

다만 엄연히 살아 있는 나의 입장은 달랐다.

수틀리면 치고 받아버리면 그만이다.

“저 아이가 마음에 드느냐?”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귀여울 뿐입니다.”

“그래……. 너에게서는 저 아이에게 품은 뜨거운 감정은 읽히지 않는구나.”

유나 잘못 만났다가 칼 맞아 죽을 수 있었다.

2020년까지 그녀는 만인의 연인이자 국민여동생이었다.

나도 그게 좋았다.

유나는 나에게 있어 여동생이나 마찬가지라고 주문을 걸었다.

“제 여동생들과 나이가 같습니다. 그래서 동생으로만 보입니다.”

“고맙구나.”

고마워요? 뭐가요?

“주상께서 널 도제조에 임명한 이유를 알겠다. 생각보다 속이 깊은 아이구나.”

오래전 죽은 왕후 귀신에게 난 애가 맞았다.

그래서 바짝 엎드려 깔아도 무방했다.

“송구하옵니다.”

사극 대사 은근 입맛에 맞았다.

“살아 있으나 죽음의 강을 건너봤고, 신이건만 신이 아니며,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라니……. 상제께서도 어지간히 심심하셨나 보구나.”

왕후 레벨은 그냥 따는 게 아니었다.

나를 보고 그녀가 웃었다.

문정왕후는 귀신이었지만 귀신이 아니었고 신이 아니었지만 또 신이었다.

“그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죽어본 사람이다.

그러니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다 꼬인 하늘의 운명 때문임은 피차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렇구나…… 그렇겠지. 하늘의 뜻이 있어 내가 저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었지.”

김유나를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문정왕후.

돌아가는 분위기가 요상했다.

김유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투다.

“전부터 알고 계셨사옵니까?”

“……내 아이였다.”

아이? 유나가?

“네? 그, 그게 무슨…….”

갑작스런 문정왕후의 말에 눈이 번쩍 떠지고 정신이 확 들었다.

김유나와 성씨부터 달랐다.

문정왕후는 윤 씨였고 긴 세월의 강이 흘렀다.

내 아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 놀기를 좋아하였다. 저 아이 때문에 사당패를 불러 왕실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성상께서도 저 아이를 진심으로 어여삐 여겼다. 일찍 떠나지만 않았어도…….”

뭔가 이상하게 스토리가 흘러갔다.

그럼 지금 저기 보이는 김유나가 과거 문정왕후와 중종의 아이란 말인가?

역사를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고등학교 시절 심심해서 심화학습으로 조선왕조 왕실 편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기록된 중종의 자식들 명단.

딸 바보로 알려진 중종은 11명의 딸을 두었다고 알려졌다.

그중에 일찍 요절한 공주는…….

“인순 공주마마입니까?”

“호오, 인순을 알더냐?”

문정왕후가 감탄을 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맞았다 인순 공주.

4살에 요절한 중종과 문정왕후의 딸.

명종의 친동생이기도 했다.

이렇다 할 사가의 기록도 없고 다만 일찍 요절하였다 알려진 그녀가 김유나…….

빙판 위에서 얼음을 타는 김유나가 다시 보였다.

왜 사람들이 그녀를 빙판 위의 여왕이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전생이 공주라 그 귀티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똑같이 태어난 사주에서도 전생으로 명운이 갈렸다.

부자와 사주가 같아도 자신과 조상이 전생에서 깔아 놓은 선업과 악업의 차이로 부의 크기가 달라졌다.

같은 부를 쌓아도 떳떳하게 버는 자가 있는 반면 사기로 재산을 이루기도 하는 법이다.

그래서 깨달은 부모들은 절대 나쁜 짓을 해 부를 이루지 않았다.

어느 날 내 자식과 후손에게 악업의 대가가 부메랑이 돼서 나타날 수 있다는 걸 명심한 것이다.

김유나를 보고 또 봐도 다시 보였다.

아직까지 문정왕후처럼 전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레벨 차이가 많이 난다는 증거였다.

“공주 마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언니들과 달리 유난히 맑고 착한 아이였다. 눈망울은 새끼 사슴 같았고 산초알 같은 눈동자가 사람을 빨아들였다. 성상과 나는 인순의 춤을 보면서 시름을 잊었다. 왕실에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문정왕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문정왕후는 자식 사랑이 대단했다.

죽어서까지 일찍 요절한 딸에 관한 모든 걸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보이느냐? 저 손매가?”

“네…… 마마.”

“하늘 선녀 같지 않더냐? 저 아이를 잉태하며 꿈을 꿨다. 상제의 생신에 찾아가 춤을 추던 곱고 고운 하늘 선녀님 한 분이 오색구름을 타고 나에게 왔다. 그 꿈을 꾸면서 정말 환희에 찼었다.”

이제 전생 김유나의 태몽까지 알게 됐다.

빼박 김유나의 전생이 분명했다.

동생이 아니라 마마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어인 일로 일찍…….”

“그해 겨울 참으로 눈이 많이 내렸다. 내 살아생전 처음 맞는 눈이었다. 궁의 전각 몇 곳이 무너져 내릴 정도였고 민가에서도 눈 때문에 여러 사달이 났었다.”

아련한 문정왕후의 추억 소환.

오랜만에 듣는 귀신의 이야기에 절로 귀가 기울여졌다.

“며칠 내리던 폭설이 그치고 해가 들자 눈이 녹았다. 겨울이라 내린 눈들이 곳곳에서 얼어붙었다. 그 때 인순은 바깥에서 노는 걸 좋아했다. 어린 나이지만 어찌나 활동적이던지 지 오라비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강건했었다.”

입가에 미소 짓는 문정왕후는 그 시절로 여행을 간 듯한 표정이었다.

김유나는 전생에도 얼음을 좋아한 것 같다.

“인순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얼음을 탔다. 중궁전 앞마당에서 꺄르르 웃으며 놀던 인순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어린아이 웃는 소리를 누가 싫어하겠나.

그것도 자기 자식의 웃음소리는 만병통치약일 것이다.

“거기서 탈이 났다. 심한 고뿔에 걸리고…… 보름을 앓아누웠다.”

천천히 눈가와 목소리가 촉촉해지는 문정 왕후.

자식이 여럿 있었지만 어릴 적 하늘로 떠난 인순 공주를 이후에도 내내 그리워한 것 같았다.

“그날 아침…… 가뿐한 듯 눈을 떴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구나. 어마마마라 부르며 다 나은 것 같다고…… 아직 얼음이 녹지 않았냐 묻던 인순…… 공주는…… 활짝 웃으며 내 품에서 잠들 듯…… 눈을 감더니…… 그렇게…… 떠났다.”

문정왕후의 시선이 빙판 위를 한 마리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김유나에게 향했다.

나의 가슴까지 아릿하게 아파왔다.

저래서 김유나가 저렇게 얼음 위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것이리라.

“나와 같이 얼음을 타자던 인순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죽어 이곳에 있건만 인순은 나타나지 않았다. 야속한 신들이 하늘로 불러올려 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본래 선녀였으니…… 고통이 숨 쉬는 이승이 싫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잊혀져갈 때…… 저 아이가 나타났다. 내 딸, 내 아이 인순 공주가 이번 생에 인간으로 환생하였다…….”

환생했음에도 어머니는 자식을 잊지 못했다.

문정왕후가 왜 김유나에게 그렇게 관심을 보였는지 알았다.

정을 다하지 못한 부모와 자식 관계였던 것이다.

가슴에 묻어버린 딸의 환생에 문정왕후는 정말 기뻤을 것이다.

지금도 낱낱이 보이는 어미의 눈길.

김유나가 실패하거나 넘어질 때마다 두 주먹을 움켜쥐고 바라봤다.

“고우신 분입니다.”

“사랑스런 아이다. 전생에 쌓은 악업이 없어 누구에게나 사랑 받을 수밖에 없다. 인연에 걸리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화려한 의상이 아니지만 땀을 흘리며 연습하는 김유나는 자체발광에 휩싸였다.

하늘나라 선녀가 지상에 다시 내려온 이유는…….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 하늘의 마음을 깨달아 보너스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넌 특이한 재능을 가졌구나.”

옆에 있던 문정왕후가 놀라며 나를 봤다.

포인트를 받는 걸 알아챈 것 같다.

신들도 부러워하는 난 포인트 사업가가 분명했다.

“제가 보기보다 복이 많습니다.”

“그렇구나……. 넌 복이 많구나.”

무엇을 깨달았는지 눈을 반짝이는 문정왕후.

어~ 왕후마마 저의 재능을 탐내시면 안 됩니다.

‘혹시’라도 사윗감으로 찍지 마십시오.

전생은 전생이고 이번 생은 이번 생입니다.

유나는 착한 녀석에게(?) 시집가야 합니다.

오빠 마음이 다 그럴 것이다.

부디 나와 내 친구 같은 놈들이 아닌 건실한 녀석을 만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잘 보살펴다오.”

자식을 부탁하는 어미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염려 놓으시옵소서.”

“그래……. 내가 너를 믿겠다.”

- 신이 되기를 거부한 귀신이 카르마 포인트를 지급 했습니다.

아니……. 뭘 이렇게 선물까지.

포인트 벌어 신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거부하고 이곳에 남은 문정왕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전생의 자식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귀신.

그녀의 아이를 바라봤다.

전생 공주 김유나.

“!!!”

착지하며 나를 발견하고 눈이 마주치며 놀라워했다.

“오빠아아아아!”

오빠라 부르며 손을 반갑게 흔드는 김유나.

“환상이었어~.”

나도 손을 흔들었다.

파바밧.

그때 뺨에 느껴지는 싸한 시선 하나.

김유나의 어머니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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