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3화 (402/1,284)

 # 403

회귀의 전설

403장. 끝장 (2)

“집안의 장자는 말이야……. 건물의 기둥이야. 그 녀석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지. 그래서…… 우리 가문에서는 장자가 모든 걸 소유하는 거야. 나처럼…….”

천일 그룹 본사가 있는 강남 사옥.

직급은 부회장이지만 그룹 모든 대소사를 책임지는 천해운이 비서실장과 법무팀장을 불러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천해운은 소파에 앉아 시립한 두 사람을 올려다봤다.

손에 들린 담배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부옇게 공간에 퍼졌다.

“그런데 어제 사고가 났네? 아직 어려서 철모르지만 열심히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내 큰아들이 이름도 모르는 애송이와 엮여 경찰서에 갔다니……. 신문에 났다면 나뿐만 아니라 아버지, 나아가 우리 가문이 어떤 꼴이 되었겠어?”

천해운은 누가 봐도 넉넉하게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눈빛은 독사처럼 차가웠다.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앞에 선 두 사람은 90도로 허리를 동시에 접으며 죄송하다고 대답했다.

천일 그룹 부회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온화했다.

하지만 갑자기 성격이 돌변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성격 지랄 맞은 오정 회장보다 더 가관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한 달이 멀다하고 운전기사가 바뀌었다.

운행 중 다른 차가 앞을 막거나 길이 막히는 걸 견디지 못했다.

과속과 신호 무시는 운전기사가 늘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사고가 나거나 걸리면 기사 탓으로 돌렸다.

“아들 녀석이 못나서 그런데 두 사람이 뭐가 죄송해~ 내가 속 좁은 경영자도 아니고~.”

웃는 얼굴로 말을 잇고 있어 비서실장과 법무팀장 둘 다 꽤 긴장했다.

화를 낼 때보다 저렇게 실실 웃고 난 뒤 더 크게 폭발했다.

사무실 집기가 수시로 바뀌는 이유였다.

“그런데 쪽팔리잖아. 곧 소문이 날 수밖에 없어. 천일 그룹 장자가 얻어터지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면 나중에 경영자로서 나쁜 꼬리표를 다는 거거든. 대한민국 그룹들 중에 자식새끼 맞고 다니는 집안은 없지. 그렇지 않아?”

“맞습니다!”

비서실장 진광현이 빠르게 대답했다.

“진 실장. 수고가 많은 건 아는데 그래서 월급 더 받잖아? 아픈 딸내미 병원비도 회사에서 어느 정도 지원하고 있고 말이야.”

진광현의 아픈 곳을 툭 건드리는 천해운 부회장.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감사해야지. 은혜도 모르고 주인을 물고 그러면 못써……. 그건 똥개 새끼들이나 하는 짓이지. 법무팀장도 그렇게 생각하지?”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어제 일 처리를 하다가 구두로 사표를 내고 퇴사한 정대욱 변호사로 인해 법무팀장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심정이었다.

소송은 꿈도 꾸지 못했다.

정대욱 변호사가 들고 있는 자료 몇 개만 풀면 회사 이미지는 바로 곤두박질치고 박살이 난다.

그런 이유로 다른 곳보다 더 많은 보수를 지급해 왔던 것이다.

“난 말이야. 세상 살아가는 데 각자 본분이 있다고 생각해. 우리 집안 같은 건실한 사업자는 돈을 벌어 국가에 이바지하고 직원들 먹여 살리고~ 집지키는 개들은 충성을 다 보여야 쫓겨나지 않는 건데…… 요즘 개들이 영 시원찮네? 다들 배가 불렀나?”

대놓고 앞에 선 두 사람을 향해 개 운운하며 말을 잇는 천해운 부회장.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야지. 그리고……. 방법도 찾아내. 우리 집안 장손의 실추된 자신감 반드시 돌려놔야 할 거야. 난 집지키는 개들한테는 자비심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다는 거 자네들이 더 잘 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최선을 다해. 아마 이게 마지막 기회가 될 테니……. 후후후.”

***

“천일 그룹은 1940년 작고한 오암 천재국이 창업한 회사입니다. 창립 당시에는 건설 부자재를 취급했고 일제 강제 점령기 말기에도 사업이 승승장구했습니다. 본래 노비 신분이었지만 어느 날 엄청난 돈을 들고 나타났다고 합니다.”

회사로 돌아왔다.

모두 연말 휴가를 떠난 사무실에서 하관우 회장과 독대했다.

대웅에서 근무한 분답게 정보를 요청하자 바로 천일 그룹에 대한 자료를 가져왔다.

“뭔가 감춰진 비밀이 있겠군요?”

“……여러 설이 있지만 당시 모시던 독립 운동 양반 가문을 밀고하고 재산을 빼돌렸다는 소문이 가장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1940년에 창업했다면 친일파일 가능성이 높군요.”

그 당시 일본에 협조하지 않고는 사업이란 것을 하기 힘들었다.

자의반타의반 친일파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비추어 볼 때 가능성이 높았다.

“친일파인명사전에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일본에 대단히 협조적이었다고 밝혀졌습니다. 황국 식민 비행기 모금 운동에 거금을 투척했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역시 피가 달랐다.

천민재 날뛰는 걸 보고 평범한 집안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노비 신분을 무시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세상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피는 대대손손 엮이고 엮이며 섞이고 또 섞였다.

그러면서 희석되기도 하고 진해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인댁을 밀고하고 재산을 빼돌려 부를 축적했다는 것 자체는 문제였다.

재산 축적의 기본이 배신이었고 그게 그 집안의 반석의 재료였다.

그 돈으로 부를 쌓아올렸기 때문에 노비 신분을 벗어난 유전자가 다른 사람들을 저렇게 무시하는 것이다.

경찰서에서 봤던 개차반 성격은 놀라웠다.

안아의 오동성도 형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유전인자 자체에 예의라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미래 천일 그룹은 인터넷에서 몇 차례 대단하게 회자된다.

조근영 대통령과 주순자 사건에서 여러 번 언급된다.

대놓고 주순자에게 뇌물을 바쳐 기업의 이권을 얻었다.

그보다 규모가 큰 대기업 이슈에 묻혀 사실상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는 보호를 받는 기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주순자에게 뇌물을 주고도 떳떳하게 국가 관급 공사를 따냈다.

일송회 멤버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차 없던 여론의 포화 속에서 생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천일 그룹의 주력은 천일 건설을 중심으로 천일 상사, 천일 레저, 천일 에너지, 천일 미술관, 천일 석유화학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진출한 천일 면세점이 계열사입니다.”

“대학교도 있지 않습니까?”

“천일 대학교와 천일 병원은 방계 계열사입니다.”

“그룹 맞네요.”

“재계 순위에서는 밀리지만 역사가 오래되고 재정이 제법 탄탄합니다. 특히 천일 건설은 국가 도급 순위에서 항상 손가락 안에 듭니다. 다른 대기업 사들보다 더 특혜를 받습니다.”

“천일 건설의 하자도 문제이지 않습니까?”

“중견 건설사들 중에서 하자 문제가 두드러집니다. 본사에서 하청에 요구하는 리베이트가 다른 어떤 사업장보다 많습니다. 당연히 아파트는 부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 안락한 세상’이 브랜드인 천일 건설.

2020년까지 그 아파트는 악명이 높았다.

하자가 얼마나 많던지 수시로 TV에 나왔다.

하청업체 갑질로도 몇 번 방송을 탔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뜨겁던 뉴스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치권 로비자금이 대단하겠군요.”

“대관비용이 5대 그룹 정도 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실력 없는 기업이 돈버는 법은 간단했다.

하청업체 후려쳐서 받아낸 자금으로 정치권에 넉넉히 뿌리면 됐다.

적당히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탈이 안 났다.

언론이야 시끄러울 때 얼마 찔러주면 알아서 기었다.

“쓸 만한 계열사가 뭐가 있겠습니까? TS 그룹과 겹쳐지는 사업은 뭡니까?”

“건설을 빼고는 겹치는 부분이 드뭅니다. 걸음마 단계인 레저 부분도 그렇고……. 교육 사업이야 대대로 내려왔던 거라…….”

“하 회장님. 준비하십시오.”

“네?”

“천일…… 먹읍시다.”

“네에? 처, 천일을요?”

하관우 회장이 진심으로 놀랐다.

“그룹 자금 사정이 빡빡합니다. 대웅 건설 인수 문제로 유동 자금이 부족한데 그룹 인수는…….”

“숟가락만 얹으면 됩니다. 주력이 천일 건설이죠? 그것만 무너트리면 줄줄이 딸려오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천일 건설이 주력 계열사입니다. 순환출자의 핵심입니다.”

대한민국 그룹이나 기업들은 이게 문제다.

언제까지 정치권이 자신들 편이라 생각하고 너무 쉽게 계열사를 지배했다.

“주식 비율은 어떻게 됩니까?”

“천준용 명예 회장이 15%, 부회장 천해운이 14%, 그리고 형제와 자매들이 대략 5% 정도입니다. 시장에 풀려 있는 주식 총수는 49%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랏데 그룹 성경호 명예회장이 5% 정도, 그리고 계열사들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성경호 회장요?”

이건 나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천일 그룹 주식은 시장에서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았다.

등락폭이 작았다.

가족들 보유 주식수가 많았다.

코스피 등록주 중에 창업주와 일가가 40%가 넘는 경우는 드물었다.

“성경호 회장이 흑기사입니까?”

“천준용 회장과 형, 동생 하는 사이입니다. 천일 그룹 오토바이 사업을 성경호 회장이 일본에서 밀어줬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흐음…….”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천일과는 사이즈가 다른 랏데.

같은 친일 기업끼리 사이가 안 좋은 게 이상한 일이었다.

“인수팀 조용히 준비하십시오. 그룹 편입은 안 되더라도 인사는 파견할 겁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대웅 건설은 어떻습니까?”

“아직 버티고 있습니다.”

“더 버티라고 하십시오~.”

덩치도 작은 금구 그룹은 곧 입이 찢어진다.

비행기나 잘 날릴 것이지 한국통운과 대웅을 삼키고 탈이 났다.

지금쯤이면 속에서 불이 날 것이다.

2020년까지 여러 사고를 쳤던 금구 그룹이었다.

“그런데 회장님…….”

둘이 있을 때는 이렇게 회장이라 깍듯하게 칭해주는 하관우 회장.

“궁금한 게 있습니까?”

“이러다 대한민국 기업들 전부 삼키실 건 아니시죠?”

“글쎄요…….”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기업들이 너무 싸가지가 없다.

다는 몰라도 어느 정도는…… 밑으로 깔아야 할 것 같았다.

특히 이번에 걸린 천일 그룹.

반드시 짓밟아 버릴 참이었다.

***

- 알겠습니다. 보스.

“예전 작업처럼 미국발 뉴스로 흔들고 공매도로 후려치십시오.”

-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빠르게 진행해 주십시오. 정신 못 차리게.”

- 보스 뜻대로 되실 겁니다.

“조만간 캐나다에 갈 생각입니다.”

- 캐나다요?

“동계 올림픽 스키 국가대표가 됐습니다.”

- 보스, 대단하십시다!

“별거 아닙니다.”

- 국가의 대표가 된다는 건 언제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미국 아재 나름대로 국뽕에 취해서 사는 분이다.

나를 위하지만 밑바탕에는 미국에 대한 자국심이 장난 아니다.

“제 동료들이 곧 캐나다로 전지훈련을 갑니다. 알아서 편의를 봐주십시오.”

- 최고의 스포츠 에이전트를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언제나 보스를 사랑하고 존경할 뿐입니다.

“…….”

순간 닭살이 돋았다 사라졌다.

“비행기 주문은 마쳤나요?”

- 곧 한국과 러시아로 보낼 생각입니다.

소형과 중형 여객기를 골고루 구매했다.

금융대란에 취소가 된 비행기가 사방에 널렸다.

“다른 필요한 목록은 메일로 보내놓겠습니다.”

- 제 모든 게 보스 것입니다.

“하하. 마음만 받겠습니다~. 쉬십시오.”

통화는 짧게 끝냈다.

“아우! 로버트……. 점점 더 이상해.”

적응하기 힘든 미국 아재와 통화를 끝내고 나니 눈앞에 건물이 보였다.

천민재 때문에 제대로 마무리를 못했다.

다행히 그녀가 오늘까지 이곳에서 연습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선물을 준비했다.

손에 들린 스케이트 화.

김유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생각이다.

“누굽니까?”

경비가 앞을 막았다.

어제 사건으로 선수촌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예약되어 있을 겁니다.”

“장태산……. 아! 맞아요. 들어가 봐요.”

50대 초반 아저씨가 문을 열어줬다.

그렇게 들어간 아이스링크 장.

“유나야! 점프할 때 부드러움을 유지한 채 힘을 더 줘야지! 무슨 생각하는 거야!”

중년 여인이 유나와 함께하고 있었다.

지금 시각은 밤 10시.

“엄마~ 미안.”

유나가 땀을 훔치며 엄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좀 쉬었다 할래?”

“아니야~ 한 바퀴 더 돌고.”

연습벌레로 유명했던 김유나.

그녀는 씩씩하게 아이스링크 장을 돌았다.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빙판 위의 여왕답게 얼음 위를 지배했다.

흐뭇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누가 되었든 이 순간만큼은 내가 부러울 것이다.

지난 생에는 TV나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감탄사만 날렸다.

그렇게 멀었던 그녀가 지금 내 눈앞의 얼음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아련한 감정.

그대로 빠져 들어갔다.

“어여쁘더냐?”

순간 갑자기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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