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2
회귀의 전설
402장. 끝장 (1)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천일그룹 비서실장 진광형은 당황하는 경찰서장을 보고 머리를 굴렸다.
뒤늦게 나타난 50대 초반의 남자.
한눈에 평범한 신분이 아니었다.
“삼우 로펌 이사 조윤태요.”
진광형을 향해 씩 웃음을 날리며 명함을 건넸다.
‘삼우 로펌?’
그룹들과 로펌은 대한민국 내에서 공생관계에 있었다.
라이벌 그룹이나 여러 소비자 분쟁 사건에서 대형 로펌의 손을 잡아야 했다.
전직 검사나 판사, 고위 공무원들의 합법적 로비단체가 대형 로펌인 셈이었다.
개중에서 삼우는 요즘 떠오르는 다크호스였다.
리앤장에 밀려 바둥거리던 과거와 사뭇 달랐다.
파격적으로 인사들을 섭외하고 사세를 확장했다.
TS를 비롯해 오정 같은 대기업도 삼우 로펌에 사건을 맡겼다.
천일 그룹도 소문을 듣고 접촉했지만 매번 무시당했다.
불법적 로비를 언급하자마자 대놓고 까였다.
그런데 그 위세 당당한 로펌 인사가 이 자리에 나타났다.
그것도 이사씩이나 되는 신분이 말이다.
‘리앤장 이사하고도 친분이 있다고 했지? 도대체 저 녀석 정체가 뭐야?’
진광현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장태산을 봤다.
이 같은 사태를 예견이라도 했던 것처럼 전혀 동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공간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조…… 부장님.”
그룹 소속 변호사가 당황했다.
부부장 출신이지만 과거 검사 시절 날렸던 변호사가 당황하며 고개 숙이기 바빴다.
“어~ 정대욱이. 너 천일 밑으로 들어갔냐?”
“……네.”
“그리고 인마. 나 부장이 아니라 차장검사로 퇴직했어. 부르려면 똑바로 불러.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리바리하기는.”
정대욱 변호사는 검사 초임시절 중앙지검에서 모셨던 부장 검사 앞에서 꼼짝을 못했다.
지금은 민간인 신분이지만 검찰 조직의 기수 문화는 뼛속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조윤태 변호사는 요즘 핫하게 잘나갔다.
대한민국 법조계에서 삼우로펌 눈치 안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로펌 이사 신분이었다.
사실상 거의 전권을 휘두르는 장본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도대체 저 녀석은 뭐야?’
정대욱은 정말 자다가 끌려 나왔다.
지방대 출신이라 연줄이 없어 부부장검사로 퇴직한 후 몇 건의 전관예우를 받은 뒤 천일 그룹에 들어갔다.
초임 검사 시절부터 기업들을 후려치고 다니다 조직에서 토사구팽을 당했다.
한국대 출신이라면 넘어갔을 사건이었지만 정대욱은 퇴사 압력을 받았다.
후배들의 무시와 상부의 오지 발령으로 급기야 사표를 썼다.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상황이 코너에 밀리자 정의에서 악덕으로 변심했다.
세상은 돈과 권력이 최고라는 걸 검사직에서 밀려나고서야 깨달았다.
마침 천일 그룹에서 일 자리 제안이 왔다.
천일 그룹은 다른 그룹들과 비슷하게 불법적인 일을 많이 자행했다.
노조원 협박을 비롯해 그룹 일가의 각종 갑질에 대한 처리까지 도맡았다.
검사 시절의 꿈은 벌써 잊어버렸다.
기계적인 법률 장사치가 됐다.
자존심과 바꾼 돈.
강남에 아파트도 구입하고 물질적으로 아쉬울 게 없었다.
하지만 조윤태 부장검사와 신나게 검사질 할 때가 가끔 그리울 때가 있었다.
그랬기에 정대욱은 조윤태 앞에서 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변할 수밖에 없었다.
“거, 검사님 이곳에는 무슨 일로.”
경찰 서장 구용호도 자세를 낮췄다.
“고 경위, 아니 이제는 지체 높으신 서장님인가? 나 같은 변호사는 쫄로 보는~.”
“아이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검사님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구용호 서장도 조윤태와 과거가 얽혀 있었다.
형사 시절 조윤태와 함께 살인사건과 연류된 장기거래 밀매업자들을 잡은 공로로 특진이 됐다.
그 이후로 형사통으로 알려져 서장까지 오르게 됐다.
순경으로 시작해 이 정도 자리까지 올랐다면 인생 성공한 축에 들었다.
그런 구용호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검사가 조윤태였다.
“보면 몰라? 변호사가 야간에 경찰서에 찾아 올 일이 뭐가 있어. 돈 벌러 왔지.”
“아~ 그러시군요. 검사님까지 나설 필요가 없는 사건인데…….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저 겁도 없는 녀석이 어려 사람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용호는 장태산을 괘씸하게 노려봤다.
당연히 천일 그룹이 조윤태 검사를 불렀다고 생각했다.
“그 쪽이 아니야.”
“네?”
“구용호 감 많이 떨어졌네. 자네 지금 누구를 노려보고 있나? 짤리고 싶어?”
조윤태 변호사가 눈을 부라렸다.
“그, 그럼…….”
“저기 세상 법 없이 살아갈 청렴결백한 이 시대의 의인이신 장태산 대표님 법률 대리인 조윤태네.”
조윤태가 장황하게 장태산에 대한 칭찬을 늘어놨다.
알아서 닥치라는 소리였다.
“…….”
구용호 서장과 정대욱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게 생겼다는 걸 본능이 알아챘다.
그룹의 핏줄과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대단한 배경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장태산이라는 청년.
조윤태 변호사가 이렇게까지 깍듯하게 대할 정도라면 말 다한 상황이었다.
“이거 뭐야? 지금 당신들 저 새끼 하나도 처리 못해? 와아아……. X발 무능 쩌네.”
비서실장까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천민재가 훼까닥 돌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갑질이 비집고 세어 나왔다.
천민재 역시 바보가 아니었다.
그룹 변호사보다 장태산이 부른 변호사가 끗발이 더 세다는 걸 알았다.
“도련님……. 조금만 기다리시면…….”
쫘아악!
비서실장 진광형이 설명하려는 순간 천민재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다른 그룹과 달리 비서실장이라고 해서 특별한 힘이 없는 천일 그룹이었다.
천일 그룹은 타인을 못 믿는 버릇이 있어 일가친척들까지 비밀스럽게 일을 처리했다.
비서실장은 말 그대로 비서들의 우두머리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룹의 위신 문제도 있기에 함부로 손을 대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민재는 사람들 앞에서 비서실장의 뺨을 갈겼다.
그룹에서 정식 조직에 속하지도 않은 재벌가의 후손이 벌이는 갑질.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움켜쥐는 진광현.
살다가 이런 꼴을 수백 번 당했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비장이 터진 듯한 쌉싸래한 고통이 심장에서 느껴졌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회사 일에 매달리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아 아내는 가출했고 하나뿐인 딸은 백혈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홧김에 여기서 일을 그만 두면 하나뿐인 딸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백혈병에 대해 의료보험이 지급되고 있긴 했지만 희귀병이라 적용 안 되는 것이 꽤 많았다.
딸에 대한 미안함에 진광현은 비서실장직에 목숨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가슴 아픈 만큼 더욱 깊게 고개 숙이는 진광현.
“이번 사건 아버지께……. 반드시 보고할 거야! 당신 각오해!”
천민재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반말은 기본에 싸가지는 찬물에 말아 먹었는지 예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야간 당직을 서고 있던 형사들 역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모두 분노했다.
재벌과 다른 그들 모두도 서민들이었다.
구용호 서장과 정대욱 변호사도 입술을 깨물었다.
위도 아래도 없는 안하무인 종자라는 걸 확인한 뒤에 찾아오는 무력감이 자신들의 인생까지 쓰레기로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서 입을 열지 못했다.
재벌의 힘은 언제나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 넘는 상황을 연출해 냈다.
“새끼…… 하늘 무서운 줄 모르네.”
장태산이 침묵을 깼다.
“뭐, 뭐라고!”
“아가리 닥쳐 새꺄. 지금 몇 시야? 너 때문에 고생하시는 여러 분들 안 보이지? 공권력이 니 장난감이냐?”
“다 너 때문 아냐 X새끼야!”
“그래 좋다. 쌍방 뜨자. 그런데 어떡 하냐? 난 벌금이지만 넌 영창 가는데.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
“!!!”
장태산 말에 천민재 얼굴이 굳었다.
그제야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현재 신분이 떠올랐다.
“돌대가리 새끼. 너 임마 신분이 군바리야. 조 변호사님 기자분 불러왔죠?”
“밖에서 대기 중이야.”
“그럼 불러오세요. 태릉 선수촌 한밤중 난투극. 군복무 중인 XX그룹 장손 폭행죄로 경찰서 송치. 아! 그리고 특종 있는데 그건 따로 보내준다고 하십시오.”
“너, 너!”
천민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여기서 사고 치면 바로 군 헌병대에 끌려가야 했다.
여론이 거세지면 선수생활도 끝날 수 있었다.
‘젠장!’
천민재는 짜증이 치솟았다.
장태산을 만난 이후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다.
“일단……. 합의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대욱 변호사가 나섰다.
“닥쳐! X발!”
망나니 모드로 전환된 천민재가 경찰서에서 되는 대로 욕을 퍼부었다.
“정대욱!”
조윤태가 강하게 정대욱 이름을 불렀다.
“넵!!!”
“전직 검사 쫀심도 없냐. 야! 때려 쳐. 너 우리 로펌으로 와라. 저런 X새끼 밑에서 밥 빌어먹지 마. 우리가 거지냐? 불알 두 쪽 차고 태어난 너를 보며 기쁘게 미역국 드신 어머니 앞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때려 쳐!”
조윤태 변호사가 천민재를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다, 당신!”
“당신? 이 어린놈의 새끼가. 약을 처먹었나! 니 애비도 나한테 당신이라고 못해 인마! 어디서 삿대질이야! 안 꺾을래? 확! 분질러 버린다!”
전직 차장검사의 포스가 작렬했다.
손가락으로 조윤태를 가리키던 천민재가 움찔 놀라며 손을 거뒀다.
“에이 X발! 나 때려 친다. 진 실장 이 시간부로 나 회사 사표 냈다. 저 새끼 집안 뒤처리하다가 화병에 내가 먼저 뒤지겠다. 조 변호사님! 저 갈 때 챙겨 가십시오!”
“다, 당신도 미쳤어? 저 새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정대욱이 노선을 정했다.
그 모습에 천민재가 길길이 날뛰었다.
와장창창창창.
옆에 있던 대형 화분을 발로 차 넘어뜨려 깨뜨려 버렸다.
와르르르르르르.
손에 잡히는 집기를 있는 대로 쓸어버렸다.
경찰서장 구용호 눈이 뒤집어졌다.
승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좋게 마무리 하려고 했다.
재벌 건드려서 얻을 게 없다는 것을 그 동안 몸소 경험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이제는 경찰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보고 이는 직원들 눈도 많았다.
그냥 넘어갔다가는 서장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지고 경찰의 권위가 바로 설 것 같지 않았다.
“……이거 안 되겠구만. 조 경사!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유치장에 처넣어!”
단호하게 떨어지는 명령.
“충성!”
사건을 담당하고 있던 조 경사를 비롯해 형사들이 천민재에게 다가섰다.
“건들지 마!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천일 그룹 장손 천민재야! 건들기만 하면 니들 다 옷 벗게 만들 거야! 오지 말라고!!!”
형사들이 다가오자 더 광분하는 천민재.
“도련님……. 오늘은…….”
진광현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진 실장! 당신 이거 직무유기야! 우리 아빠가 가만둘 거 같아! 야! 서장! 당신…….”
쫘아아아앗.
날뛰는 천민재 뺨에 작렬하는 손 하나.
“겨울인데 뭔 놈의 앵앵거리는 파리가 이렇게 많습니까?”
장태산이 손을 쓱쓱 비비며 천민재를 봤다.
“크으으으…….”
순간적인 고통에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천민재의 얼굴.
눈빛이 악귀처럼 변해 장태산을 노려봤다.
“닥치고 있어 새꺄. 조금 전 문자 왔어. 여차하면 본인이 오늘 있었던 사건을 언론들과 직접 인터뷰한다고 말이야. 너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지?”
남들이 아직 모르는 천민재만 알아들을 협박을 날리는 장태산.
“…….”
난동부리던 천민재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장태산이 희미하게 웃었다.
“난 합의하겠습니다. 내일 아침 정신 차리면 내보내십시오.”
“오케이. 이쪽은 합의가 된 것 같고~ 거기는 어때? 닥치고 합의하면 유치장에서 빼주고~.”
조윤태 변호사가 천민재와 진광현 실장을 봤다.
“……합의해. X발!”
이를 악물고 눈에 핏발이 선 천민재가 끝까지 욕을 붙이며 수긍했다.
“저희 쪽도 합의하겠습니다.”
진광현이 조윤태 변호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내자. 새벽에 이 무슨 쌩쑈니. 쯧쯧.”
조윤태 변호사가 혀를 찼다.
“이것도 인연인데 다 같이 나가서 뜨거운 국밥 한 그릇씩 말죠.”
장태산이 분위기를 바꿨다.
“그럴까?”
조윤태 변호사 얼굴이 활짝 폈다.
“부장, 아니 차장님. 저 이제 백수입니다. 언제든 옆에 있겠습니다!”
정대욱 변호사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딸랑딸랑을 외쳤다.
“조 검사님. 제가 잘 아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구용호 서장도 자연스럽게 합류하며 나섰다.
“저희는 근무 때문에…….”
“배달시켜 드리겠습니다. 오늘 민주시민이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중랑 경찰서 야근 경찰관님들께 야식 풀코스로 쏩니다~.”
방금 전까지 피의자 신분이었던 장태산이 외쳤다.
“……너 두고 봐!”
장태산 중심으로 바뀐 분위기에 분노한 천민재가 이를 갈며 장태산을 노려봤다.
“많이 봐둬라……. 내일부터 너와 네 집안 겁나 바쁠 것 같으니까…….”
더없이 차갑고 사악하게 웃음을 흘리는 장태산.
“쯧쯧. 멍청한 놈 때문에 그룹 하나 날아가겠네~.”
곁에서 혀를 차는 조윤태 변호사.
의미를 모르는 주변 사람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장태산과 조윤태를 번갈아 봤다.
IMF 이번 금융위기 쓰나미에서도 살아남은 천일 그룹.
누가 봐도 하루아침에 날아갈 그런 허접한 구멍가게가 아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오랜만에 사람 인내심 끝장 보게 만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