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1
회귀의 전설
401장. 널 잊고 있었다. (2)
천민재는 귀를 파고드는 고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 날을 위해 그간 아이스링크 장 수위를 돈으로 관리해 왔다.
체육계에서 돈으로 안 되는 건 거의 없었다.
남들은 군 생활로 뺑이 칠 때 천민재는 국가대표라는 이름 뒤에 숨어 널널하게 시간을 보냈다.
아이스하키는 돈이 많이 필요했다.
아이스링크장 대여비나 기타 부대비용이 장난 아니게 들었다.
축구나 야구 기타 종목처럼 월등한 실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인맥으로 뽑혔다.
선수들 실력이 비등비등했다.
어릴 적부터 알아왔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천민재는 그 중에서 단연 특별했다.
다른 선수들보다 경제적으로 월등히 부유했다.
해외에 나가고 싶으면 그룹 후원으로 원하는 때에 전지훈련을 갔다.
아시아권에서도 성적은 바닥이었다.
카자흐스탄에게는 전패였고 일본에는 수시로 패했다.
노력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천민재 같은 선수들이 전반적으로 물을 흐렸다.
실력도 안 되는 녀석들이 선발로 뛰었다.
어차피 국가대표 구성에 형식적으로라도 필요했기에 뭐라고 하는 자가 없었다.
특히 천민재 뒤에 천일그룹이 있었다.
정권이 바뀐 뒤 천일그룹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선견지명이 있어 최병박 정권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넘긴 덕이었다.
그룹의 숙원 사업이었던 면세점을 따냈다.
10대 그룹에 못 미치지만 로비로 어렵게 얻어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돈 잘 버는 왕서방들이 찾아와 싹 쓸어 담았다.
노다지로 벌어들이는 돈을 정치권에 로비해 가열차게 진행했다.
그룹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뇌물이 필요하다는 건 천일그룹 오너 일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집안의 천민재가 당황했다.
링크장 빙판 위를 비행하듯 날아오는 발길 하나.
뻐어어어어억!
천민재는 복부에서 화염이 폭발하는 듯한 고통을 맛봤다.
외마디 비명도 토하지 못할 만큼의 강력한 한방.
“헉!”
김유나가 대신 비명을 토했다.
콰다다당.
천민재는 빙판 위를 몇 바퀴나 굴렀다.
“크으윽.”
밀려오는 고통에 신음을 토하며 얼음 위를 박박 기었다.
“우웩…. 웩.”
충격을 받은 위에서 조금 전 먹은 야식이 역류하며 쏟아졌다.
표현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에 눈앞이 노랗게 변했다.
가출한 정신은 의식마저 혼미하게 만들었다.
“일어나, 양아치 새끼야!”
귓가에 울리는 버럭대는 호통.
얼음 바닥을 기며 천민재는 공격자를 쳐다봤다.
“자, 장태산….”
놈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보이자 거짓말처럼 몸이 발딱 일으켜졌다.
어릴 적부터 멋대로 해오던 버릇이 김유나의 차가운 말투에 손이 먼저 나갔다.
분노조절장애를 갖고 있는 천민재는 상대를 확인한 순간 더 이가 갈렸다.
기습 공격에 방어하지 못하고 당했지만 몸싸움에서 밀릴 이유가 없었다.
“사과해.”
“닥쳐!”
오물이 묻은 입술을 소매로 훔치며 천민재가 악을 썼다.
“그래…. 너 같은 놈들은 언제나 반응이 똑같지. 절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그 모습~ 감히 아랫것들이 보이기나 하겠어?”
장태산이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오, 오빠 그만해요.”
김유나가 장태산을 붙잡고 말렸다.
그 모습에 천민재의 눈이 돌아갔다.
김유나의 ‘오빠’라는 말은 그의 화에 불을 붙이고 걷잡을 수 없게 분노를 일으켰다.
“빌어먹을 것들! 니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지? 그래~ 처음 볼 때부터 수상했어. 김유나! 너도 저 한국대 새끼가 마음에 들었던 거지? 여태껏 내숭을 떨고 있었다 이거지? 흐흐흐.”
천민재는 되는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착한 오빠 탈은 진작 벗었다.
‘내 거가 아니면…. 다 짓밟아놓겠어!’
짧은 순간 김유나에 대한 언론공작도 떠올렸다.
먹잇감으로 던져 놓기 알맞았다.
운동 대신 사랑을 택한 빙판의 여왕.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비열함은 천민재에게 그대로 유전 됐다.
“넌 좀 더 맞아야겠다.”
장태산이 다시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덤벼! 덤벼 이 범생이 새끼야!”
허리를 쫙 피고 악을 쓰며 폼을 잡는 천민재.
그는 간과하고 있었다.
장태산이 육상선수들을 발라버린 피지컬 만렙이라는 걸 말이다.
쇄애앳.
장태산이 가까이 다가오자 천민재가 먼저 주먹을 날렸다.
무늬만 하키 선수가 아니었다.
거친 몸싸움이 기본인 하키 선수들의 싸움 실력은 다른 종목 선수들을 뛰어 넘었다.
‘병신!’
장태산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었지만 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천민재를 비웃었다.
하지만 한 방 제대로 맞으면 그땐 아웃이었다.
턱!
그러나 손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했다.
“장난해?”
“놔! 놓으란 말이야!”
오른 주먹이 장태산 손에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으드득.
잡힌 주먹의 손목뼈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으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천민재.
“오빠아아아!”
김유나가 놀라 소리쳤다.
“뭐, 뭐야!!!”
“그 손 놓지 못해!!!”
그때 순찰을 돌고 있던 선수촌 야간 경비조가 나타났다.
“1, 112 신고해!”
큰 소리에도 여전히 손을 붙잡고 놓지 않는 장태산의 모습에 당황한 경비가 112를 불렀다.
갑자기 벌어진 한밤중 사건.
선수촌에 때 아닌 비상이 걸렸다.
***
“저, 저 자식이 먼저 공격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손목 금 간 게 확실합니다!”
출동한 경찰차를 타고 이번 생에 처음으로 경찰서에 왔다.
파출소에서 먼저 천민재 신원조회를 하고 난 후 곧바로 경찰서로 이송됐다.
보통 파출소에서 합의 얘기가 나오며 시간을 끄는 법인데 대접이 달랐다.
사건으로 경찰서는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장주시 쓰레기 처리 때도 병원에 있었다.
형사 사건이라 분위기가 살벌했다.
철창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는 형사과에서 얘기가 진행됐다.
형사님이 뽑아준 믹스 커피로 한 밤의 운치를 달랬다.
지금 시간은 새벽 1시.
“장태산 씨 확실해요?”
사건 담당 형사가 물어왔다.
“정당방위였습니다. 천민재 선수가 먼저 주먹을 날려서 막았을 뿐입니다.”
“아, 아닙니다! 저 놈이 절 쓰러트린 뒤에 제가 반격하려 순간 이렇게 재차 공격한 겁니다!”
주변에 왜 이렇게 쓰레기들이 많이 널려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한 짓에 대해 반성하는 게 전혀 없었다.
반성이 뭔지 전혀 몰랐다.
천민재를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저 자식 눈빛 보십시오! 조금 전에도 저랬습니다!”
“하아.”
형사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사실 기술적으로 복부를 걷어차서 처음 공격에는 내상이 없었다.
그리고 손목에 힘을 가했지만 힐을 사용해 치료해 놓아 그 역시 상처가 없었다.
아무리 살펴도 증거가 없지만 당한 천민재는 눈이 돌아가 난리를 쳤다.
“두 분 다 합의하시죠. 국가 대표 분들이 이런 사건에 얽히면 피곤해져요. 괜히 언론사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자격 박탈됩니다.”
형사가 피곤한 듯 합의를 종용했다.
겉으로 보기에 난 멀쩡했다.
하지만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여차하면 내공 돌려 머리에 피 쏠리게 만들 수 있었다.
그 전에 구경할 게 남았다.
“도련님.”
“왜 이제 오는 겁니까?”
천민재 앞에 고개를 숙이는 사십대 후반의 남자.
새벽에 불려 나왔지만 옷차림이나 눈빛은 깔끔했다.
주인 잘 못 둔 죄로 바쁜 남자였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남자는 형사에게 다가가 명함을 내밀었다.
“천일그룹 비서질장 진광현이라고 합니다.”
“…….”
형사는 명함을 보고 날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천일그룹 비서실장 직함이 무시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이제부터 회사 변호사들이 대처하겠습니다.”
“그래요. X발 어떤 새끼 때문에 잠도 못자고….”
든든한 아군을 만나자 나를 흘겨보며 욕까지 시원하게 뱉는 천민재.
형사는 입을 다물었다.
주변에서 일을 하고 있던 형사들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더러워서 피한다는 그룹 똥 덩어리인 걸 잘 알았다.
“형사님 이번 사건은 심야에 일어난 계획적 폭행 사건입니다. 여기 있는 장태산이라는 피의자는….”
“변호사 아저씨. 저 피의자 아닙니다. 피의자라 부르고 싶으면 저 녀석과 쌍으로 엮으세요.”
“어린놈의 새끼가 말하는 싸가지 봐라. 운동이나 하는 새끼가 어디서 입을 놀려!”
비서실장과 동행한 두 명의 변호사 중 나이 지긋한 변호사가 호통을 치며 훈계했다.
“어린 놈? 싸가지? 아저씨 저 아세요? 지금 모욕죄 구성 요건을 충분히 충족했다는 거 아시죠?”
“모, 모욕죄?”
“형법 제311조. 공연하게 사람을 모욕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틀려요?”
“!!!”
선빵 친 변호사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형법각칙 조문까지 외우는 일이 쉬운 게 아니다.
“참고로 저 운동하는 새끼가 아니라 한국대 법학과 08학번 재학 중이며, 이번에 사법시험 2차까지 패스했습니다.”
급기야 변호사가 당황하며 비서실장을 돌아봤다.
야밤에 끌려 나와 나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을 패도 되나? 나도 한국대 경영학과 출신인데 어쩌라는 거지?”
비서실장이 별것 아니라는 듯 이죽거리며 나섰다.
“그런 당신 그룹 도련님은 야심한 시각에 여자 혼자 있는 곳에서 행패 부려도 되나?”
저절로 반말이 나왔다.
“???”
비서실장이 천민재를 돌아봤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는 걸 알 것이다.
“오해에요. 전 그런 적 없습니다.”
뻔뻔함이 하늘을 찔렀다.
천민재는 고개를 풀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충성!!!”
그때 일단의 경찰들이 움직였다.
“충성!”
앉아 있던 형사도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경례했다.
무궁화 네 개의 정복을 차려입은 경찰서장의 등장이었다.
야심한 시각이지만 보고를 받고 바로 출동한 것 같았다.
그룹의 파워가 서장까지 새벽에 불러낼 만큼 쌨다.
“중랑경찰서장 구용호라고 합니다.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요.”
경찰서장이 천민재와 비서실장 앞에서 겸손 모드를 발휘했다.
대놓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 현상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명백한 폭행 사건인데 형사님이 합의만 종용하시네요~.”
천민재가 형사의 태도를 들먹거렸다.
“조 경사. 사실이야?”
경찰서장이 조 경사라는 형사를 매섭게 노려봤다.
“아, 아닙니다.”
손까지 흔들며 부정하는 조 형사.
경찰서장이 새벽에 나와 민원봉사(?) 하는 모습에 기겁한 것 같다.
“빨리 처리하시죠. 저희 도련님 국가 대표입니다.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경찰서에 계시면 경기력 향상에….”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비서실장의 말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웃겨 배가 아파왔다.
“너 뭐야! 깡패야!”
경찰서장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천일 그룹 라인에서 관리되는 서장이 확실했다.
“저도 경기력 향상에 영향을 받는 선수라서요~.”
“뭐라고? 선수? 네가?”
경찰서장도 전말에 대해 전체적으로 보고를 못 받은 것 같다.
“서장님 이 사건은….”
그때 당직실에서 나온 것 같은 상위 계급 형사가 다급히 보고서를 들고 다가왔다.
바쁜 대한민국 경찰들을 피곤하게 만든 천민재.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날 보고 비릿하게 비웃음을 연속 날렸다.
“아이고~ 삭신이야. 이 밤에 수당은 제대로 나오는 거야?”
형사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익숙한 목소리의 그림자.
“당신은 또 뭐야!”
경찰서장이 뿔따구가 났는지 나타난 분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구 경위~ 너 많이 컸다.”
“허억! 거, 검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