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
회귀의 전설
400장. 널 잊고 있었다. (1)
“으으…. 정말 춥군.”
“흑룡강 출신이면서 엄살은….”
“도대체 여기서 뭘 찾으라는 거야?”
“장태산이라는 한국 놈의 흔적.”
사하 공화국 총리관 접대실에서 소리 죽여 대화를 하는 두 남자.
12월의 사하 공화국은 한빙지옥의 현실 체험관이나 진배없었다.
중국에서 보낸 스파이 두 사람은 춥기도 춥고 마음도 바빴다.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다가 긴급 명령으로 사하 공화국까지 날아왔다.
그리고 어렵게 흔적을 잡아냈다.
딸깍.
총리실 문이 열렸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찔러 넣은 뇌물 덕분에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총리 예고르가 모습을 보였다.
“아닙니다. 각하.”
깍듯한 자세로 중국 스파이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해 인사했다.
“앉으세요.”
요즘 들어 중국 자본이 러시아에 속속 들어왔다.
찾아오는 투자객이 적은 사하 공화국 입장에서는 투입되는 자본에 언제나 환영이었다.
특히 얼마 전 있었던 대박 사건에 총리 예고르는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
총리에게 떨어진 떡고물이 천만 달러가 넘었다.
그것도 안전한 스위스 계좌를 통해서 들어온 떡고물이었다.
99년이라는 장기 임차지만 쓸모없는 땅에 불과했다.
야쿠르인 1,000명 정도만 그곳에 살았다.
변변한 도시나 마을도 없는 불모지를 수십 억 달러를 받고 빌려줬으니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그 일로 대통령과 총리는 입이 찢어지기 직전의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사하 공화국은 오염된 곳 하나 없는 청정지역이라 풍경이 남다릅니다.”
“그렇지요. 중국 겨울과는 다르지요.”
“그래서 저희 회사에서 여행 상품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이곳에 호텔을 짓고 자연 경관 투어를 운영한다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호텔과 관광요?”
총리가 입맛을 다셨다.
중국인들 씀씀이가 장난 아니라는 소리는 익히 들어왔다.
유럽 명품 매장에서 싹쓸이로 쇼핑한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이번 건을 업적으로 만들면 다음에도 총리질하기 쉬웠다.
“아직 내부적으로 결정 난 사항은 아니지만 보고가 된다면 긍정적으로 검토가 될 것 같습니다.”
국영기업 여행사 소속 직원으로 알려진 두 스파이는 태연하게 사업 제안으로 관심을 샀다.
“사하 공화국은 국제적 투자에 항상 열려 있습니다.”
총리 예고르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 새끼들도 돈 좀 토해내면 좋겠는데. 흐흐흐.’
뭔지 모르지만 요즘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소문에 들으니 한국인이 얼마 전 대대적으로 투자를 했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쪽도 관광 목적입니까?”
‘어라? 벌써 소문났어?’
예고르는 중국인들 정보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규제를 풀기 위해 장관들과 비밀회의를 열어 도장을 찍은 사안이었다.
그 사이에 정보가 샌 것 같았다.
“화끈한 한국인 투자 분이었습니다. 그 분도 관광 분야 쪽으로 이것저것 투자하기 위해 제법 큰 땅을 구매했습니다.”
신경 써서 ‘화끈’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래요?”
“이거 경쟁업체가 되는 건 아닌지….”
중국인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뭐, 문제 있겠습니까? 생각보다 낙후된 곳이라 사실 투자가치로는 영 아닙니다.”
“그곳이 어딥니까? 되도록 장소가 겹치는 걸 피하고 싶습니다.”
“여깁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하 공화국 전도 앞에 선 예고르가 한 지역을 가리켰다.
흔한 도로 하나 연결되지 않은 야생의 대지.
“흐음…. 회사에 정밀 실사팀을 요청해야겠군요.”
“그러십시오. 꼼꼼히 둘러보고 결정하십시오.”
예고르 총리의 말에 눈을 마주치며 만족한 표정을 짓는 중국 스파이들.
자신들을 위해 성대한 파티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직 몰랐다.
***
“뭡니까? 올림픽 포기했습니까?”
내가 사온 치킨을 뜯고 캔 맥주를 마시며 조영준이 물어왔다.
“제 주종목은 스키가 아니라 사업입니다. 돈 벌어 세금 내야 국가가 돌아갑니다.”
“국가씩이나요?”
못 믿는 조영준.
TS 그룹이 흑자로 돌아서며 국가에 내는 세금 규모가 꽤 됐다.
최병박 정부 들어 법인세율을 인하했지만 그럼에도 적지 않았다.
“못 믿겠지만 제가 먹여 살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조영준 씨도 포함해서요.”
“치킨 한 마리와 캔 맥주 하나로 너무 생색내는 거 아닙니까?”
“전지훈련 안 갈 겁니까?”
“네? 전지 훈련요?”
“아는 회장님 통해서 스폰 받아 놨습니다. 새해가 밝으면 바로 케나다로 떠날 겁니다.”
“저, 정말요?”
코치 한 명에 나 빼고 선수 둘이지만 비용이 꽤 됐다.
“스포츠 마사지 자격증 있는 남녀 전문 트레이너랑 같이 보낼 겁니다. 가서 빡세게 훈련하고 계십시오.”
“같이 안 가요?”
“러시아에서 훈련하고 왔습니다.”
“러시아요?”
내 땅에서 스키 좀 탔다.
산도 있고 나무도 있고 호수와 강도 존재하는 사하 공화국의 내 땅.
눈이 내린 땅에서 신나게 스키를 즐겼다.
그러다 지도에도 없는, 러시아 제국 시절 영주가 살았던 부서진 성을 발견했다.
드라큘라가 나와서 하나도 이상할 것 없을 만큼 폐허가 된 성이었다.
그래도 보기에 멋졌다.
모스크바에 공사를 발주해 놨다.
봄이 되면 대대적으로 성을 수리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이것저것 디자인 뽑느라 바빴다.
성 앞에 활주로와 비행기 격납고까지 세울 계획 중이다.
푸틴 형님이 선물로 준 헬기는 요긴하게 사용했다.
비행기는 사양했다.
굳이 탈 많은 러시아 여객기는 받고 싶지 않았다.
로버트에게 자가용 비행기를 주문해 놨다.
비행기 조종도 배웠다.
푸틴 아재가 쪼잔하지 않았다.
고장 나면 바꿔 타라고 헬기 몇 대를 더 보내줬다.
그래서 러시아 하급신을 좀 불렀다.
계기판을 비롯해 사용설명서가 러시아어로 기재되어 있어 한 분쯤은 필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포인트에 굶주린 귀신이 불려왔다.
러시아에서 신형 헬기를 조종하는 테스트 조종사라고 했다.
죽은 지 몇 년 되지 않은 신삥 귀신이었다.
안전불감증이 심한 러시아였기에 일 년에 몇 차례씩 사고가 난다고 했다.
그 바닥에서 운 좋게 20년을 버티다 사망했다는 남자 귀신.
미하일 중령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에게 기술을 이전 받았다.
헬기는 KA-62 시리즈.
1,700마력짜리 트윈 터보 엔진을 달았다.
항속거리는 600킬로미터 정도로 러시아 내 땅에서 몰고 다니기에 알맞았다.
군용에서 파생된 녀석이라 기체는 튼튼했다.
비행이나 항법 같은 다기능 디스플레이 형식이라 조종도 편했다.
지형경고 장치와 4축 자동조정장치까지 들어간 최신형이었다.
마음에 들어 몇 대 더 팔아 줄 생각이다.
몇 주 신나게 놀다 귀국하다 보니 어느새 한 해도 끝자락에 와 있었다.
다사다난했던 2009년도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가슴 아픈 일이 많았던 해였다.
곧 새해가 밝아오는 2010년의 대한민국.
연말이 코앞이었다.
회사 가족들은 종무식을 통해 모두 휴가를 줬다.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온 태릉선수촌.
스키 코치는 한국대학교 체교과 서준호 교수로 바뀌었다.
“코치님 어때요?”
“좋아요. 교육도 체계적이고 실력도 뛰어납니다.”
조영준 입에서 단박에 좋은 소리가 나왔다.
“어렵게 섭외한 분입니다.”
“태산 씨가요?”
“제 교양 과목 전담 교수님이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조영준은 한국대에 시기심 같은 게 없었다.
“열심히 하십시오. 이번에 메달 따셔야죠.”
“네. 뭔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조영준 눈에 강한 의지가 팍 들어가 있었다.
마력 샤워와 침술을 통해 체질이 바뀌면서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별일 없다면 메달 따는 건 무난하게 성취될 것이다.
“바람 좀 쐬고 올 게요.”
“밖이 추워요.”
“러시아에 비하면 봄바람 수준입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조영준.
닭다리와 한 캔밖에 없는 맥주로 시선을 옮겼다.
- 도제조 대감을 뵙습니다.
밖으로 나가니 조영준 껌딱지 조영록 교련관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왔다.
죽은 자들의 인사였지만 제법 대접 받는 기분이 들었다.
“수고하게.”
다 늙은 대감처럼 뒷짐을 지고 기숙사를 나왔다.
시간은 밤 11시.
본격적으로 몰아치는 겨울바람이 태릉선수촌을 휩쓸었다.
선수들도 이런 날씨에는 바깥 운동을 삼갔기에 흔하게 보이던 귀신들도 안 보였다.
내 발걸음은 곧바로 직진.
곧 해외 전지훈련을 떠난다는 그녀의 문자를 받았다.
가기 전에 얼굴 도장 한 번 찍고 싶었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아이스링크 장.
곧 만나게 될 귀여운 소녀를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
콰다당!
“윽!”
김유나는 빙판 위로 넘어지며 이를 악물었다.
태산 오빠의 침술로 많이 좋아졌지만 계속된 연습과 피로 누적으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트리플럿츠에서 실수가 났다.
럿츠 점프는 아웃 엣지 사용이지만 자꾸 심판들이 인엣지가 의심된다며 어텐션마크를 붙였다.
확실하게 인엣지를 사용하는 마오와 차별이 심했다.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실력으로 격파하기로 마음먹었다.
동계 올림픽이 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특유의 악바리 근성을 발휘했다.
“유나야! 안 다쳤어?”
그때 김유나 이름을 부르며 한 남자가 링크에 난입했다.
‘저 오빠는 싫다는데… 왜 저러는 거야!’
김유나는 짜증이 났다.
몇 번 거절했지만 자꾸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천민재.
이 늦은 시간에 말도 없이 찾아와 구경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괜찮아요.”
발목이 시큰거렸지만 김유나는 이를 악물고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다가와 손이라도 잡을까 봐 걱정됐다.
선수촌에 소문이 자자했다.
과거에는 몰랐지만 그는 바람둥이였다.
하키 선수들과 자주 안마를 받으러 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선수촌에서 받는 스포츠 마사지와 종류가 다른 마사지라는 걸 최근에 알았다.
눈을 맞추는 것도 스치며 보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 식당이나 체력단련실에서 마주치면 자꾸 아는 체를 해왔다.
싫다고 분명하게 말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오빠가 넘어져 봐서 아는데 이거 놔두면 큰 상처 된다. 이리 와서 기대 봐.”
아니나 다를까 김유나 곁으로 다가오며 어깨를 부축하려는 천민재.
김유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싫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본능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났다.
어릴 적부터 상대의 기운을 알아채는 재주가 있었다.
탁한 기운을 소유한 사람에게서는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진하게 났다.
얼마 전 만났던 대통령도 그랬다.
사진을 찍기 위해 옆에 다가오는데 역한 비린내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천민재도 마찬가지였다.
“싫어요!”
김유나 목소리가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움찔 놀라는 천민재.
“오빠 뭐에요? 왜 아이스링크 장에 함부로 들어와요. 이 시간에는 저만 사용한다는 거 모르세요?”
독하게 마음먹고 김유나가 말을 쏘아붙였다.
오늘 결판을 내고 싶었다.
천민재를 보고 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찝찝하고 나빴다.
자신을 훑어보는 진득한 시선에 몸서리가 쳐졌다.
“흐흐흐. 뭐야? 지금 날 벌레처럼 보는 거 맞지?”
천민재가 비열한 웃음을 터트렸다.
저벅.
그리고 한 걸음 더 김유나에게 다가갔다.
“가, 가까이 오지 말아요! 소리 지를 거예요!”
코치님은 해외 전지 훈련장 문제로 캐나다로 떠났다.
엄마는 저녁 시간에 이곳에 있을 수 없어 집에 돌아갔다.
“질러 봐! 경비는 지금 야식 먹으러 나갔으니까.”
천민재가 대놓고 술수를 부렸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너 나랑 장난해?”
“뭐, 뭐가 말이에요.”
김유나는 천민재 눈에서 순간 스치는 광기를 봤다.
집요함과 욕망이 번뜩였다.
“내가 지금껏 너에게 공을 들였는데 거절해? 그 새끼 때문이지. 장태산…. 그 새끼 나타난 이후 너 변했어!”
사실 천민재 말도 맞았다.
그러나 장태산은 친오빠 같았다.
천민재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직 남녀 간의 감정은 없었다.
김유나 머릿속에는 곧 있을 올림픽이 전부였다.
“정말… 구제 불능이군요. 그리고 더러워요….”
김유나가 입술을 깨물며 천민재를 노려봤다.
“뭐라고! 주목 좀 받는다고 까불어? 운동이나 하는 주제에!”
김유나의 한마디에 자극을 받아 꼭지가 돈 천민재.
감추고 있던 본능이 폭발하며 자연스럽게 오른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빠르게 김유나의 뺨을 향해 휘둘러지는 천민재의 손바닥.
촤아아아아아앗.
그 순간 빙판 위를 달려오는 거대한 그림자 하나.
“멈춰! 이 갯쌔끼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