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8
회귀의 전설
388장. 마법은 난을 타고
‘이게 뭐지?’
아린은 영주의 새로운 취미 생활을 지켜보며 의문에 빠졌다.
가끔 이렇게 영주가 자기만의 취미 생활을 즐기는 모습을 볼 때가 있었다.
대륙에서는 결코 본 적이 없는 특이한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를 만난 지 어느새 300일.
영주는 어떻게 기억할지 몰라도 아린은 수많은 하루하루를 기억에 담았다.
영주는 특이했다.
아니 특별했다.
지금껏 봐온 세상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이 없다.
하루아침에 전날과 분위기가 확 바뀔 때가 많았다.
마력에 민감한 마법사 아린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영주는 눈에 띌 만큼 나날이 발전해 갔다.
마법 상식에 대해 더 이상 묻지도 않았다.
마치 다 알게 된 것처럼.
그것 말고도 영주의 능력은 끝이 없었다.
검뿐만 아니라 궁술에도 능했고 정령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신성 치료를 실행할 줄도 알았다.
성벽 공사 중에 다친 심각한 환자도 영주가 직접 치료했다.
아린도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 심각한 환자였지만 영주는 쉽게 치료했다.
영지 전체에 창궐하던 병이 점차 줄어들었다.
한 여름에는 물을 끓여 먹고 비누로 손을 씻으라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영주가 임명한 행정관이 자연재료로 비누를 만들어 공급했다.
그 이후 대부분 영지가 겪는 병들이 확실히 줄었다.
기도를 드릴 신전 하나도 변변하게 없지만 그 무섭다는 역병도 퍼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주는 체계적인 식단 관리 표를 만들어 배포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개인 사비를 털어서 굶주린 영지민이 없도록 했다.
하지만 그 틈에서도 게으른 자나 삶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몹시 엄격했다.
도둑질하는 자는 열 배로 물도록 하고 상습이 되면 영지의 노예로 삼았다.
살인자는 정당방위를 제외하고는 가차 없이 처벌됐다.
이후 길가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가볍게 줍는 자가 없게 되었다. 술 먹고 깽판 치는 자들도 사라졌다.
자유로운 영지라고 소문이 나면서 찾아들어온 용병들도 영주에게 크게 당한 일이 있었다.
영지민들을 상대로 허세를 부리다가 곤장을 맞고 쫓겨나는 건 예사였다.
치안이 안정되고 먹고 살 만해지자 영지민들은 생업에 몰두했다.
영지의 세금은 전체 수입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다른 영지에 비하면 반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다시 영지민들을 위해 사용됐다.
처음 볼 때 거지소굴 같았던 영지가 이제는 제법 모양새를 갖췄다.
마법 성문이 가동됐고 병사들도 수천 단위로 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몰려오는 난민들을 대부분 다 수용했다.
그러자 영지민의 수는 어느새 10만을 훌쩍 넘겼다.
사방 곳곳이 개간되기 시작하면서 풍작을 이뤘다.
농업용 말과 농기구는 영주가 직접 제공했다.
한동안 농사를 짓지 않고 휴식기에 들어 있었던 땅은 기름졌다.
이렇다 할 자연 재해가 없어 심은 대로 걷게 된 곡식들이 사방에 넘쳤다.
영주성의 창고가 식량으로 가득 채워졌다.
단 1년 만에 자급자족이 가능해진 것이다.
상인들도 수없이 들고 났다.
영주는 칼몬 상단주가 경영하는 유베스 상단과의 의리를 지켰다.
영주의 특별 교역품 말고도 영지에 돈이 넘치자 다른 상단들이 앞 다투어 상단을 열었다.
가난한 영지민들과 달리 이익을 얻는 상단에는 영주가 엄격한 잣대로 세금을 물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단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몰렸다.
아린도 소문을 들었다.
마법사나 귀족들에게 영주가 제공하는 드워프 제품이 고가로 팔렸다.
수많은 환경 변화 뒤에 영주가 있었다.
그런 그가 오늘은 심혈을 기울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대륙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체였다.
아린도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재주가 영주에게는 많았다.
그와 함께 있었던 300일 동안 아린은 특별한 경험을 맛봤다.
‘화선지라고 했지? 그리고 저 풀은…… 난이고.’
특이한 유백색의 종이에 그려지는 난이라는 풀 그림.
한 손에 깃털 뭉치를 들고 가볍게 슥슥 그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절대 쉽지 않아 보였다.
종이 위에 스며들 듯 그려지는 먹 빛 그림들.
정확하게 뭔지 모르지만 심오한 이치가 담긴 것 같았다.
담백한 향이 아린의 코끝을 건드렸다.
“아린도 한 번 그려볼래요?”
***
궁금했다.
그래서 이곳에 왔다.
내 친구 형철이는 그날 대대에서 아주 영웅이 됐다.
제대할 때까지 그 누구도 터치하지 못 할 것이다.
깜짝 걸그룹 공연과 더불어 이어진 삼겹살 회식, 연대장도 아니고 사단장이 맥주와 막걸리를 쐈다.
돈 몇 백만 원에 친구는 물론 수많은 병사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로버트를 통해 한미연합사로 연락을 취했다.
새로 부임한 미군사령관이 내가 심어 놓은 인맥이었다.
한국군 군단장도 미군 사령관에는 밀렸다.
이래서 권력을 취하려고 다들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선수촌에서 이계로 워프했다.
지구에서 이곳을 방문하게 된 게 벌써 몇 번이다.
어느 곳이 더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이제는 따질 수 없다.
지구나 이곳에서나 내가 떠나면 거짓말처럼 시간이 멈췄다.
실재하되 실재하지 않는 각각의 다른 세상 같았다.
대신 양쪽 계절을 맞췄다.
지구에서는 사업하느라 바쁜 만큼 이곳에서는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기가 달라 내공이 쌓이는 정도가 달랐다.
속고 속이는 일이 일상인 지구와 달리 이곳은 순박한 세상이었다.
내가 베푼 작은 것 하나에도 영지민들은 감사를 잊지 않았다.
유베스 상단을 통해 풀린 스테인리스는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켰다.
마법사와 귀족들이 앞 다투어 물건을 사재꼈다.
마법사들은 새로운 금속에 대해 탐닉했다.
귀족들은 미스릴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신상에 목을 매었다.
가격은 내리지 않았다.
경제 위기에도 세일하지 않는 명품 전력을 취했다.
금과 보석, 폐마력석을 비롯해 싱싱한 마력석도 받게 됐다.
그만큼 아공간에 차곡차곡 부가 쌓였다.
그리고 오늘은 오랜만에 취미 생활을 즐겼다.
아린이 신기한 듯 바라봤다.
화선지와 먹으로 난을 쳤다.
불이선란(不二禪蘭)이라는 추사의 그림과 글이었다.
난과 선은 그 기개가 다르지 않다는 뜻이었다.
봄날의 난초 같지만 겨울을 이겨낸 그 강골의 기질을 잃지 않는 난은 몸은 유약하지만 선기(禪氣)를 품은 선승과 같다는 뜻이다.
추사의 그림과 글씨는 대가로 끝나지 않았다.
담고 있는 뜻과 기가 장난 아니었다.
아린에게 도움이 됐으면 싶었다.
마법이 6서클에서 정체기를 맞았다.
아린도 7서클 벽에 막혀 진전이 없었다.
나이가 어리건만 엄청난 실력이었다.
알파닥이 던졌던 경고가 생각났다.
대륙에서 위험하기가 손에 꼽는다는 아린.
내가 선물로 준 큼지막한 머리핀으로 뒷머리를 단정하게 고정시켰다.
특별히 스테인리스에 보석을 박아 넣었다.
시가로 수억은 가뿐하게 넘는 물건이지만 아까워하지 않았다.
아린 덕분에 마법을 쉽게 얻었다.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대가가 아니었다.
“전…… 그림을…….”
“마법진이라 생각하면 편합니다.”
“아!”
내 말에 아린은 감탄을 터트렸다.
사소한 것에도 그녀는 감탄하고 기뻐할 줄 알았다.
아린에게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다.
그녀에게 죽은 스승이 있다고 들었다.
많은 이야기는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마법사 스승이 엄청난 실력자라는 건 알았다.
나이 어린 그녀를 6서클로 키워낸 걸 보면 전설의 대마법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와서 붓을 들어보십시오.”
“네…….”
아린은 내 말을 잘 따랐다.
강렬했던 첫 만남과 달리 그녀의 내적 성향은 부드러웠다.
지금껏 누구에게 관심을 받아본 적 없는 것 같았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눈물 흘릴 줄 알았다.
머리핀을 받아 들고도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또로록 흘렸다.
아직 제대로 고백하지 않는 아린의 과거.
때가 되면 그녀가 먼저 입을 열 것이리라.
“한 번 그려봐요.”
아린은 내 말에 붓을 잡고 화선지 위에 난을 쳤다.
스윽 슥.
생각보다는 잘 쳤지만 강약을 몰랐다.
난을 쳐내가는 강함과 그 안에서 꺾어지는 부드러움의 묘미를 알 턱이 없었다.
“어렵네요.”
“마법 수련은 쉬웠습니까?”
“아니요…….”
“잘하고 있습니다.”
“…….”
잘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아린은 곧 붓을 멈췄다.
보기에는 간단하지만 난 치는 게 쉬운 작업이 아니다.
아린의 이마에서 볼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도와줄까요?”
“네?”
아린의 뒤로 자리를 옮겨 갔다.
흠칫 놀라는 아린.
그녀의 천사 같은 왼쪽 뺨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
뒤에서 포옹하듯 그녀를 안고 붓을 들었다.
“이렇게 잡아보십시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아린과 있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졌다.
아직도 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아린의 오른쪽 뺨의 흉터를 보면 기겁을 했다.
하지만 그 상처는 나에게 아무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았다.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그녀의 왼쪽 모습이 오른뺨을 덧입혔다.
아이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놀라 괴물이라며 울음을 터트렸지만 아린은 화를 내지 않았다.
마법사 치고는 훌륭한 인성의 소유자였다.
흐음. 머리칼 향기가 좋았다.
항상 입고 있던 두툼한 로브 모자 너머로 빠져나온 긴 머리칼에서 독특한 아린의 체취가 맡아졌다.
사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이곳 영주 생활에서 바깥 활동을 빼고는 거의 아린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밥도 같이 먹었다.
어떤 요리를 해 줘도 아린은 맛있게 먹어줬다.
마법사답게 아는 것도 많아 이곳 세계 전반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됐다.
그동안 그녀와 정이 많이 들었다.
내 생을 통틀어 가족을 빼고 밥을 가장 많이 먹은 사이가 됐다.
“어깨와 손목에 힘을 빼야 합니다.”
“이렇게요?”
“아니요. 힘을 빼지만 부드럽게 강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
현명한 아린은 나의 말을 곱씹었다.
마법사인 그녀에게 어떤 깨달음을 준 것 같았다.
“다시 해볼까?”
갑자기 말이 편해졌다.
300일 동안 그녀에게 조심스러웠지만 오늘따라 그녀가 몹시 가까웠다.
“네? 네…….”
얼굴을 붉히는 아린.
내 반말이 기분 나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세가 과거 아빠가 즐겨보시던 영화의 한 장면과 비슷했다.
부부가 도자기를 만드는 장면, 그러다 키스…… 키스.
하지만 남자가 죽게 되면서 심령술사의 도움을 받아 다시 서로를 확인하는 영화였다.
제목이 ‘사랑과 도자기’였다.
스으윽 슥.
아린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난을 쳤다.
힘을 빼면서 동시에 나를 의지하는 그녀의 손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제법 근사한 난이 그려져 갔다.
“저…… 영주님.”
“응?”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이다.
자연스럽게 반말이 나갔다.
“그림에 있는 저 뜻은 뭐예요? 처음 보는 글자예요.”
추사 그림에 새겨진 화제였다.
엘리트 마법사답게 호기심이 많았다.
“난 그림을 그리지 않는 지가 벌써 20년이지만 오늘은 우연히 하늘의 본성을 그려냈구나.”
낭랑하게 목소리가 울렸다.
추사가 된 것 같았다.
스으으윽 스윽.
아린의 귓가에 시를 읊어주면서 난을 본격적으로 그려나갔다.
“문을 닫고 깊이깊이 찾아드니, 이 경지가 바로 유마거사의 불이선일세…….”
파아아아앗.
응? 이게 뭐지?
아린이 고요히 있다가 갑자기 마력을 손에 담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파스스스스슷.
마력 파장이 거세졌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내 손에도 마력이 전이 됐다.
아니 내 마력도 같이 아린과 반응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무언가 심득을 얻은 것 같은 표정.
거의 완성되어가는 난.
세상에 마력이 담겨 있어서 그런지 살아 있는 것처럼 잎이 생생했다.
“마땅히 비야리성에 살던 유마거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이…… 사절하겠다.”
파아아아아아아앗.
화제 시 구절이 끝나기 무섭게 퍼져나가는 거대한 마력의 파도.
황금빛 마력이 아린과 나를 뒤덮었다.
헐! 이게 뭐야!
- 6서클 마법사가 심득을 얻었습니다.
- 대가의 심득을 마법사가 이해했습니다.
- 서클의 벽이 깨지는 걸 동감하고 있습니다.
대가?
서클의 벽?
지금 아린이?
- 7서클 마법사로 전직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