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
회귀의 전설
387장. 희망을 주는 남자 (2)
“외박 처리 잘하고. 이것저것 막 먹다가 아픈 녀석들 없나 체크도 해.”
“넵! 대대장님!”
“오늘따라 면회객이 더 많은 것 같다?”
“겨울 시작되기 전에 많이 찾아오는 시기입니다.”
파주에 위치한 1사단 15연대 소속 대대장 박성욱 중령은 창밖으로 보이는 면회객들과 장병들을 바라봤다.
11월이지만 아직 초라 날씨가 괜찮았다.
아직 덜 떨어진 마른 나뭇잎을 매단 수목들이 늦가을의 운치를 더했다.
신식 막사로 건축된 4층 건물의 최상층 대대장실에서는 연병장을 비롯해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작전참모에게 주말간 업무 지시를 내리며 박성욱 중령은 다가올 겨울을 생각했다.
곧 닥칠 파주의 겨울은 매서웠다.
겨울이 되면 면회객들 발걸음도 거짓말처럼 뚝 끊어진다.
그리고 얼마간 지속될 겨울의 긴긴 날.
내리는 눈을 치우며 병사들은 노곤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올해 22년 차 장교인 박성욱 중령은 벌써부터 가슴이 스산했다.
조국과 시민을 위해 선택한 장교의 길은 상상했던 것만큼 만만치 않았다.
대령까지는 무난하게 진급하겠지만 그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라인을 타야 했다.
학군단 출신인 박성욱 중령은 동기들에 비해 나름 빠르게 진급한 사례였다.
하지만 암암리에 위에서 내려오는 압력이 장난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육사 라인과 경쟁이 붙었다.
선배 관계가 미흡하기만 한 박성욱 중령.
믿고 있던 학교 선배가 얼마 전 준장에서 옷을 벗었다.
끈 떨어진 연이 된 셈이다.
조국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아부와 돈이 짝꿍처럼 필요했다.
‘이대로 야전에서 은퇴해도 되겠지…….’
별을 달고 싶은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양심까지 속이며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면서 군대도 물갈이가 속속 됐다.
실력보다 아첨꾼들과 인맥 넘치는 자들이 승진하기 시작했다.
학군단 출신들은 소령 진급도 못하고 상당수가 나가떨어졌다.
대한민국에서 삼사 출신 아닌 장교들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형식적으로 몇몇 별을 달아주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면피용이었다.
“휴우…….”
답답한 박성욱 중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학군단 출신으로 자신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걷게 될 작전참모 공태준 대위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직 젊기에 미래가 막연한 장교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넵!”
말을 하며 따스한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에 선 박성욱 중령.
“응?”
갑자기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우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 F, FOB다!!!”
“비상! 비상! FOB가 나타났다!!!”
연병장에서 공을 차고 있던 병사들이 위병소로 우르르 몰려갔다.
전쟁이라도 난 듯 온 대대가 함성으로 물들었다.
면회객들도 모두 위병소 앞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저게 무슨…….”
“제,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박 중령이 놀라는 사이 작전장교가 튀어 나갔다.
“도대체 누가 온 거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밖을 바라보는 박 중령.
뚜루루루루루루루.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무슨 일이야?”
- 통신보안! 대대장님. 군단에서 긴급 통화 요청이 왔습니다!
“군단?”
- 군단장님 전화입니다.
“뭐, 군단장님! 뭐해! 빨리 연결해!”
- 넵!
뚜우.
- 군단장이다.
짧은 교환 신호와 함께 군단장의 구수한 목소리가 들렸다.
“추우웅성!”
1사단의 구호는 전진이지만 군단 규모에서는 충성 구호를 사용했다.
- 그래 박 중령. 수고가 많다.
“아닙니다!”
이등병처럼 군기 바짝 든 모습으로 박성욱 중령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미 전화받는 폼부터가 차렷 자세였다.
대대장이지만 사단장 전화를 받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데 다른 분도 아니고 군단장의 직통 전화였다.
- 다름이 아니라 협조 공문이 긴급하게 왔는데 처리 좀 해줘야겠어.
“최선을 다해 처리하겠습니다!”
- 거기 오늘 걸그룹이 올 거야. 불편함 없이 웬만하면 다 들어줘. 사단장에게도 얘기해 놨으니 전결로 처리해.
‘걸그룹? 그럼 바깥에 그 소란이…….’
통화하는 중에 밖을 유심히 살피는 박성욱 중령.
누군지 몰라도 엄청나게 고마웠다.
군단장 입에 한 번이라도 이름이 불려지면 승진에 엄청난 도움이 됐다.
더욱이 부탁이라는 말까지 사용한 상황이다.
“추우우우우웅성!”
박 중령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힘차게 충성으로 답했다.
***
“세상에 낙이 없어. 낙이…….”
막사 뒤쪽 소각장 옆에 쪼그려 앉은 김형철 상병은 무료한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입에 담배를 물고 태워도 허전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병으로 입대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상병을 달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 차라리 나았다.
친구에게 연예인 초대를 부탁할 정도로 패기 넘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병사 탈영과 관심사병 자살 사건이 터지면서 정신없는 몇 달을 보냈다.
이웃 중대 사건이었지만 파장이 대대 전체에 미쳤다.
사단장까지 날아간 큰 사건이었다.
새로 부임한 장교들도 두려움에 사병들을 닦달했다.
최전방을 수호하는 1사단이었기에 군기가 장난 아니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터진 사건들로 빡센 시절을 보냈다.
유도리가 전부 사리지고 FM만 존재했다.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어느새 상병.
곧 들이닥칠 새하얀 악마 가루를 치우다 보면 봄이 올 것이다.
짬밥 좀 먹었다고 김형철 상병은 천천히 돌아가는 국방부 시계를 원망했다.
상병임에도 병장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어 막내 생활도 겨우 벗어났다.
누가 봐도 꼬인 군번이었다.
“태산이 나쁜 놈……. 그래도 연락해서 물어봐야 할 거 아냐. 친구라는 놈이…….”
괜히 장태산을 원망했다.
한국대 법대에 재학 중이라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다른 곳과 달리 법무 장교들은 꿀보직이었다.
훈련도 없고 출퇴근하는 공무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녀석이 서련이 포함된 FOB 멤버들을 이끌고 위문 공연을 온다고 철썩같이 약속했었다.
하지만 기대하는 것과 달리 가망성이 희박했다.
겨울이 오면 모든 활동은 위축됐다.
올해는 군단 혹한기 훈련까지 예약되어 있어 다들 예민했다.
준비와 훈련까지 끝내려면 금방 한 달이 지나가 버릴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그때 갑자기 막사 건물에 울리는 엄청난 함성.
“뭐, 뭐야! 전쟁이라도 난 거야!”
담배 한 대를 더 태우려던 김형철은 화들짝 놀랐다.
자대에 배치된 이후 이렇게 큰 함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F……와아아아!”
함성 속에 뭐라고 귀에 익은 낱말이 섞여 있었지만 잘 전달되지 않았다.
그저 요란한 함성만 계속 이어졌다.
타다다다닥.
그 순간 몇 달 전 들어온 후임이 달려왔다.
“기, 김 상병님.……. 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야? 통일이라도 됐어?”
“그게 아니라……. F…….”
“F……. 뭐?”
급하게 뛰어온 후임이 숨을 헐떡거렸다.
“FOB가 왔습니다! FOB가요!!!”
“뭐라고 F…… OB!”
통일보다 군바리에게는 더 격하게 환영받는 걸그룹의 방문.
“상병 김형철은 지금 급히 면회실로 오기 바란다. 다시 말한다. 상병 김형철은 지금 급히 면회실로 오기 바란다!”
그리고 부대 전체에 울리는 김형철 상병을 찾는 스피커 방송.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친구야야야야야야야야야!”
김형철은 복장도 갖추지 않고 그대로 면회실로 달려갔다.
방금 전까지 속으로 욕했던 친구 장태산.
그 녀석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
“FOB! FOB!”
“와아……. 진짜 FOB라니…….”
“주민 양은 사랑입니다……. 흑흑”
“서련! 서련! 서련!”
체육복을 입고 활동 중이던 병사들이 면회소를 포위했다.
면회 왔던 가족이나 지인들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기 바빴다.
대한민국 걸그룹 1, 2위를 다투는 미녀들의 등장은 모두를 혼란과 충격에 빠트렸다.
“안녕하세요~ FOB입니다~ 반갑습니다~.”
철저하게 교육된 멤버들은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장태산 이사가 친구에게 놀러가자고 할 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친구가 군바리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차림은 코디가 청바지로 모두 맞춰줬다.
머리도 다듬고 화장도 했기에 FOB 멤버들은 당당하게 여신 미모를 뽐냈다.
군인들 눈동자가 일제히 풀려 버렸다.
급히 헌병대가 출동해 라인을 잡았다.
이곳은 군대.
헌병 앞에서 병사들은 더 이상 밀어붙이지도 다가오지도 못했다.
“이사님……. 너무하네~.”
“히잉……. 군인 아저씨들……. 너무 많아.”
“흐흣. 난 좋아~. 우리도 군통령 한번 해보자!”
웃는 얼굴로 속삭이는 멤버들.
회사에서 철저하게 군대 공연은 차단했었다.
수시로 요청이 들어왔지만 장태산 이사의 명으로 모두 거절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장태산 이사가 직접 군부대에 멤버들을 대동했다.
“통닭 언제 도착합니까?”
장태산 이사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 통닭을 비롯해 중국집에 전화를 돌렸다.
주문량이 장난 아니었다.
피자부터 시작해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오빠……. 여기 뭐야?”
서련이 장태산에게 물었다.
“친구 면회.”
“친구가 군인이라고 말을 해줘야지.”
“가끔 이런 이벤트가 필요한 법이야. 너희들이나 친구에게도~.”
“완전 나빠.”
“웃어라~ 저기서 너 찍잖아.”
“으으……. 복수해 줄 거야!”
“오빠 군대 가면 올 거지?”
“그건…….”
“요즘 회사에서 걸그룹 새로 키우려고 하던데…….”
“갈 거야!”
서련을 가볍게 누른 장태산.
치이익.
PX에서 구입한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변한 게 없네~”
장태산은 주변을 둘러보며 감회에 젖었다.
“치이이이이이인구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때 친구를 부르며 다가오는 상병 하나.
“안 됩니다!”
“저기……. 내 친굽니다! 태산아! 나야 나!”
“제 친구예요~.”
헌병이 쳐놓은 줄을 뚫고 들어오는 김형철 상병.
“친구야! 보고 싶었다! 크으으으!”
덥썩 김형철 상병이 장태산에게 안겼다.
“김 상병님 진짜 FOB랑 아는 거였어?”
“우와아아……. 난 구란 줄 알았는데.”
“형철이 저 자식……. 오늘부터 넌 꽃길이다!”
주변에 있던 군바리들이 모두 부러운 시선으로 김형철을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사님, 친구분 진짜 잘생기셨다~.”
“같이 사진 한 장 찍을까요?”
눈치 빠른 FOB 병사들이 김형철 상병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허어얼…….”
“저거 실화냐……. FOB와 사진이라니…….”
주변에 몰린 군인들 모두 턱이 땅바닥에 떨어질 판이었다.
“즉석 사진기 가져왔다. 친구야~ 멤버들 중앙에 서봐.”
장태산이 즉석 사진기를 들이밀었다.
우르르.
말이 끝나게 무섭게 김형철 상병 팔을 잡고 멤버들이 포즈를 잡았다.
“흐으…….”
입이 찢어지려는 김형철은 눈알이 풀렸다.
말로만 듣던 꽃밭 선녀들 사이의 나무꾼 같아 보였지만 괜찮았다.
오늘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치즈~”
순식간에 사진이 찍혔고 출력 됐다.
“저도 한 장 찍어주세요!”
“김 상병님. 저 용식입니다! 저……. 죽을 때까지 충성하겠습니다!”
“김 상병! 나 분대장이다! 분대장!”
사방에서 아우성이 터졌다.
그때…….
“대대장님께 경례!”
“전진!”
대대장 박성욱 중령과 장교들이 나타났다.
병사들 모두 거짓말처럼 일제히 입을 다물고 경례를 올렸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면회실.
대대장 박성욱이 FOB 멤버들 앞으로 다가왔다.
“여기 인솔자 분이…….”
“저어어언진!”
장태산이 갑자니 벌떡 일어나 힘차게 전진을 외쳤다.
최소 병장 이상의 군인이 보일만한 깔끔한 군례.
“전진!”
대대장 박성욱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모두 다 벙 찐 얼굴로 장태산을 쳐다봤다.
군대를 아직 다녀오지 않은 그의 경례와 절도 있는 동작은 짬밥 확실히 먹은 병사 포스였다.
***
아오! 내가 미쳐!
하필 나타난 대대장이 과거 생의 군대 시절 대대장님이었다.
나도 모르게 전진이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이래서 군대는 남자들의 흑역사가 되는 법이다.
아직도 군대 가는 꿈을 꾸면 그 날 일진은 개 같았다.
형철이 녀석이 놀란 얼굴로 날 봤다.
자신보다 더 멋들어지게 경례를 올리는 내가 낯선 것이다.
“하하. 재밌는 분이시군요.”
“형철이가 휴가 나오면 인사를 이렇게 하기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진짜 완벽한 경례였습니다.”
조용해진 면회실에서 대대장과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분이 왜?
오늘 형철이 얼굴 거하게 한 번 세워 줄 생각이었다.
지난 생의 군 생활 시절 꿈만 꾸던 걸 친구에게 현실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뭐 필요한 것 없습니까? 무대라든지…….”
대대장이 FOB 멤버들을 돌아봤다.
뭔가 기대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옆에 있는 장교들 중에 사진기를 들고 있는 분도 있었다.
큰 거 한방으로 광고 효과를 노리겠다는 의미.
형철이를 위해 계획을 세웠다.
“그럼 면회객들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병사님들을 위해 FOB 간이 콘서트를 열어도 되겠습니까?”
“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대대장님 얼굴이 활짝 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코, 콘서트다!!!”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병사들의 함성.
병사들 모두 오늘 계 탔다.
“그리고……. 저녁에는 삼겹살 회식을 쏘고 싶습니다. 제 친구와 전우 분들을 위해서 한 턱 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제가 더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 병사들 사기가 하늘로 치솟을 겁니다!”
“와아아아아! 겹살이 회식이다!!!”
“대대장님 만세! FOB 만세!!!”
군대에서 쉽게 가질 수 없는 삼겹살 회식.
전투 훈련에서 성적을 내거나 특별한 날에만 허락됐다.
먹성 좋은 수백 명이 한꺼번에 먹을 물량과 비용을 대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태산아…….”
지켜보고 있던 친구 형철이 눈시울이 빨갛게 물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날 위해 깡패들 앞에 섰던 친구.
그런 그를 위해 이 정도 인심 쓰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 카르마 포인트가 엄청나게 지급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도 아낌없이 포인트 창고를 개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