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4화 (383/1,284)

 # 384

회귀의 전설

384장. 왕의 멀티

주안상을 들고 나타났던 수라간 상궁.

세상에…….

“누님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보면 몰라. 출장 뷔페 왔잖아.”

“…….”

이런 일이 가능한가 싶게 장금이 누님을 이곳에서 볼 줄 몰랐다.

그것도 출장 뷔페란다.

상궁 복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단아한 외모와 무척 어울렸다.

거하게 차려진 한상에 올라온 신선로를 비롯해 맥적, 각종 전의 맛이 예사로울 수밖에 없었다.

신인 장금이 누님이 직접 출장 나와 차려낸 잔칫상이었다.

그녀와 사사로이 대화를 나누었지만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았다.

분명 임금과 왕비, 고관대작들이 버젓이 한자리에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장금이 누님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특이할 수밖에 없는 현상.

오직 명종과 나만이 장금이 누님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저분 신선이세요?”

“……어릴 적에 처음 뫼시던 분이다.”

“아!”

대장금이라고 해서 TV 드라마 시대와 같을 수 없었다.

“불쌍한 분이다. 잘 도와드려라.”

“네…….”

장금이 누님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기 춤추는 분들은?”

“선녀들이다. 모두 궁중에서 한때 머물렀던 나인들이다.”

그토록 한 번 보고 싶었던 선녀였다.

확실히 선녀 급답게 미모가 출중했다.

임금을 위해 모두 다 하강한 것 같았다.

아니, 이 공간 자체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명종을 위한 무리들이 많았다.

생각보다 살아생전 카르마 포인트를 많이 쌓은 것 같았다.

“맛있게 먹거라. 그리고 조만간 한 번 놀러오고.”

“넵! 누님.”

“그래. 부족한 거 있으면 말해.”

음식도 먹는 족족 포인트가 됐다.

그렇게 연회가 무르익어 갔다.

오랜만에 장금이 누님이 담근 술과 안주로 포식했다.

현실적으로 배가 더부룩하거나 실재 불어오지 않았지만 마음은 한없이 충만했다.

“어의 과인이 부탁할 일이 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가무가 멈췄다.

소리 없이 사라진 무희들과 악단.

문종과 대신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하명하시옵소서.”

그냥 불렀을 리가 없었다.

오늘 임금이 사용한 포인트는 적지 않았다.

“과인과 잠시 산책을 하겠나?”

“어명을 받드옵니다.”

잘 먹었으니 한 바퀴 도는 것도 괜찮았다.

아직 경복궁 야간 개장은 가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소원풀이 해보는 것도 기회가 나쁘지 않았다.

왕이 앞장을 섰다.

왕후를 비롯해 대신, 상선, 나인들은 누구 하나 따라오지 못하도록 어명이 내려졌다.

경회루 연못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태산 군. 마음에 드나?”

“???”

갑자기 명종의 말투가 변했다.

“네?”

“뭘 그렇게 놀라나. 둘이 있을 때는 연극하지 않아도 되네. 어머니나 나나 꽉 막힌 귀신 아니네.”

“…….”

명종이 웃으며 산 사람을 놀렸다.

“대접 잘 받았습니다. 어의라는 감투도 이벤트로 훌륭했습니다.”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괜찮았어~. 흐흐흐.”

명종의 웃음도 바뀌었다.

왕이 아닌 한 동네 형 같았다.

“이 정도 카르마 포인트라면 신이 되시고도 남았을 텐데……. 어이 중음의 세계에 머무시는 겁니까?”

궁금한 건 물어야 직성이 풀렸다.

“……모두를 위해서지.”

“네?”

“어린 시절 아비를 일찍 잃고 엄한 어머니 슬하에서 컸네. 왕이 되기까지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은 생각보다 험난했지. 형님이 계셨고 형님을 따르는 신하들의 힘이 드셌지. 아버지는 연약한 분이셨어.”

중종과 당시 조정의 정치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다 왕이 되고 직접 친정을 하게 됐지. 힘에 부치더라고……. 아버지 때 등용한 사림들은 공자나 찾았지 다들 실속이 없었어. 이상적인 왕도를 말하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청렴해야 하거늘 자리와 공명을 탐하더군.”

명종의 아버지였던 중종은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권력을 잡았다.

임금과 왕실을 박살낸 권신들의 세력이 장난 아니었다.

그걸 끌어내고자 노력했던 중종은 지방 사림을 등용했다.

필연적으로 일어났던 여러 사화들.

개혁파와 훈구파의 전쟁은 왕실과 조정을 가리지 않고 처절하게 펼쳐졌다.

피로 잡은 왕권의 운명이었다.

그렇게 사림이 정권을 잡은 이후 조선은 더욱 경직된 사회가 됐다.

공자 왈 맹자 왈의 세상이 판쳤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자유로웠던 사회규범들이 엄격해졌다.

그리고 사림들은 박 터지게 분열되며 싸웠다.

권신이라는 적이 사라지자 구파와 신진 사림들은 명분을 놓고 목숨을 걸었다.

전혀 왕재 교육이 안 된 선조를 임금으로 올렸다.

조선을 말아먹은 원동력이 바로 사림들의 중앙 정계 진출이었다.

이상을 말하기 전에 스스로 깨끗해야 함을 진정 몰랐다.

물론 개중에는 청렴한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들은 굳이 중앙에 진출하지 않았다.

정치판이 더럽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특히 권력을 잡아 타락한 기득권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전혀 기대 못했다.

“그들은 궁에다 불을 지르고…….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별짓을 다했다네. 이것저것 백성들을 위해 펼치려던 계획들이 수시로 어그러졌지. 그러다 아들 녀석도 갑자기 병에 걸려 품에서 떠났지. 세상 다 싫고 부질없더라~.”

명종의 한탄이 이어졌다.

“풍취벽락부운지(風吹碧落浮雲盡) 월상청산옥일단(月上靑山玉一團)이라~.”

젊은 명조의 목소리가 낙랑하게 울렸다.

‘바람 불어 구름 걷히니 푸른 하늘 드러나고, 청산리 달이 뜨니 옥구슬 같다’라는 시.

이 밤의 정취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세상 부질없음을 깨닫고 안빈낙도의 삶을 살고자 했던 명종의 마음이 느껴졌다.

내 안에 깃든 신들의 지식들이 나도 모르게 입을 열게 만들었다.

“만리홍하천벽해(萬里紅霞穿碧海) 일천백일요궁전(一天白日撓宮田)~.”

나도 한 목소리 날렸다.

“만 리에 뻗친 붉은 노을 푸른 바다를 꿰뚫고, 하늘 가득 밝은 태양은 궁전을 감고 두르는 구나……. 오! 태산 군, 시도 잘하는 구나!”

옛날 귀신 명종은 시를 해석하며 진짜 기뻐했다.

죽었지만 힘내라는 응원의 메시지였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니야! 이 정도 능력이면 장원급제를 하고도 남겠어. 하하하하.”

젊은 명종이 좋게 보였다.

장금이 누님이나 선녀들도 명종을 향해 안타까운 그리움을 발했다.

요절할 관상은 아니었지만 죽음의 길을 향했던 명종.

저승에 가지 않고 이곳 태릉에서 중음 신으로 살아가며 식솔들과 못다 한 삶을 살고 있었다.

“옛다! 기분이다! 지금부터 형이라고 불러.”

“네? 혀, 형요?”

세상에. 명종이 귀신이라지만 혈육이 아닌 자가 왕을 형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없었다.

큰 사건이었다.

이제 태릉 귀신들 전부 나에게 무릎 꿇어야 했다.

“까짓것 내가 쏘는 김에 더 쏜다! 이 시간부로 정1품 도제조 먹어.”

“헙!”

귀신 임금이 관직을 막 날렸다.

도제조는 정1품으로 삼정승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왕권과 외교, 국방에 관하여 중요한 일에 대한 자문역이 바로 도제조였다.

인사나 행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였다.

도제조가 천거하면 어지간한 직급 관리도 임명 가능했다.

“그리고 대광보국숭록대부도 받아. 어때 화끈하지?”

“…….”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산 사람들 중에 알아주는 자가 하나도 없는 무늬만 관직이었지만 내심 탐났다.

특히 장 씨 가문 조상님들이 오늘의 일을 기뻐할 것 같았다.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바로 가져!”

명종 임금의 눈이 반짝였다.

뭐지? 저 음모에 찬 눈빛은?

- 왕의 남자로 간택되었습니다.

- 카르마 포인트를 녹봉으로 지급받았습니다.

- 특정한 조건을 충족하여 신하된 자의 도리를 다하십시오.

“헛!”

그럼 그렇지! 공짜가 아니다!

솔로몬 왕도 그러더니 조선 왕도 그랬다.

내가 아직 너무 순진한 게 맞았다.

녹봉 포인트도 미미했다.

“놀라지마. 카르마 포인트 안 뺏어가~.”

명종, 무서운 왕이다.

다 알고 있었다.

분위기에 취했다가 큰 코 다칠 것 같았다.

“카르마 포인트가 대단하시던데 신은 왜 안 되신 겁니까?”

취조가 시작됐다.

반격 타이밍을 노렸다.

“……나만 행복할 수 없잖아. 조금 전 말했듯 모두를 위해서야.”

“네?”

“어머니가 이곳에서 떠나기를 싫어하셨어. 그리고 왕비는……. 아들과 계속 살기를 원하고 있지. 내가 어찌 그들을 버리고 신선이 된단 말인가.”

“아…….”

죽어서도 깊은 효심과 애처, 부정을 소유하고 있는 귀신 명종.

참 좋은 왕인 건 분명했다.

영화에서 어떤 썩을 놈의 감독이 궁궐 지하에 궁녀들을 가두고 변태짓 하던 호색한으로 그려냈지만 내가 본 명종은 너무 달랐다.

권력욕이 강했던 어머니가 저승으로 가는 걸 싫어하니 자신의 포인트로 이곳을 왕의 영역으로 만든 게 분명했다.

죽은 아들과 조우한 인순왕후도 사람의 정을 다 끊지 못했다.

그녀의 맑은 웃음 속에서는 자식과 남편에 대한 정이 넘쳤다.

죽어서도 부러운 명종이었다.

“그리고 그때 함께했던 내관들이나 나인들……. 관료들도 죽어서 찾아왔잖아. 나 때문에 세상에 미련을 남긴 거지.”

“그런 일이…….”

“이곳 말고도 세상에 그런 곳이 제법 있지.”

인간계에 머무는 신들 몇 명 나도 만나봤다.

그들도 사연은 각각 다르지만 명종 형님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이해합니다.”

“동생은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네.”

“그런데 형님…….”

왕에게 잘도 형님 소리가 나왔다.

“말해 보게. 동생~.”

“제가 형님을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답답할 때는 언제나 직진이 옳았다.

나에게 뭔가 목적이 있는 명종.

“생각보다 이곳을 유지하는 데 포인트가 많이 들어가네. 과거 임금 시절에 벌어 놓은 포인트를 곶감 빼 먹듯 빼 쓰고 있었지만 이제는 바닥을 치고 있네.”

“좀 드려요?”

포인트 부자가 형님에게 이런 거 못 드리겠나.

“그런 도움은 필요 없네. 사실 나도 부업을 하고 있지 않나.”

왕의 자존심이 대단했다.

“부업이라 함은…….”

“선수들에게 침범하는 사기를 막아주는 대가가 적지 않네. 그들이 메달을 따고 국민들이 즐거워하면 일정 부분 커미션이 떨어지지.”

“오오오! 그런 일이 있군요!”

오묘한 카르마 포인트의 세계여!

다시 한 번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말인 즉은 내금위나 금군, 나인들이 선수들을 봐주고 포인트를 벌어 이곳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벌어들이는 합법적 포인트 벌이다.

명종 형님 참 똑똑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생겼어.”

“문제요?”

명종 형님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보기에는 별 문제 될 일이 없었다.

“선수촌 이사 가는 거 알지?”

“네. 진천으로 간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2년 뒤에 태릉선수촌보다 더 넓고 쾌적한 곳으로 이사 간다.

“그게 문제야. 아주 큰 문제…….”

“……아!”

이제야 완벽하게 이해가 갔다.

왕의 영역이 진천까지 미칠 수 없었다.

태릉 주변만 명종 형님의 영역이었다.

선수들이 떠나면 포인트를 벌지 못해 더 이상 어머니와 아내, 자식을 볼 수 없는 것이다.

혼자가 아닌 식솔을 거느린 가장의 슬픈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았다.

“몇 년을 버티지 못할 거야. 그렇게 되면 선수들에게 사기가 침범할 수 있어. 동시에 기를 받지 못하면 메달을 따는 데 힘이 들게 돼 있지.”

죽어서도 백성을 걱정하는 임금이었다.

“그러면…….”

“멀티를 돌려주게.”

“네? 머, 멀티요? 혹시 게임에서 나오는 그 멀티요?”

“맞네~. 그 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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