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3
회귀의 전설
383장. 한밤의 연회 (2)
“이대로 안 끝나! 더러운 놈들……. 감히 권력과 돈으로 날 매장하려고 해? 너희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어!”
선수촌장에게 코치 해임 통보를 받았다.
부촌장과 훈련본부장도 승낙했다.
그렇게 태릉에서 쫓겨난 허준원은 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로펌 변호사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까지 하고 나왔다.
오늘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않고 어떤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확약서였다.
“이걸 내가 언론에 터트린다! 한 번 X 돼봐라!”
허준원은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혼자 죽을 수 없었다.
장태산에 대한 사실을 적당히 포장하면 신문기자들이 알아서 기사를 쏟아낼 것이다.
그리고 뭣도 모르는 네티즌들이 화력을 집중할 건 뻔했다.
“흐흐흐.”
생각만으로 통쾌해진 허준원이 음흉하게 웃었다.
[우리 사랑은~♫ ]
그때 허준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 야!
다짜고짜 터지는 소리.
“다, 당숙…….”
뒤를 밀어줬던 5촌 당숙이자 국회의원의 전화였다.
- 닥쳐, 새꺄! 내가 왜 니 당숙이야! 요즘 같은 세상에 사촌도 멀어 인마!
화가 단단히 난 국회의원의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쩌렁쩌렁 울렸다.
“…….”
허준원의 입술이 위아래로 딱 붙어 버렸다.
- 너 누구 건들었어?
“네?”
- 아오! 내가 미쳐! 너 때문에 최고위원회에서 경고 먹었다. 이 새끼야 뒤지려면 너 혼자 죽어! 실력도 안 되는 새끼 뒤 봐줬다고 감사 들어온다잖아!
“헉!”
- 닥치고 고향에 가서 찌그러져 있어! 너 새끼야. 꼴에 남자라고 유부녀랑 바람도 폈어? 미친 새끼!
‘어, 어떻게 안 거야!’
허준원은 뒷골에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누군가 철저하게 뒷조사를 한 게 분명했다.
- 대한민국에게 곱게 살다가 뒤지고 싶으면 리앤장하고 그룹들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거 몰라? 이 뇌가 근육으로 된 새끼야!
욕을 퍼붓는 당숙의 목소리가 허준원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제야 장태산이 두려웠다.
나이 어린놈이 평범한 한국대생이 아닌 게 확실했다.
대형 로펌 이사와 그룹 회장의 보호를 받는 놈이었다.
- 썅! 앞으로 전화도 하지 마! 오늘부로 네 집안과 인연 끝났다!
뚝.
통화는 일방적으로 끝났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차 안에서 비명을 발작하듯 터트리는 허준원.
지금껏 쌓았던 모든 탑들이 우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 어떤 절망보다 뜨거운 바닥을 맛봤다.
***
포스가 장난 아니었다.
지금껏 만났던 귀신들과 차원이 달랐다.
명을 거역하면 당장 칼을 빼어 들 기세를 보인 내금위들.
무슨 귀신들 눈빛이 저렇게 살벌하고 강렬한지 미처 몰랐다.
어명 안 받으면 한 대 칠 기세다.
아직 귀신들과 맞짱 뜨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질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신 급에 이른 카르마 포인트 축적자였다.
미처 계산하지 못한 레벨 업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사극 영화 한 편 찍고 싶었다.
나도 모르는 귀신들의 세계.
“어의 장태산 어명을 받자옵니다!”
파아아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빛이 터졌다.
- 왕의 영역에 초청되었습니다.
- 신과 인간의 중간 영역인 중음(中陰)의 세계에 입장했습니다.
중음?
죽어서 보통 49일 동안 머문다는 그 중음의 세계.
특이하게 중음의 세계에 계속 머무는 존재도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 것 같았다.
“!!!”
빛이 사라지고 눈앞에 나타난 세계.
“여, 여기는!”
눈앞에 펼쳐진 장소는 놀랍게도 경복궁이었다.
완벽하게 복원된 조선의 왕궁에 와 있었다.
봄날 저녁이었다.
환하게 꽃무늬 등이 사방에 밝혀져 있었다.
형형색색의 봄꽃들이 화단에 곱게 심어져 있었다.
별이 총총한 하늘은 먼지 하나 없이 맑았으며 새로 단청한 왕궁은 깨끗했다.
소리 없이 줄을 지어 다니는 궁녀들이 보였다.
그녀들이 풍기는 지분 냄새와 스쳐 지나가며 나를 보고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실재하는 세상처럼 생생했다.
“어의 영감 뭐하십니까.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내시가 옆에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 복장도 바뀌어 있었다.
처음 입어보는 조선의 관복은 착용감이 편하고 신기했다.
정3품 당상의관이 착용한다는 홍포였다.
역사 기록들이 쭉 떠올랐다.
종3품부터 6품까지는 청포, 그 아래는 녹포로 관리의 계급을 구별했다.
아닌 밤중에 나타나 나에게 어의라 부르던 문정왕후 덕분에 진짜 어의가 됐다.
그러니 내시가 어의 영감이라 부른 것이다.
“가세나~.”
말투도 변했다.
하룻밤 꿈같은 일련의 사건이 재밌었다.
여러 일들을 겪어봤지만 오늘 같은 사건은 첨이었다.
솔로몬 왕의 궁전에 비할 바는 못하지만 우리 것이 좋긴 좋았다.
정감이 가는 기와와 담벼락은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전생에 초등학교 수학여행으로 갔을 때 봤던 경복궁과 많이 달랐다.
조선시대의 가장 화려한 시기의 궁전인 듯했다.
“따라오십시오.”
내시가 종종 걸음으로 앞장섰다.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시간은 현실과 같이 밤이었다.
산뜻한 저녁 봄바람이 불어왔다.
왕의 집무를 보는 근정전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보이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정자.
경회루였다.
중요한 사신을 접대하거나 왕이 신하들과 회식 장소로 사용했다는 경회루가 눈에 들어왔다.
멋들어지게 늘어진 능수버들이 초록으로 싹을 틔웠다.
따랑 띵 띵~♬
밝고 경쾌한 가야금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호수의 물도 맑았다.
간간이 수련이 피어 운치를 더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불빛이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게 환상처럼 보였다.
말로만 듣던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경회루 아래에 100여 명이 넘는 나인들과 내시들이 도열해 있었다.
내금위들도 사방에서 검을 찬 채 눈빛을 빛냈다.
“전하! 어의가 도착하였사옵니다!”
종2품 상선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내가 왔음을 알렸다.
“어서 올라오라 하라.”
“네이이~.”
와아……. 진짜 내시들 목소리 특이했다.
TV에서 변환해 듣던 음성 그대로였다.
“어의는 어서 오르게.”
나보다 계급이 높은 상선이 재촉했다.
가죽 신발을 벗었다.
나 말고도 찾아온 이들이 몇 명 있었다.
모두가 홍포를 입고 있는 고관대작들이었다.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경회루에 올랐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
온화한 인상의 잘생긴 중년 남자 한 분과 어여쁜 왕후, 그리고 초딩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상석에 앉았다.
붉은색에 황금실로 수놓아진 용포를 착용한 남자는 누가 봐도 왕이었고 옆에 중년 미부는 왕후, 그리고 아이는 세자가 확실했다.
명종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였던 중중과 이복형제인 인종을 떠나보내고 왕이 되었던 왕.
인종의 급사로 왕이 되어 어미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였다고 했다.
스무 살이 되어 친정을 했지만 문정왕후의 외척으로 인해 힘을 쓰기 힘들었다.
왕실 재정도 많이 어려웠다.
근정전만 남기고 홀라당 궁이 타버려 건축비가 상당이 들었다.
공신과 대신들에게 줄 땅이 부족해 직전법을 폐지했고, 을묘왜변으로 고생도 많이 했다.
나름 성군이 되고자 노력했으나 이른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던 그 왕이었다.
총명하고 문무에 재능이 뛰어난 왕이라 실록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난 불운의 왕이기도 했다.
하나뿐인 아들인 순회세자가 병으로 죽자 세상 허망함을 느꼈다는 명종의 치세는 짧았다.
지금은 눈앞의 세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 화목해 보였다.
같이 합장된 인순왕후 심 씨와 함께 강릉의 주인이 됐다.
그랬던 그가 생시처럼 눈앞에서 지금 활짝 웃고 있었다.
죽었음에도 죽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또한 멀쩡하게 살아서 웃고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었다.
명종과 눈이 딱 마주쳤다.
정순한 빛이 카르마 포인트 제대로 쌓은 것 같았다.
야사에는 친정 뒤에도 어미에게 매를 맞았다는 말이 있었는데 거짓이 확실했다.
눈에 강단과 패기가 넘쳐흘렀다.
“폐하! 어의 장태산, 어명을 받잡고 입궁하였나이다.”
허리를 바짝 숙이고 깊이 대례를 올렸다.
“하하. 어서 오라~ 어의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과인이 연회를 준비했노라.”
노고? 나를 위해? 무슨 노고?
여러 의문이 떠올랐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일단 받아들였다.
한밤의 귀신들과 함께 하는 연회는 나쁘지 않았다.
카르마 포인트를 듬뿍 사용했는지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매혹적이었다.
임금께 인사를 건네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어의.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인순왕후가 고귀한 목소리로 나를 치하했다.
기품이 넘쳤다.
“망극하옵니다.”
“아닙니다. 어머님께서도 매우 흡족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어의의 침술이 화타에 비견될 정도라 하셨습니다.”
김유나를 치료하는 모습을 봤던 문정왕후가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비견이 아니라 그 화타 밑에서 빡세게 일하고 얻어낸 능력이었다.
솔직히 화타가 죽은 자를 살릴 정도의 실력은 아니다. 중국인 특유의 허풍이 가미되었을 따름이다.
그래도 침술로는 따라올 자가 없을 것 같았다.
“세자는 할마마마의 뜻을 받들어 어의께 술을 올리도록 하라.”
“아바마마의 명을 받듭니다.”
열네 살에 죽었던 세자는 열 살 정도 돼 보였다.
볼 살이 통통하고 총명함이 넘쳤다.
문종이 기억하는 죽은 세자의 가장 어여쁜 시기였던 것 같다.
이 세자가 죽지 않았다면 조선왕조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무능한 왕인 선조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당파 이익에 눈먼 사림들에게 휩쓸리지 않고 부국강병한 왕국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문종 때 설치된 비변사는 충분히 기능을 했다.
다만 선조를 비롯해 윗대가리들이 문제였다.
과거나 지금이나 왕이나 대통령이 썩으면 국가와 국민이 힘들었다.
“어의는 제 잔을 받으세요.”
세자가 술병을 두 손으로 잡고 다가왔다.
“황공하옵니다. 세자 전하.”
쪼로로록.
황금빛 술이 잔에 채워졌다.
맑고 그윽한 주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임금이 내리는 어사주였다.
지금 사람들은 받을 수 없는 하사품에 기분이 좋았다.
김유나 고쳐주고 별 걸 다 받았다.
“어의는 어서 들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임금의 청에 술을 마셨다.
목젖을 타고 쭉 내려가는 황금주.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달콤하면서도 화끈한 맛이 일품이었다.
- 카르마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술이 아니라 포인트였다.
문종이 내린 포인트 맛이 기가 막혔다.
“어의가 왔으니 새로이 주안상을 마련하고 무희들은 흥을 돋우라!”
“예으이이이이.”
상선이 길게 답했다.
뚱따당 뚱땅~♫.
그리고 시작된 한밤의 연회.
선녀가 분명한 여인들이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나타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호호호호호…….”
풍악과 함께 술잔이 오갔다.
왕과 왕비의 유쾌한 웃음이 바람을 타고 경회루를 휘돌았다.
나도 포인트 주를 마음껏 마셨다.
그런데…….
새로이 올라온 이 주안상 많이 맛보던 맛이다.
“좋냐?”
그때 옆에서 들여오는 한 여인의 목소리.
깜짝 놀랐다.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고개가 나도 모르게 저절로 돌아갔다.
헐! 누님이 여기에 왜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