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2
회귀의 전설
382장. 한밤의 연회 (1)
‘저 자식 무슨 헛소리야!’
허준원은 장태산의 말에 쿵 하고 심장이 발등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리앤장 이사는 변호사니까 이해가 갔지만 TS 회장은 의외였다.
TV에서 봤던 그 회장이 확실했다.
그도 귀가 있었다.
얼마 전부터 TS 그룹에서 스키협회에 수십억을 지원한 걸 알았다.
현 스키협회 회장보다 더 영향력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체육회 감투는 제공하는 돈에 비례해 그 무게가 달라지는 법이다.
떠오르는 다크호스를 넘어서는 TS 그룹.
그런데 담당 직원이 아니고 회장이 직접 찾아왔다.
“제가 담당하는 고객님께 누군가 폭력 행위를 저질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요즘처럼 세상에 공무 집행 중인 국가대표에게 폭행이라니요? 그 용감하고 겁 없는 코치가 누굽니까?”
리앤장 이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깐깐하게 생긴 변호사가 쓱 좌중을 둘러봤다.
코치들이 자라가 목을 숨기듯 어깨를 가라앉히고 고개를 숙였다.
“고, 공무 집행 중은 아니지 않습니까?”
선수촌에 파견된 공무원이 나섰다.
“그건 검사님과 판사님이 판단하겠지만……. 공무가 맞습니다. 국가를 대표한 공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국가의 체계적 관리 및 수당을 받음으로 국가대표는 공무원입니다.”
일반 폭력 행위보다 처벌이 강력한 공무집행 방해.
공무원도 이 부분에는 입을 다물었다.
리앤장 소속 변호사가 공무중이라고 말하면 없던 공무도 생기는 게 대한민국이었다.
“회사 모델로 삼고자 제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장태산 선수를 폭행하다니요! 이렇게 되면……. 지금부터 일체 지원을 끊는 것은 물론 정신적, 회사 이미지적 손해에 대한 배상 신청을 진행하겠습니다!”
하관우 회장의 분노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선수촌장을 비롯해 징벌위원회 위원들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손해배상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언론에 이 사실이 노출되면 여론이 장난 아닐 것이다.
심심하면 터지는 국가대표 선수 폭행.
허준원 코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뭔지 모르지만 의도와 달리 판이 엄청나게 커졌다.
여유 있는 모습으로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장태산.
생각보다 상당히 위험한 놈이었다.
‘그래도 나에게는 당숙이 있으니…….’
허준원은 그 틈에도 잔머리를 굴렸다.
여당 국회의원 배경 정도면 이 순간을 무마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삐이이이.]
그때 징벌위원회 회의실 인터폰이 울렸다.
“무슨 일입니까?”
[문체부 차관님께서 급하게 촌장님을 찾으십니다.]
“연결하세요.”
삐잇.
[기 선배 접니다.]
“그래. 오 차관.”
기승표 촌장의 행시 후배가 문체부 차관이었다.
[혹시 선수촌에서 선수 폭행 사건이 있었습니까?]
“자네가 그걸 어떻게…….”
[조용히 빨리 처리해 주십시오. 윗선에서 불쾌해 하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말인가?”
[요즘 세상에 선수를 때리다니요! 당연히 코치 쪽을 정리하는 방향이죠.]
“알겠네.”
[장관님께도 보고가 됐으니 바로 보고서 올리셔야 합니다.]
신경질적인 차관의 전화가 짧게 끝났다.
기수로는 기승표가 선배였지만 전혀 봐주는 게 없었다.
“…….”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회의실.
공무원 안색이 새카맣게 변했다.
장관 선까지 알려졌다면 전모가 밝혀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허준원도 마찬가지로 얼굴이 굳어 풀리지 않았다.
차관급에서 코치를 정리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선수촌 코치 하나 잘려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들었나?”
“……마, 말도 안 됩니다! 실력도 안 되는 선수에게 훈계 좀 했다고 코치를 자르다니요! 이건 불합리한 처사입니다!”
허준원은 바들바들 떨며 부당하다고 말을 늘어놓았다.
요즘 들어 인생 꽃날의 연속이었다.
코치질로 돈 벌고 임자 있는 여인과도 꽃바람이 한창이었다.
지방에 있는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현금으로 지급되는 수당만으로 밀회를 즐겼다.
이런 마당에 정말 잘리면 개털 신세였다.
이 바닥에 소문이 나면 강사직도 박탈당할 수 있었다.
‘막아야 돼! 반드시!’
허준원이 다른 코치들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지원사격 요청이었다.
“맞, 맞습니다! 실력 없는 선수를 내보내야 합니다!”
“폭행 여부를 더 따져 봐야 합니다!”
“실력 없는 선수로 인해 코치가 잘리다니요.”
“다른 코치들의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러서지 못하고 바보 같은 코치들이 합창단을 꾸렸다.
자신들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있는 악마의 계략가를 몰라봤다.
“그래요? 그럼 간단하게 끝내죠.”
장태산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체력 측정해서 저보다 뛰어난 선수가 있으면 제가 군말 없이 퇴촌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여기 있는 코치님들……. 모두 선수촌에서 나가는 조건 어떻습니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버젓이 하는 장태산.
코치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그 말 책임지는 거지?”
허준원이 후다닥 미끼를 물었다.
“그럼요~. 코치님처럼 사기 같은 거짓말 잘 못합니다.”
으드득.
턱이 굳을 만큼 이를 가는 허준원.
“장태산 선수 의견에 다들 동의하십니까?”
로펌 변호사가 나섰다.
“전 찬성입니다.”
지분이 큰 하관우 회장이 받아들였다.
“그럼 저도……. 따라야지요.”
선수촌장도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코치들이 빼도 박도 못하고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결정된 긴급 체력 측정.
모두들 각자의 소망을 안고 대운동장으로 향했다.
***
- 어의를 뵙습니다.
앗! 깜짝이야!
밖으로 나오자 무관들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의가 직급이 높았다.
어느새 출근한 무관들이 선수들 곁에서 경호를 하거나 훈련을 지켜봤다.
여자 선수들은 나인들이나 상궁이 따라다녔다.
내 눈에만 보이는 설명하기 곤란한 이상한 광경.
하루 만에 신분이 어의로 상승한 나를 향해 귀신들이 오가다 경의를 표했다.
산 자나 죽은 자나 계급이 중요했다.
“후배님, 자신 있는 거야? 저쪽은 육상 애들 부른다는데?”
손대균 이사가 장난스럽게 물어왔다.
태릉에 하계 종목 대표팀도 남아 있었다.
동계 올림픽 종목 말고도 몇몇 팀은 남아서 구슬땀을 흘렸다.
“다 발라버릴 겁니다~.”
“그래서 내가 후배 좋아하잖아. 크크.”
손대균 이사가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바쁜데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야. 후배는 가장 큰 고객이잖아. 이사쯤 되면 한가 해. 전화 돌리는 게 일이야.”
“회장님도 귀찮게 해드렸네요.”
“무슨 소립니까. 장 대표님 일인데 바로 와야죠.”
가장 큰 패를 사용했다.
관을 직접 봐야 눈물을 흘리는 놈들이 세상에 많았다.
“이거 하관우 회장님~ 장 대표의 열렬한 후원자라더니 사실이었군요.”
“손 이사님도 아시잖습니까. 제가 장 대표님 덕분에 회장 됐습니다.”
“아,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알면서도 손대균 이사가 너스레 좋게 놀란 척했다.
지금도 손대균 이사의 자금을 계속 불려줬다.
더 이상 투자금 증액은 없었다.
다만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목돈을 안전비용으로 지불했다.
문체부 장관까지 움직였던 것은 손대균 이사의 힘이었다.
“저기 오는군요.”
운동장 주변으로 상당수 선수들이 보였다.
그리고 허준원과 몇몇 코치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육상 대표들 몇 명을 데려왔다.
선수촌장을 비롯해 여러 임원들도 다가왔다.
선수촌에 갑자기 분 내기 대결.
“크로스컨트리 스키로 판가름하기에는 시설이 없으니 간단하게 육상으로 결판내죠. 어차피 노르딕 스키는 체력이 관건이니 알맞을 겁니다~.”
지금 무슨 판을 까는지 전혀 모르고 허준원이 인심 쓰듯 말했다.
“장태산 선수 동의합니까?”
“넵!”
선수촌장의 말에 힘차게 대답했다.
“방식은 간단합니다. 여기 있는 선수들과 함께 15킬로미터를 달리면 됩니다. 지구력과 심폐력 측정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을 겁니다.”
허준원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허준원이 섭외한 육상 중장거리 선수들이었다.
몸매가 보기에도 날렵했다.
“다들 조금 전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손대균 이사가 확인 사살에 들어갔다.
“촌장의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기승표 촌장이 확약했다.
“그럼 몸 풀고 바로 시작하죠.”
육상 코치가 허준원과 눈빛을 교환하며 시작을 알렸다.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육상은 종목이 달랐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게 이만한 방법이 없다고 그럴싸하게 변명을 하는 코치들이 역겨웠다.
타다닥.
가볍게 바닥을 몇 번 뛰었다.
준비 끝!
“전 준비 다 됐습니다.”
“그래요? 그럼…… 시작하죠.”
그렇게 시작된 운명의 한판.
나는 트랙 출발선상에 섰다.
“오빠! 파이팅!!!”
그 순간 카랑카랑한 소녀의 힘찬 응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
“선배…… 저 남자 선수 알아요?”
“어? 어.”
오늘 핫 하게 선수촌에 소문이 퍼졌다.
겁 없는 선수가 코치에게 대들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긴급으로 선수징계위가 열렸다.
점심을 먹는 내내 화제가 됐다.
감히 다른 선수들은 꿈도 못 꿨던 반항이었다.
맞아도 참아야만 했던 선수들은 장태산을 불쌍한 희생양으로 생각했다.
누가 봐도 코치가 막말하고 손찌검까지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다.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갑자기 오후에 열린 체력 검정 테스트.
뭔지 모르지만 선수촌장님까지 나타나 심각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모든 선수들 스케줄이 종료 됐다.
촌장 명의로 선수들에게도 관람이 허락됐다.
장태산 사건에 김유나도 후배들과 구경을 나왔다.
김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오빠 파이팅’을 외칠 만큼 장태산이 편해졌다.
도리어 옆에 있던 여자 후배가 놀라서 물었다.
언제나 조신하고 조용하던 김유나의 다른 모습에 당황했다.
“대박! 선배님 다시 봤어요~.”
친한 여자 후배가 이상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저 뭐라고 안 했어요~ 흐흐.”
“이그!”
김유나는 후배에게 장난스러운 딱밤을 먹였다.
“출발!”
힘차게 울리는 촌장님의 목소리.
타다다닥.
그리고 운동장 트랙을 돌기 시작한 두 사람.
‘제발…….’
김유나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알게 된 지 하루밖에 안 됐지만 특별한 인연이 된 오빠 장태산.
그의 승리를 간절히 염원했다.
“어어! 저게 뭐예요!”
그때 후배가 놀라서 관람석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야? 지금 전력질주하는 거야?”
“이거 15킬로 아냐?”
“미친…….”
타다다닥.
상대 선수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부터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가는 장태산.
구경하던 선수들이 저마다 혀를 찼다.
누가 봐도 명백한 오버 페이스.
장태산의 패배를 모두 확신했다.
그리고…….
***
“뭐라고요? 누가 찾아요?”
한밤중이었다.
나는 선수촌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나의 오버페이스에 말린 선수들은 몇 킬로미터 뛰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물론 나는 상쾌하게 15킬로미터를 다 돌았다.
완주 후 확인한 육상 코치의 턱 빠진 넋 나간 모습.
약속대로 간단하게 코치들 몇 명을 퇴출시킬 수 있었지만 그놈만 방출했다.
다른 코치들은 개인적으로 고맙다고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 나를 절대 괴롭히지 않겠다는 서약도 받았다.
하루의 고단함 끝에 찾아온 저녁의 평화.
정신없던 하루를 마무리 하며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려한 복장을 착용한 내금위들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다짜고짜.
- 어의 장태산은 속히 어명을 받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