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1
회귀의 전설
381장. 선수촌에서 (3)
“흐음…….”
선수촌장 기승표는 신음을 흘렸다.
말이 좋아 선수촌장이지 년 단위로 자리가 바뀌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각종 대회에서 상당한 실적을 내지 못하면 당연히 자리가 바뀌는 명예직과 같았다.
아침저녁으로 선수촌을 돌며 시설을 점검하고 선수들을 격려했다.
그래도 부족했다.
오늘 같은 사건이 터지면 그나마 년 단위로 끊어지던 선수촌장 자리도 위험해진다.
배경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기승표는 선수들을 진심으로 아꼈다.
문체부 국장으로 퇴직 후 마지막을 장식할 공무였다.
그런 기승표는 간단하게 작성된 선수징벌 내용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입촌한 크로스컨트리 스키 국가대표 선수가 코치의 명령을 거부하고 항명했다는 내용이었다.
‘허준원 코치……. 그 사람이 사고를 쳤겠지.’
속내까지 허접한 선수촌장이 아니었다.
기승표는 행정고시를 통해 실력으로 문체부 국장까지 오른 엘리트였다.
특히 문체부 체육부분이 기승표 담당 부서였다.
직함에 비해 주어지는 권한은 없었지만 선수들과 코치들 성향을 파악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때부터 요주의 인사로 찍혀 있던 허준원.
친척인 여당 국회의원의 권력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걸 익히 알았다.
지난 정권과 달리 비리가 서서히 터지기 시작하는 현 정권.
공무원이었기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아진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대통령이 사기꾼이면 그 밑으로 고위직은 물론 말단 공무원까지 덩달아 썩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암암리에 함께 썩어 들어가 비리가 만연하게 되는 건 필연이었다.
다만 지난 정권의 영향으로 완전히 썩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최근 대통령 최측근들 사이에 돌고 있는 이상한 이야기들이 암암리에 흘러 나왔다.
말도 안 되는 포털 댓글 작업과 블랙리스트 작성 명령이 하달됐다는 수상한 얘기를 현직에 있는 친구에게 들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점점 썩어가는 대한민국.
이곳 선수촌도 예외 없이 오염돼 갔다.
체육회 관계자들 상당수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
자신과 다르게 체육계와 전혀 연관 없는 이들이 더 판을 치며 임원 행세를 했다.
실력이 출중하고 능력이 있어 전 정권에서 당당하게 승진한 이들도 줄줄이 낙마했다.
기승표 자신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다는 걸 알았다.
늦어도 동계 올림픽이 끝나는 순간 나가야 할 것이다.
“그전까지는…… 마음대로 안 될 거다.”
기승표도 문체부에 아직 친구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오늘 시시비비를 명백하게 따져 볼 생각이었다.
국가 대표가 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땀으로 자신의 인생을 걸고 스포츠에 매진해 온 이들이 국가대표였다.
생각이 이에 미친 기승표는 한 명의 국가대표를 위해 직을 걸 수도 있었다.
어차피 자신은 먹고 살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되는 연금받는 전직 공무원이었다.
자리를 붙들어야 하는 다른 이들과 입장이 달랐다.
삐이이이.
[촌장님 징벌위원회 위원들이 모였습니다.]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기승표.
손에 보고서를 쥐고 당당하게 밖으로 나갔다.
***
“오호~ 한국대생이라 그런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기세가 좋은데?”
“고매하신 분이 우리 같은 출신들하고 같겠어?”
“하긴 그렇겠죠. 그러니 더더욱 조용히 나가 주셔야지~.”
징벌위원회라고 별거 없었다.
코치들과 공무원 몇 명이 자리에 앉아 원숭이 구경하듯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징벌 위원 자격으로 합석한 코치들 상당수가 대놓고 나를 보며 이죽거렸다.
그새 소문이 쫙 돈 것 같았다.
“훗.”
품격 떨어지는 인간들을 보고 있자니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딱 봐도 자격지심이 쩔었다.
“저 새끼 또라이가 맞다니까!”
“지금 저 웃음 우리 비웃는 거 맞지?”
“와아아……. 한국대 놈들 역시 다르네.”
위원 코치들이 입 밖으로 막말을 나오는 대로 내깔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그런 그들을 보며 혀를 찼다.
“시작 안 합니까?”
내친 김에 먼저 선수를 쳤다.
“징벌 대상자는 조용히 계세요. 여기가 지금 어떤 자리라고 함부로 입을 놀려요!”
중년의 공무원이 근엄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가재는 개편이라는 말이 맞았다.
코치들과 짝짝꿍이 제법 잘 맞았다.
코치들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나에게만 핀잔을 줬다.
“인심 야박하네요. 여기는 물 한 잔도 안 줍니까? 점심도 안 주더니~.”
내 입장에서는 여유가 있었다.
여기가 이계였다면 깽판 부리기도 쉬웠을 것이다.
힘이 깡패라고 당장 아공간에서 창 한 자루 꺼내 휘저어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나같이 대한민국 법 때문에 목숨 부지하고 살아 있는 걸 몰랐다.
면면히 그들 얼굴을 뜯어봤다.
자리도 권력이라고 조금만 잘 나가면 날뛰는 무리들이 역겨웠다.
“미친놈, 왜 커피라도 한 잔 달라고 하지. 다들 보셨죠? 저 새끼 아주 근본이 안 돼 있는 놈입니다. 이 자리가 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는 겁니다. 아주 코치를 지나가는 똥개로 봤다니까요.”
어라? 뭘 좀 아는 거야?
허준원이 트집을 하나 잡았다 싶은지 발악을 했다.
스스로가 똥개라고 자폭까지 하면서 말이다.
“알긴 아네 보네…….”
조용하지만 모두의 귀에 쏙 들릴 정도의 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라고!”
허준원이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또 때리시게? 그래 때리셔! 때려!”
허준원의 성질을 자극했다.
“아오! 내 다시 또 한국대 놈들이랑 상종하면 허준원이 아니라 개준원이다!”
막장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이런 개판이 어울렸다.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는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 했다.
스르르릇.
그때 문이 열렸다.
“선수촌장님과 부촌장님 들어오십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공무원이 나팔을 불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앉아요.”
나이 지긋한 양반이 자리에 앉으며 쳐다보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선수촌을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인 선수촌장.
분위기만 봐도 허준원 같은 종류와 레벨이 달라 보였다.
파바밧.
그와 눈이 마주쳤다.
“긴급 선수촌 징계위원회 개시를 선언합니다.”
거두절미한 촌장이 조용하고 묵직한 음성으로 개시를 선언했다.
“…….”
좌중 분위기가 조금 전과 달리 진중하게 변했다.
촌장이 풍기는 무게감이 장난 아니었다.
“이름이…….”
“장태산입니다. 촌장님.”
“그래요 장태산 군. 만나서 반가워요. 선수촌장 기승표라고 합니다. 오늘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만나게 됐지만 동계 체전에서 보였던 뛰어난 실력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나도 사람 가릴 줄 알았다.
기승표 촌장은 성품이 여기 앉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라 보였다.
전형적인 공무원 관상이었다.
국가의 녹을 받아먹고 살며 편협한 사견에 치우침이 없는 호상(好相)이었다.
“그런데 보고서에 보니 지도자인 허준원 코치와 문제가 있었다는데 그 내용이 다 사실입니까? 선수가 코치에게 망발에 반항을 한다는 게 옳습니까?”
“그 내용을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사실이겠지만 저는 억울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거짓말입니다! 분명 자기가 누군지 아느냐고 건방을 떨었습니다. 그리고 제 조치에 대해 반항함은 물론 욕까지 내뱉었습니다!”
허준원이 침을 튀기며 말을 보태느라 여념이 없었다.
“진짜요? 제가요?”
그런 허준원을 보며 여유 있는 눈빛으로 물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은 덤이었다.
표정과 달리 눈빛에는 허준원을 약 올리느라 비웃음을 실었다.
“저, 저 눈빛 보십시오! 신성한 징계위원회 자리에서도 저렇게 저와 위원님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똥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더니 허준원이 딱 그 짝이었다.
나의 모든 행동과 말투 눈빛까지 다 불만이었다.
“맞습니다.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허준원 코치 손목을 꺾었습니다!”
“국가대표로서 품위를 잃은 행동이었습니다. 훈련장에 있던 다른 선수들에게 스트레스를 줄 정도였습니다. 오늘 사건으로 인해 선수촌의 평정이 깨졌습니다!”
“즉각 퇴촌과 국가대표 자격 박탈을 건의 드리는 바입니다!”
코치로 구성된 위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에 담았다.
“흐음…….”
속에서 흘러나온 신음을 삼키는 기승표 촌장.
“촌장님……. 상황이 명백하니 이번 일은…….
부촌장이라는 작자가 실눈을 뜨고 나를 한 번 흘겨보더니 촌장을 공략했다.
눈빛으로 빨리 나를 제거하라는 싸인을 보내는 것 같았다.
“허준원 코치님이 먼저 어린놈이 빠졌다느니 특혜를 받았다느니 하는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정확한 근거를 요구하자 건방지다며 다짜고짜 뺨을 때렸습니다. 지금도 손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내공을 사용해 싸대기 맞은 자리에 열감이 오르도록 만들었다.
“그건 저 녀석이 건방지게 반항하기에 교육자로서 훈육 차원에서 한 대 친 것뿐입니다!”
허준원이 반박했다.
“뺨을 때렸다구요?”
기승표 촌장이 핑계 대는 데 열을 올리는 허준원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맞습니다. 촌장님. 훈련을 버티지 못하는 선수들에게는 매도 동기부여가 될 수 있습니다.”
“선수촌 관행 중 일부분입니다.”
코치들을 비롯해 공무원들도 합세해 허준원 감싸기에 나섰다.
코치가 선수 때리는 게 관행이란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인간들이 천지다.
“관행이라도 어린 선수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 촌장님 멋져!
“촌장님. 징벌 위원회는 다수결로 결정됩니다. 장태산에 대한 퇴촌 결정을 투표에 붙였으면 합니다.”
부촌장이 촌장을 깠다.
뭔가 뒤가 있는 놈이 분명했다.
본인이 보내는 사인이 먹히지 않자 대놓고 겁박하는 걸로 보였다.
“맞습니다! 이건 선수촌 단합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선수촌 규율에 의거 바로 투표를 진행하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러고 촌장의 힘이 약했다.
촌장의 말에 동의하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코치 위원들이 짝짝꿍해 모두 반발했다.
스르르릇.
“아이고 제가 좀 늦었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 훈련본부장님 어서 오십시오.”
공무원이 훈련본부장이라는 남자를 맞이했다.
“오다가 차가 막혀서…….”
막힌 도로 핑계를 대며 훈련본부장이 넉살을 떨며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회의장을 쭉 둘러봤다.
“어? 자네는……. 자네가 왜 여기에?”
본부장이 나를 아는 눈치다.
깜짝 놀라는 표정이 정말 당황한 것 같았다.
“오늘 징계 대상자입니다.”
공무원이 사무적으로 나를 설명했다.
“자, 장태산 군이 징계 대상자라고요!”
훈련본부장이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앉았던 자리를 박차고 스프링처럼 다시 일어섰다.
급기야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린 훈련본부장.
“무슨 문제 있나?”
부촌장이 그런 본부장의 태도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이런 사건이 있다면 바로 말씀해 주셔야죠!”
훈련본부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뭐라고?”
상관인 부촌장이 어이없다는 듯 따져 물었다.
스르르르릇.
그때 또 빠르게 문이 열렸다.
누군가 다급하게 들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뭡니까! 외부인 출입 안 됩니다!”
공무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서는 사람을 가로막았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 개판이 돼가고 있는 듯한 분위기.
“아이고! 회장님!”
들어서는 일단의 무리를 향해 앞을 막아선 공무원보다 더 빨리 튀어나가는 훈련본부장.
그의 입에서 회장님 소리가 터졌다.
아예 먼저 고개를 숙이고 난 뒤 인사를 하는 수준이었다.
굳이 그 무리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선수촌장이 얼굴이 달아오른 채 들어서는 이들의 정체를 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리앤장 로펌 이사 손대균입니다.”
“리, 리앤장!”
리앤장이라는 말에 자리에 동석해 있던 이들 모두가 경악했다.
대한민국 성인 중에 리앤장을 모르면 간첩이었다.
그들을 잘못 건들면 뼈도 못 추린다는 걸 일반인들도 알 정도다.
“TS 그룹 회장 하관우입니다.”
“T…… S 회장님이 왜…….”
“으으으.”
코치들 얼굴이 당황스러움에 벌겋게 물들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정황상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귀한 분들이 오셨습니디만……. 무슨 일로?”
그나마 선수촌장 한 사람만은 여유가 있었고 정신이 온전했다.
“제가 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