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8화 (377/1,284)

 # 378

회귀의 전설

378장. 이상한 나라의 귀신들과 선수들 (3)

‘시원해…!’

김유나는 깜짝 놀랐다.

무엇에 홀린 듯 처음 본 사람에게 침 치료를 허락했다.

엄마나 코치님이 곁에 있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사건이다.

과거에도 몇 차례 침 치료를 받아본 경험은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자칭 오빠라는 한국대생은 분명 전문 한의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김유나는 치료를 허락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마음과 달리 자신의 목을 움직인 것처럼 말이다.

한국대생 국가대표 장태산은 트레이닝복 상의에서 거짓말처럼 침을 꺼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범용 침이 아니었다.

그는 스케이트를 정말 조심스럽게 벗겼다.

김유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10년이 넘는 연습과 선수 생활로 발가락은 보기 흉하게 기형이 되었다.

김유나가 가장 감추고 싶은 신체 부위이자 드러내고 싶지 않은 한 여성으로서의 아픔이었다.

장태산은 제멋대로인 발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소중하게 김유나의 발을 다뤘다.

손수 양말까지 벗기고 정성스럽게 침을 꽂았다.

따끔하게 침이 꽂인 그 순간 고통이 사라졌다.

쑥쑥 아리던 발목 부근의 열이 식으며 시원해지더니 서서히 붓기가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실로 놀라운 침술이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표정이 왜 그래?’

갑작스런 장태산의 도움으로 김유나는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정작 장태산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꾸 김유나의 눈치를 보는 듯 안절부절 못했다.

“저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김유나는 통증이 가라앉자 마음이 편해지면서 호감이 갔다.

오늘 이 사람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적절한 타이밍에 장태산의 도움이 없었다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게….”

말을 하려다 말고 괜히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 장태산.

“왜요? 무슨 일이죠?”

고통이 잦아들자 이상하게 시선을 자꾸 피하는 장태산의 모습에 김유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세상 모든 것에 한창 관심이 많을 나이였다.

특히 이렇게 늦은 밤에 찾아와 도움을 준 낯선 오빠는….

***

- 어의는 어서 시술하라. 김 씨 처자는 병이 중하다. 자칫 치료시기를 놓치면 평생 고생할 수 있다.

젠장, 왕후가 직접 내려왔다.

보통 귀신보다 훨씬 레벨이 높은 문정왕후.

죽어서도 풍기는 자연스런 위엄이 장난 아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광경이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문정왕후 뒤로 약 100여 명에 이르는 상궁과 나인들이 바람을 타는 연처럼 도열해 있었다.

일반 귀신들 같았다면 무섭거나 소름이 끼쳤겠지만 왕후는 기가 달랐다.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가 있고 매서운 강단이 보였다.

유명한 조선 유생 사림들을 다이다이 떠서 떡실신 시킨 여장부다웠다.

그런 왕후가 나에게 김유나의 치료를 재촉했다.

“마마. 남녀가 유별하여 치료를 함에 있어….”

- Shut Up!

뭐, 뭐라고?

문정왕후가 입이 걸다.

“!!!”

당황하고 놀라지 않으면 그게 이상했다.

김유나는 이런 나의 처지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입을 열지 않고 생각을 일으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런 내 귓속을 파고드는 왕후의 찰진 영어.

- 요즘 같은 세상에 고리타분하게 무슨 유별이더냐! 내 이곳에서 수없이 봤도다! 남녀들이 만나… 능 가까이까지 침범해… 사랑을…. 큼큼.

아오! 도대체 선수들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문정왕후가 얼굴을 붉혔다.

나도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

“괜찮아요? 얼굴을 보니 열이 나는 것 같은데….”

김유나는 사정도 모르고 날 걱정스럽게 봤다.

그녀는 직접 보니 참 맑게 생겼다.

전혀 이성으로 보이지 않았다.

전 국민이 사랑했던 국민 여동생은 흔히 볼 수 있는 미녀들의 얼굴은 아니었다.

당장 FOB 멤버들과 비교해도 미모는 밀렸다.

하지만 풍기는 후광이 남달랐다.

놀라면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토끼처럼 바뀌는 표정이 압권이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선한 기운은 모든 이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쌍둥이 여동생 같았다.

오빠라 부르며 날 구박하기도 하고 잘 따르기도 하는 여동생.

김유나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빠가 보기에 너 지금 엄청 안 좋다.”

“네?”

“침으로 일단 통증을 눌러놨지만 그대로 놔두면 고질병 된다. 과거부터 허리 쪽이 안 좋았지?”

“…….”

김유나가 말을 못했다.

“잠깐이면 되는데 치료 받을래?”

“치료요? 여기서요?”

“침 뽑고 잠깐 발 마사지를 할 거야. 괜찮겠어?”

“아, 마사지요….”

김유나는 스케이팅만 타던 소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리 오빠라 해도 낯선 남자의 손길은 두려울 것이다.

“오빠한테 네 또래의 쌍둥이 여동생이 있어. 내 동생 같아서 그래.”

안 믿겠지만 지극히 순수한 오빠의 마음으로 한 말이다.

김유나는 앞으로도 계속 만인의 여동생으로 남아야 했다.

그녀를 통해 희망을 보는 수많은 국민들.

김유나의 맑은 눈동자가 날 바라봤다.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선한 꽃사슴의 눈망울 같았다.

“오, 오빠만 괜찮다면… 저도….”

스케이팅 탈 때는 모든 이들 앞에서 당당하기만 하던 김유나가 얼굴을 붉혔다.

오빠란다!

이거 하나면 됐다.

세상에 김유나에게 오빠 소리 들은 남자 세상에 몇 명 없다.

틱! 틱! 틱!

빠르게 침을 뺐다.

침은 기사회생의 요법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치료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탕약을 비롯해 여러 가지 방법이 같이 수반되어야 완벽하게 그 효능을 본다.

“윽!”

크게 아프지는 않지만 침을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인 법.

김유나가 귀엽게 표정을 구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작한다.”

김유나의 발을 잡았다.

안마 핑계로 조물딱거릴 필요가 없었다.

내공을 운용했다.

눈을 감고 기감을 끌어 올렸다.

삔 부위가 가라앉은 상태였지만 죽은 피가 여전히 김유나의 몸속을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땀이나 소변으로 배출되겠지만 지금 상태는 아니었다.

계속 운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그렇게 되면 사혈(死血)이 돌아다니면서 계속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김유나의 용천혈에 기를 불어 넣었다.

움찔 떠는 김유나.

누가 봐도 오해하기 쉬운 장면의 연속탄이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따뜻한 기운이 빠르게 김유나의 몸에 침투했다.

“절대 움직이지 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김유나.

발바닥이 꽤 뜨거울 텐데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강심장다웠다.

그리고 최대한 나는 치료에 몰입했다.

지금껏 풀어내지 못하고 쌓아놓은 김유나의 정체된 탁기가 장난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 같았다면 몇 달 입원해서 물리치료를 받았어야 할 정도였다.

국민의 희망을 양 어깨에 얹고 살아가고 있는 김유나.

이 고통을 참고 지금껏 그렇게 빙판 위를 가르며 날았던 것이다.

그녀는… 진정한 대한민국 국가 대표였다.

***

“일어나… 요.”

뭐라고? 일어나?

아침이 밝았다.

어젯밤 김유나의 치료는 무사히 마쳤다.

기를 사용해 그녀의 고질병을 치료해줬다.

하지만 곧 재발할 걸 알았다.

꽉 죄인 날선 스케이트 신발 자체가 허리와 다리를 병들게 만들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빙판 위를 날아야 하는 김유나에게 타박상은 일상이었다.

신이 아닌 이상 빙판 위를 수없이 뒹굴 것이다.

특히 냉기 가득한 빙판이다 보니 쉬이 나을 수 없다.

그렇다고 매일 찾아가 침을 꽂고 기 치료를 할 수는 없었다.

사방에 보는 눈이 많았다.

과거 생에 그녀의 남자친구라는 이유로 한 명의 사내가 처참하게 무너진 걸 똑똑히 봤다.

그런 사실을 알고도 김유나와 가까이 하는 건 위험했다.

조용히 메달 따고 군 면제 받아야 할 내 계획과 맞지 않았다.

“어젯밤에 뭐했습니까? 10시 이후 취침이라는 거 모릅니까?”

“첫날이라 구경 다녔습니다.”

“……진짜 팔자 좋습니다.”

룸메이트 조영준이 툴툴거렸다.

나를 태릉 처음 와본 촌놈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난 어제부로 김유나의 오빠가 됐다.

김유나를 치료해 주고 곧장 숙소 방으로 돌아왔다.

피곤했던지 조영준은 잠을 자고 있었다.

아니 자는 척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깨우지 않았다.

어차피 아직 그와 그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뭐합니까? 이 새벽에?”

11월의 아침은 해가 늦게 떠올랐다.

이제 붉은 기운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는데 조영준은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조조훈련 몰라요?”

“조조요?”

조조영화도 아니고 무슨 조조?

“진짜 몰라요?”

“네.”

“……하아.”

한숨을 쉬며 조영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침 6시에 비가 오지 않는 이상 전부 대운동장에 모여 조조훈련합니다. 그게 태릉 전통입니다.”

“뭐라고요? 6시에요?”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진짜 누군지 몰라도 너무했다.

고리타분한 체육계 인사들이 문명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했다.

군대가 생각났다.

아침 나팔 소리에 강제로 깨어나야 하는 고난의 시절.

자율권 없는 조직생활은 그걸로 충분히 됐다.

자리에서 일어나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래도 국가대표들 옷이라고 운동복 상태는 좋았다.

어느새 조영준은 사라지고 없었다.

느긋하게 대운장으로 향했다.

타닥 타다다닥.

그 와중에 그새 가볍게 뛰며 조깅하는 국가대표들도 구경했다.

흐뭇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쟤야?”

“와아아…. 진짜 잘생겼네.”

“한국대생이래.”

“으힝! 완전 내 이상형이야. 오늘 대시해 볼까?”

운동장에 줄을 섰다.

오랜만에 서보는 줄에 감개가 무량했다.

그 틈에도 여자 국대들이 사방에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들의 시선에는 신경을 거뒀다.

아침에는 귀신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모두 차렷!”

그리고 시작된 새벽 조조훈련.

선수부단장이라는 양반이 가볍게 훈시를 했고 국가대표들은 각자 팀을 이뤄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수백 명 선수들이 줄을 지어 뛰는 광경은 괜찮았다.

뭔가 하나가 된 느낌?

소속감이 진하게 밀려왔다.

그렇게 시작된 본격적인 국가대표 선수 일정 1일.

대신 사방에서 느껴지는 적개심의 무게가 묵직하게 전해졌다.

뭔지 모르지만 제발 조용히 살고자 하는 나의 간절한 희망을 꺾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많이 먹어요~.”

“넵! 감사합니다!”

아침 운동이 끝나자 바로 조식이 이어졌다.

세수를 하고 식당에 들어갔다.

식단이 대단히 알차고 풍성했다.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튀김과 치킨에 샐러드와 생선 요리까지 수십 가지가 넘는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뷔페식으로 차려졌다.

눈이 마주친 식당 이모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밥을 떴다.

아침 운동이 식욕을 돋웠다.

식재료들도 신선했고 요리 수준도 괜찮았다.

접시 위에 밥과 제육볶음 샐러드, 야채를 듬뿍 담아 자리에 앉았다.

밥 한 톨 남김없이 싹 비울 수 있었다.

국위선양을 위해 국민들이 십시일반 걷어서 낸 세금으로 차려진 밥상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운동을 해서 그런지 허기가 확 밀려왔다.

조용히 한 술 뜨려는 찰나.

탁.

비어 있던 내 앞 자리에 누군가의 접시가 가볍게 놓였다.

수저를 든 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딱 마주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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