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
회귀의 전설
375장. 그분들 (2)
‘이 자식은…. 뭐 이렇게 놀라? 내 인상이 그렇게 안 좋아?’
크로스컨트리 국가대표 조영준은 인사를 하다말고 당황했다.
너무 놀라는 룸메이트를 보고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동계 올림픽 비인기 종목 국가대표는 선수촌 내에서도 찬밥이었다.
당신의 흘린 땀이 모두 다 금메달리스트라는 선수촌 표어가 무색했다.
차별은 생각보다 심했다.
스피드나 쇼트트랙 같은 메달 가능성이 높은 종목은 코치부터 시작해 협회나 선수촌의 지원이 아낌없었다.
그에 반해 크로스컨트리 선수들은 제대로 연습할 시설이나 별도의 경기장이 없었다.
노르웨이처럼 설원이 있는 국가의 원정훈련은 꿈도 못 꿨다.
매일 반복되는 달리기 같은 체력훈련이 프로그램의 전부였다.
이 종목 특성상 강철 같은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했지만 그럴 만한 여건이 안 됐다.
북유럽 선수들과는 신체 조건부터 달랐다.
바이킹 후손들답게 노르딕 스키 쪽은 그들이 휩쓸었다.
전문 코치가 있을 리 없었다.
코치도 선수 출신이긴 했지만 이렇다 할 경기 기술이 없었다.
그저 아침 일찍 일어나 근육을 키우고 지구력을 높였다.
메달을 기대하지 않는 종목이어서 선수촌에서도 기대를 덜 갖는다는 것 한 가지가 편했다.
하지만 타 종목 선수들이 은연 중 무시하는 걸 감내해야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차별이었다.
유망 종목 선수들은 선후배 관계도 엄격하고 선수층도 다양해 훈련이 덜 힘들었다.
그러나 노르딕 쪽은 그렇지 않았다.
학교도 다르고 선수층도 얇아 선수들 간에도 인사만 겨우 나눴다.
국가 대표도 겨우 몇 명밖에 없었다.
선수촌 숙소에서도 가장 안쪽 끝 방에 배정이 됐다.
“귀신이라도 본 표정입니다? 제가 그렇게 당황스럽게 생겼습니까?”
올해 스물다섯의 조영준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방 안에 들어서며 물었다.
“하, 하하…. 그러니까요. 제, 제가 그랬습니까?”
녀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성격은 괜찮은 것 같은데….’
웃는 표정이 선했다.
조영준은 이미 룸메이트를 알고 있었다.
지난 2월 동계 체전에서 대학부 금메달을 딴 한국대생.
당시에도 선수들 중 가장 몸매가 좋고 외모가 눈에 띌 만큼 출중해 기억했었다.
출전 종목은 달랐지만 실력이 워낙 월등해 눈여겨봤다.
본래 출전권이 남녀 1장씩이었지만 갑자기 올림픽위원회에서 남자 1명을 더 배당했다.
그럼에도 선수가 부족해 계주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 와중에 등장한 실력자가 저 한국대생이었다.
프리 스타일이 힘든 주법이었다.
끊임없이 다리를 움직여 15킬로를 질주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 37분 초반 대를 끊었다.
코스 난이도가 쉬웠다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됐다.
한국 크로스컨트리의 역사를 바꿀 신예의 주인공이었던 한국대생.
“조영준입니다.”
“장태산입니다.”
조영준이 먼저 손을 내밀며 어색한 첫 만남을 털어내듯 악수를 청했다.
그 와중에도 장태산의 시선은 조영준 너머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영준의 장태산의 시선을 따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뒤를 돌렸다.
***
이분은 또 뭐야?
조영준과 함께 등장한 한 남자.
분명 산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 많은 잡귀나 귀신도 아니었다.
또 신이라고 단정하자니 뭔가 어설펐다.
행색으로 보아 카르마 포인트가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목적이 있어 조영준을 따라 다니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복장이 매우 독특했다.
사극에서나 등장하는 조선시대 무관들의 복장이었다.
아청색(鴉靑色)의 옷감이었다.
병졸은 아니고 품계를 받은 정식 무관 같았다.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로 짐작됐다.
선이 굵은 얼굴에 호남형의 얼굴이었다.
머리에 쓰고 있는 전립과 허리에 차고 있는 환도가 제법 그럴싸했다.
그런 그가 조영준을 호위하듯 뒤따라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
살아 있는 내가 자신과 눈빛을 맞추자 깜짝 놀라는 그, 아니 귀신.
“뭡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태산 씨 사람 놀려요?”
덩달아 뒤를 돌아본 조영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나한테 보이는 걸 어떡하라고?
“제가 가끔 이럽니다. 하하하.”
어색하게 웃음으로 때웠다.
“참나….”
한심하다는 듯 조영준은 갈아입을 옷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무관 귀신은 처음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조영준을 따라가지 않았다.
나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 그.
“뭡니까?”
아쉬운 놈이 우물을 파는 법이다.
내가 먼저 운을 떼고 물었다.
- 내가 보이느냐?
“그럼 내가 지금 누구한테 말하겠어요?”
- 박수냐?
격 떨어지게 박수라니. 내가 무당인 줄 안다.
“내가 누군지 모르죠?”
- 넌 누구냐?
미래에 신이 될 자를 몰라보는 무관 귀신.
요즘은 상급 신으로 초빙하려고 작업도 들어왔다.
“그러는 아저씨는 누굽니까?”
- 난 금군 우림위 종8품 교련관 조경록이라고 한다.
“네? 우림위요?”
우림위라는 말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조선시대 군대 조직표.
내금위, 겸사복과 함께 궁궐 수비와 임금 호위를 맡고 있는 금군 소속 3위 중 한 곳이었다.
특이하게 양반이 아닌 서얼들 중에서 뽑아 임금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었다.
우림위 최고 벼슬은 정3품 우림위장이었다.
- 우림위를 아느냐?
“당연하죠. 금군 소속 아닙니까.”
- 넌 그나마 우리를 아는구나.
“그런데 이곳에서 뭐하십니까? 보아하니 이미 이승의 명이 다한 분 같은데 갈 길 가셔야죠. 그게 이승과 저승이 정한 법칙….”
- 무엄하다! 지엄한 왕명을 받는 몸에게 함부로 입을 놀리는구나!
“와, 왕명요?”
이건 자다가 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리란 말인가.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왕명?
- 난 폐하의 어명을 받잡고 일을 진행하는 중이다!
쩌렁쩌렁 공간이 울렸다.
그래봤자 다른 사람들은 못 느끼고 나에게만 천둥처럼 들렸다.
“아니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왕명하고 여기 선수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파아아아앗.
그 순간 갑자기 주변 공기에서 느껴지는 상스러운 서기.
발밑에서 시작해서 창문 밖 산까지 에워싸며 낯선 기운이 넘실거렸다.
- 잠자던 왕이 깨어났습니다.
- 이 구역은 이승의 명이 끝나지 않은 왕의 영역입니다.
- 카르마 포인트를 사용해 왕을 신으로 만드시겠습니까?
갑자기 울리는 알림음.
무슨, 왕이 깨어났다고 했다.
영화 ‘미이라’도 아니고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아!”
그때 갑자기 떠오른 이 지역의 지명.
“설마…. 명종?”
- 무엄하다! 감히 폐하의 휘호를 망령되이 입에 올리다니!
차앙!
칼을 뽑아드는 조경록 무관.
이제야 확실히 알아챘다.
태릉은 중종의 왕후이자 조선시대 수렴청정으로 뭇 양반들을 기죽였던 여장부 문정왕후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문정왕후는 중국의 측전무후와 비교될 정도로 강단이 넘쳤다.
신하들에게 수시로 휘둘렸던 중종과 달리 문정왕후는 당시 엘리트였던 사림파를 찍소리 못하게 눌러버렸다.
훈구파와 달리 고지식했던 사림파들은 문정왕후 사후에도 그녀를 욕했다.
자신들을 지배했던 지적인 영역에서 격파당했다.
자존심 때문에 정치적 식견이 뛰어난 문정왕후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문정왕후를 누구도 멸시하지 못했다.
왕보다 강했다.
문정왕후의 삶을 살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구한 팔자였다.
세자였던 인종을 보살피려 윤임이 왕비 자리에 올려놓았다.
사랑하는 왕비가 따로 있는 중종의 곁에서 힘들게 살았다.
당시 궁궐에 수시로 피바람이 불었다
중종 때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은 끝을 달렸다.
딸만 낳아 목숨을 저당 잡히고 살았던 문정왕후는 피나는 노력으로 정치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끝내 그녀는 왕자를 낳았고 그가 후에 문종이 됐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권력욕은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대단했다.
효자였던 인종을 스트레스로 일찍 죽게 만들었고 그의 아들을 왕의 자리에 앉게 만들었다.
그녀의 정치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을사사화를 일으켜 싹쓸이 한판으로 권력을 잡았다.
깡 좋게 숭유억불 정책을 무시하고 불교를 장려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죽고 나서부터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가족의 부정부패를 제대로 막지 못했다.
그런 문정왕후가 묻혀 있는 태릉 옆이 바로 명종과 그의 아내 인순왕후 무덤인 강릉이었다.
아마도 조경록은 죽어서도 임금을 호위하는 무관의 업을 지고 있는 듯했다.
알림음은 거짓말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 칼 내려놓으세요. 저 화나게 하면 사자 부릅니다!”
- …….
사자라는 말에 조경록이 기세 좋게 뽑아들었던 칼끝이 파르르 흔들렸다.
왕명이고 뭐고 저승사자 앞에서는 아웃이었다.
“절 모르시나 본대. 저 하늘 위에 여러 신선들과도 친분이 두텁습니다. 어중이떠중이 박수무당으로 보면 큰 코 다쳐요~.”
귀신에게 협박도 했다.
당장 포인트로 귀신과 싸울 수 있는 검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조경록과 레벨 차이가 꽤 났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산목숨이지만 죽어서 미래 신선 자리 따 놓은 사람이었다.
- 다, 다시는 무엄한 망발을 뱉지 말도록 하라!
“네네~ 새겨듣겠습니다.”
귀신하고 싸워서 뭐하겠는가.
죽어서도 임금을 떠받들며 충성을 다하고 있는 조경록의 비위를 맞춰줬다.
내친 김에 그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런데 교련관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 물어보라.
귀신이나 신선이나 포인트 부족한 상대를 등치는 건 쉬웠다.
조금만 잘해주면 다들 무장 해제가 됐다.
“어명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곳이 왕께서 머물고 계시는 곳이라지만 엄연히 생사의 법칙이 적용되는 이승인데….”
- 흐음…. 그게 궁금하면… 날 따라오라.
“어디를 말입니까?”
- 너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겠노라. 어차피 너와는 대화를 많이 나눠야 할 것 같구나.
저벅저벅.
어느새 칼집에 칼을 다시 꽂아 넣고 조경록 교련관은 휘적휘적 앞장을 섰다.
물론 문을 그냥 통과하는 기술은 기본이었다.
갑작스런 사태였지만 이런 일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스윽스윽.
귀신들처럼 공간을 압축해 빨리도 이동해 갔다.
마음 같아서는 나 또한 내공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이곳은 평범한(?)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선수촌.
조용하고 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늦은 시각에 입소했던 터라 어느새 밤은 많이 깊어 있었다.
터덕터덕.
하지만 아직도 운동이 고픈 선수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축구장이 있는 대운동장 주변에는 시간이 늦었음에도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어!”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 보이느냐?
“저분들은 다 누굽니까?
- 누구긴 누구야. 금군 소속 내금위와 겸사복, 우림위들이 아니더냐.
“그러니까! 저분들이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그들은 이런 날 보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내 눈에만 보이는 광경.
뛰고 있는 선수들 사이사이에 섞여 구령을 하거나 지켜보거나 같이 뛰는 각종 무관 귀신들.
- 코치들이다.
“네? 코, 코치요?”
귀신도 참신한 헛소리를 잘 한다.
저 선수들 사이에서 뛰고 있는 귀신들이 코치란다.
- 저들은 교련관들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저 선수들은 모두 자랑스런 이 땅의 후손들! 폐하께서 명하시여 저들을 잡귀와 사기로부터 보호하는 게 우리들의 임무니라.
“!!!”
세상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비사였다.
태릉선수촌 선수들을 보호하는 왕릉의 무관들.
이런 게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 순간 나만 알았다.
그러고 보니 룸메이트 조영준과 무관 조경록의 성이 같았다.
아! 보이지 않는 카르마와 인연의 법칙이여!
다시 한 번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춰진 비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윽 스윽.
그때 조경록의 걸음이 다시 옮겨졌다.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훅훅….”
선수들이 뛰면서 거친 숨을 내뿜었다.
여전히 그들과 함께 뛰는 무관 귀신들.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의외로 보기 좋았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일 것이다.
그들의 열정적인 노력 뒤에는 이 땅의 혼령들이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는….”
조경록을 따라 들어간 어느 건물.
- 쉿! 왕후마마께서 계신다.
왕후마마? 어디?
촤아아아아앗.
차가운 빙판 위를 시원하게 가르는 날카로운 스케이트 날 소리가 들렸다.
내 눈에 들어오는 환상적인 광경 하나.
한 마리 어여쁜 나비가 사뿐하게 얼음 위를 날아오르고 있었다.
“헛! 퀴이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