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
회귀의 전설
373장. 선수촌 (2)
“아무리 한국대생이라도 특혜 주면 안 되지~ 그렇지 않습니까?”
“맞아요! 한국대가 언제부터 올림픽입니까. 그게 머리로 됩니까?”
“내 말이요. 그것도 법대생이 하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우리 동양인 신체 조건으로는 안 돼요. 그런데 특혜까지 주면 나중에 언론에 우리만 얻어맞아요.”
“뭐, 동계 체전에 기록이 있지만 그 날 운이 좋았던 겁니다. 그 능력으로는 메달 못 따요. 요즘은 다들 37분대 찍어요.”
“확실하게 선수촌 입소해서 대표답게 훈련하든가 그게 아니면 공부나 하라고 하십시오.”
“이건 체육인에 대한 도전이자, 무시입니다!”
대한체육회 산하 동계 올림픽 선수선발위원회 이사 위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었다.
구성원 대부분이 선수 출신이었다.
모두 자존심이 상했다.
아직도 사람들은 체육인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이 많았다.
한때 아시안게임 금메달만 따도 영웅시하던 분위기는 점차 사라졌다.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 정도는 따야 인정받는 추세였다.
과거와 달리 먹고 살만 해지니 스포츠를 취미 생활 정도로 생각했다.
축구는 월드컵 16강 안에 들어야 환호했고 아시안 게임 금메달은 무시받기 일쑤였다.
오랜 시간 선수들이 흘린 땀방울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들은 드물었다.
대부분 선수들이 연금 100만 원에 목숨을 걸었다.
미래가 잘 풀려야 학교 코치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인기 종목이 아니라면 일찌감치 운동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 먹고 살 수 있었다.
특히 동계 올림픽은 피겨나 스케이팅 부분을 빼고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동안 암암리에 쌓인 불만과 깊은 한이 임자를 만난 듯 표출됐다.
“위원장님, 이 건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잘못하다가는 올림픽 출전 전에 선수들 사기가 저하될 수도 있습니다!”
“학업 때문에 선수촌 입소를 못하다니요! 동계 올림픽이 겨우 석 달 남았습니다. 이건 일방적인 편의입니다.”
“체육회 회장님께 강력하게 건의를 드려서….”
“아 됐어요. 선수 불렀습니다.”
“네?”
“코치인 한국대 서준호 교수를 통해 선수 소환했습니다.”
“역시 위원장님이십니다!”
“그래야지요! 차별 없는 곳에서 진정한 스포츠 정신이 꽃피는 법입니다!”
위원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모자란 인간들 같으니라고…. 쯧쯧.’
고상근 위원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같지 않은 자존심에 다들 복을 걷어차고 있었다.
크로스컨트리 스키 분야는 어차피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었다.
남는 국가대표 출전권을 한국대 생에게 줘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해당 선수는 동계 체전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알파인 스키 출신인 고상근 위원장은 그 기록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에는 아직 없는 특별한 기록이었다.
그런데 그걸 질투했다.
메달을 따면 동계 올림픽을 알리는 데 효과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걸 감안하면 이만한 인물도 없었다.
등록된 선수 프로필을 확인해 보니 인물도 훤했고 학벌도 좋았다.
무려 한국대 법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건 그렇고, 다들 그거 아십니까?”
고상근이 속내를 감추고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뭘 말입니까?”
“다른 안건 있습니까?”
특히 동계 올림픽 선수층은 몹시 좁았다.
피겨와 스피드 스케이팅, 쇼트트랙 같은 인기 종목 분야만 대기업 스폰이 붙었다.
국가에서 지원이 나오긴 했지만 그 자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스키 부분에 TS 그룹이 적극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오! 그런 일이!”
“역시 외국계 기업답게 지원 분야가 다르군요!”
“비인기 종목에도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기업은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감사패라도 미리 준비해둬야겠습니다.”
스폰이 붙으면 비행기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로 편리한 점이 많았다.
물론 위원들에게 떨어지는 콩고물도 제법 있었다.
“그 TS 그룹이 내건 조건이… 장태산 선수입니다.”
“네?”
“그게 무슨….”
“장태산 선수가 TS 그룹 회장님과 친분이 두텁다고 합니다.”
“…….”
위원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다들 사회생활을 경험할 만큼 해서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다.
“장태산 선수 불편하게 만들면 스폰 끊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다들 알아서 처신해 주십시오.”
위원장 고상근이 조용해진 의원들을 향해 나름 경고를 날렸다.
알량한 자존심에 괜히 선수 건들지 말라는 으름장이었다.
하지만 위원들 말고도 선수들 사이에서도 이 번 일을 고깝게 보는 이들이 나타날 것이다.
군대까지는 아니어도 파벌과 선후배 상명하복이 아직도 굳건히 존재하는 체육계였다.
위원장 고상근은 조용히 동계 올림픽이 마무리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
“무슨 일이야? 또 사고 쳤어?”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학번이 같은 고연지와 친구 먹었다.
“나 법 없이도 사는 법대생이야~.”
“됐어. 이번 학기에도 너 때문에 인문대가 시끄러워 죽겠어!”
지난 학기도 학점은 모두 다 A+를 받았다.
자존심이 강한 교수들과 내기를 하거나 초장에 발표자를 자처해 제대로 끝내버렸다.
물론 이번 2학년 2학기에도 인문대 강의를 신청했다.
인문대가 마음 편히 놀기에 참 괜찮았다.
남녀 비율이 압도적으로 달랐다.
이왕 계절을 보낼 거라면 꽃밭이 좋았다.
그 사이 안면을 튼 여학생들도 많아졌다.
인문대 로비에 서 있으면 알아서 커피 한두 잔 정도는 쉽게 조달됐다.
신청한 전공과목이 없어 법대보다 인문대에서 주로 생활했다.
노어노문, 독어독문, 일어일문, 중어중문 3학년 전공 필수 과목을 신청해 한 번에 아웃시켰다.
한국인이 아닌 외국계 교수들 수업만 수강을 신청했다.
수업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들과 각국 언어로 토론을 하거나 대화를 나눴다.
머릿속에 뱅뱅 도는 차고 넘치는 신들의 지식까지 섞이자 나와의 대화에 교수들이 손을 들었다.
원어민보다 더 유창한 언어 구사와 방대한 지식을 소유한 나에게 안 됐다.
강의 한두 번 수강하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
인문대에서 대놓고 괴물로 불렸다.
몇몇 교수들이 자신들 논문에 도움을 달라고 요청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러시아 문학 교수 아비가일은 푸시킨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밥 한 번 먹자고 성화였다.
모스크바 대학 석, 박사 출신의 미녀 교수였다.
푸시킨 에피소드 몇 개에 그녀는 신분도 망각한 채 뜨거운 유혹을 아끼지 않았다.
“난 죄가 없다. 능력이 문제지.”
“그래…. 너의 괴물 같은 능력이 문제지. 하아, 오늘도 너 소개시켜 달라고 몇 명이나 연락이 온 줄 알아?”
“내 비서로 취직해라.”
“됐거든! 우리 아빠 회사 놔두고 내가 왜!”
친구가 된 고연지는 처음보다 더 편한 사이가 됐다.
학교에 올 때마다 함께 밥 먹는 일이 잦았다.
“잘 봐둬라. 오늘부터 보기 힘들 것 같으니까.”
“응? 왜? 어디 가?”
“태릉에.”
“태릉? 거긴 왜? 회사 옮겼어?”
“아니, 운동하러.”
“…운동? 설마 태릉… 선수촌?”
“어.”
“네가 왜! 너 국가 대표야?”
“아마도~.”
“미친….”
고연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준호 교수에게 연락을 받았다.
다른 동계 올림픽 국가 대표들은 모두 다 입촌한 상태라고 했다.
나만 특혜를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학교와 학과가 특이해 체육회 관계자들이 답을 못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준호 교수 인맥을 활용해 일은 더 커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수선발위원회 위원들 반발이 심해 더 이상 입소를 미룰 수 없다고 했다.
그분들 입장도 이해는 갔다.
계속해서 나만 특혜를 받는 것도 말이 안 됐다.
“너 사법 시험 발표 나지 않았어.”
“응.”
“어… 떻게 됐어?”
고연지가 궁금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마 떨어진 걸 가정하고 묻는 듯했다.
하긴 학교에 사업에 국가대표까지 겸직한 내가 사법시험 2차에 합격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대답은 뻔하지 않겠어?”
“그렇지…. 사법시험이 쉬운 것도 아니고…. 1차 합격했으니 내년을 노리면 되지. 힘내. 너라고 다 잘할 수는….”
“뭐라고 하는 거야. 나 붙었어.”
“응? 뭐라고!!!”
고연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 놀라는 눈치다.
“교수님들이 저술한 교재 위주로 공부했더니 턱~ 하고 합격이네~.”
“와아아! 이런 미친! 너 사람 맞아?”
“오늘 축하 기념으로 순댓국 쏜다!”
“놀리면 재밌어? 그리고 이게 순댓국으로 때워져?”
“모둠 순대도 한 판!”
“…그렇다면… 뭐.”
“소주도~.”
“가자! 입에 침이 돌아 미치겠다.”
여자와 남자라는 경계를 넘어서면 이성간에도 이렇게 편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고연지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가 의자왕도 아니고 문어발 확장연애는 자제하고 싶었다.
“코하네는?”
“당연히 연락했지.”
“태산 씨! 연지 상!”
세일러복 복장을 입고 등장하는 코하네.
오직 코하네만이 한국대에서 소화할 수 있는 드레스코드였다.
루틴처럼 가슴에 책을 품고 나타났다.
영락없이 만화를 찢고 세상으로 나온 여자 주인공 같은 코하네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저런 모습이 참 안타까웠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코하네를 잘 안다.
본래 상대의 첩자는 거리를 두는 것보다 가까이 두고 감시하는 게 상책이다.
“그럼 오늘도 달려볼까?”
“코오오올!”
***
“아우우…. 힘들어 미치겠네.”
“삭신이 다 쑤신다. 올림픽 아직도 석 달이 넘게 남았는데 매일 지옥 훈련이라니….”
“이럴 때 시원한 맥주 한 캔 마셔줘야 하는데.”
“우리가 애도 아니고 금주는 아니잖아?”
“참아라. 괜히 찍혀서 규율 위반으로 쫓겨난다.”
“선배님들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
태릉선수촌 남자 기숙사가 위치한 오륜의 집.
저녁 훈련을 끝내고 식사까지 마친 동계 올림픽 상비군 선수들이 야식 타임을 갖고 있었다.
선수들 모두 한 덩치를 자랑하는 아이스하키 대표팀이었다.
라면과 김밥, 통닭, 탄산음료 등을 들고 오륜의 집 바깥 벤치에서 수다를 떨었다.
모두 다 짬밥이 됐기에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훈련이 끝난 시간이라 코치들도 없었다.
고참 선수들이 후배들과 입을 털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아직 입촌 안 한 선수가 있다고 합니다.”
“뭐? 아직도?”
“에이~ 그게 말이 돼. 이제 석 달밖에 안 남았는데 소집을 안했을 리가 없어.”
“진짜라니까요! 저희 외삼촌이 선수선발위원회 소속이지 않습니까. 거기서 나온 정본데… 한국대생 선수가 안 왔답니다.”
“한국대? 거기에 누가 있어?”
“어! 설마? 그 새끼?”
“누구야? 아는 놈이야?”
“그 새끼 있잖아. 한국대 크로스컨트리 대학부!”
“아! 맞다. 그 제비!”
한국대와 제비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떠올리는 아이스하키 선수들.
2월에 열렸던 동계 체전에서 난리가 났었다.
한국대 출신 선수가 대학부 금메달을 땄다.
체육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공부 부분에서는 몰라도 체육계에서는 변방 축에도 끼지 못했던 한국대였다.
그런 대학 출신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건 달나라에 사는 토끼를 봤다는 얘기와 동급이었다.
“그럼 한국대라서 특혜야?”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하고는 출신이 다르잖아.”
“아오! 밥맛 같은 새끼! 그런 놈 때문에 우리 스포츠 선수들이 욕먹는 거라고!”
“공부나 할 것이지…. 체육이 취미도 아니고….”
“노르딕 애들이 비실거리는 이유가 있다니까. 그런 놈에게 국가대표 자리를 빼앗기고….”
“아오!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그냥 한 방 후려쳐서 정신 교육 제대로 들어갈 텐데!”
“내 말이~. 스틱으로 몇 대 후려치면 정신 바짝 차리겠지.”
“그럼 우리 그 자식 들어오면 교육 한 번 땡길까?”
“그럴까?”
선수촌도 사람 사는 모양은 다 같았다.
질투하고 미워하는 시기가 차고 넘쳤다.
부우우우우웅.
그때 큼지막한 SUV 한 대가 라이트를 밝히고 오륜의 집 쪽으로 다가왔다.
딱 봐도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덩치와 자태를 자랑했다.
끼이이이이이.
거침없이 오륜의 집 정문 옆 주차장에 멈췄다.
“저 차 뭐냐?”
“미국 차 같은데요?”
“나 저거 영화에서 봤어! 저거 엄청 비싼 찬데….”
“에스컬레이터? 에스컬레이더? 그거 아냐?”
통닭 다리를 뜯다가 그대로 멈춘 하키 선수들은 온통 차에 시선을 집중했다.
늦은 야밤이었다.
이 시간에 남자 기숙사에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달칵.
차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남자가 내렸다.
뒷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큼지막한 스포츠 백을 꺼내는 남자.
운동선수인 듯 키가 크고 날씬했다.
“어! 제, 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