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0
회귀의 전설
370장. 위험한 남자 (1)
“시, 실장님. 지금 VIP 어디에 계십니까?”
“허 수석!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대통령이 거주하는 청와대.
아침 국무회의 시작 전에 조정길 비서실장에게 허대욱 외교안보수석이 급하게 달려와 VIP를 찾았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요!”
“무슨 일? 북한에 쿠데타라도 일어났어?”
허 수석의 다급한 목소리에 조정길 비서실장도 덩달아 당황했다.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한국대 교수에 대학원장, 그리고 울주대학교 총장으로 인생 경력을 마무리하려고 했던 조정길 비서실장.
괜히 권력욕에 눈독을 들이면서 말년이 편치 못했다.
최병박 정권에서 비서실장을 권했을 때 내심 뛸 듯이 기뻤다.
학자로서 프로필을 마무리하는 것보다 대통령 비서실장 경력을 한 줄 더 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대강으로 민심이 뒤집어졌다.
전대 비서실장이 과로로 쓰러졌다.
그 뒤를 이어 비서실장이 된 조정길은 솔직히 잘해 낼 자신이 있었다.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잘 보필해 공직자로서 떳떳하게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이 꼬였다.
자신이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빠르게 깨달았다.
이곳은 국가 행정력의 중심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사기업 같은 곳이었다.
대통령의 형과 최병박을 과거부터 보필했던 인물들이 핵심을 꿰찼다.
청와대 비서실장 자리는 분명 대단한 위치였지만 지금은 총무비서관만도 못했다.
최병박에게 당했다.
모두 다 계획적이었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저명한 학자였던 자신을 들러리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순간부터 조정길은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걸려 있는 인연이 많았다.
꽂아준 후배나 친척들이 청와대나 행정부 기관 곳곳에 박혀 있었다.
자신만 떳떳하자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그들의 운명이 어찌될지 몰랐다.
그들이 안정되기까지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동거를 계속해야 했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참을 인(忍) 자를 가슴에 새기고 또 되새겼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최병박 정권은 국가 운영을 모두 돈과 연결시켰다.
그것도 국민의 이익이 아닌 본인과 특정 추종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시켰다.
그럴수록 최대한 조용히 큰 사건 없이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오늘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아유! 내가 미쳐.”
말을 하다 말고 허대욱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왜? 무슨 일이야?”
국민들은 청와대 담장 안쪽 사정을 알 수 없었지만 이곳은 언제나 전쟁터였다.
“사고를 쳤어요.”
“누가?”
“장만수 장관요.”
“장 장관이? 뭘?”
“방금 미국 상무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상무부?”
조정길은 허대욱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외교안보수석에게 상무부에서 전화할 일이 많지 않았다.
“장 장관이 미국 자본이 투입된 회사를 국세청에 지시해 털었답니다!”
“뭐라고? 털어?”
조정길 비서실장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 대통령은 민심 수습책으로 미국 국빈 방문 초청을 앞두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최병박 정권은 미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약점이 많았다.
국민 지지율이 낮았고 비밀 사업들이 미국의 어두운 자본과 연결돼 있었다.
민자사업을 핑계로 외국계 자본에 엄청난 특혜를 넘겼다.
그 대가로 해외에 불법 자금을 축적하고 있다는 걸 고위직들 다수는 눈치를 챘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떡밥 먹은 언론과 국회의원들은 알아서 입을 닫았다.
국민들과 몇몇 단체가 죽어라 떠들었지만 기사가 나가지 않으니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국민들은 더 몰랐다.
그리고 지금은 외환위기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외국자본이 투입되는 민자사업을 띄워주기까지 했다.
그런 마당에 일이 터졌다.
“얼마 전 미국 자본이 인수한 TS 그룹을 장관 지시로 국세청에서 털었습니다.”
“이런……. 미친!”
지금 기업들이 풍전등화 위기라 국가에서 지원을 해도 모자랄 판에 국세청을 동원해 세무조사를 벌였다는 소리였다.
조정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장만수는 상식이 없는 인간이었다.
“VIP 들어오십니다.”
경호원이 먼저 들어와 VIP의 등장을 알렸다.
새벽에 일어나 테니스를 치고 본관으로 출근하는 최병박.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 하고 잘 먹어 뾰족한 얼굴에 살이 차오르고 기름기가 좔좔 흘렀다.
“오셨습니까.”
조정길과 허대욱은 고개를 숙이고 대통령을 맞이했다.
“다들 밥은 먹었어?”
“네? 네.”
“그런데 얼굴이 왜 죽상이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최병박.
허대욱이 조정길 비서실장에게 눈치를 보냈다.
요즘 최병박은 기분이 좋았다.
환율이 한풀 꺾이면서 돈 벌 곳이 나타났다.
조카가 운영하는 해외 사모펀드가 민자사업을 타진해 왔다.
30년 이상 장기 보전 계약을 채결했다.
달러가 들어온다는 소식에 국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곳곳이 허점투성이였지만 언론과 협조가 잘 돼 큰 문제가 없었다.
해외 비밀 계좌에 계약금으로 총 공사금액의 10퍼센트가 충전됐다.
오대강으로 요란하게 타오르던 촛불도 시들해졌다.
언론사 간부들을 모조리 교체하고 국가 기관을 통해 여론전을 벌였다.
국민들 대부분이 입을 닫았다.
최병박은 마음대로 국정을 주물렀다.
그런 최병박 눈에 당황하는 비서실장과 외교안보수석이 언짢게 보였다.
“사건이 좀 있습니다…….”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건? 뭐?”
반말을 사용하는 특유의 짧은 화법이 터졌다.
기분이 나빠지려 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그게…….”
조정길이 허대욱에게 패스했다.
“바, 방금 미국 상무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상무부? 걔들이 왜?”
“미국 자본이 들어간 기업체 세무조사를 당장 중지하지 않으면…… 국빈방문이 취소될 수 있다고…….”
“뭐! 세무조사? 취소? 당신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최병박이 인상을 팍 썼다.
배고팠던 과거를 잊고 갑질 전문가가 된 최병박은 청와대 입성 전부터도 안하무인이었다.
아랫사람들에게 향한 인덕도 부족했다.
가족 간에도 돈에 관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냉정한 최병박이었다.
이익이 걸려 있는 부분의 사건이 터지자 분노에 휩싸였다.
“도대체 누가 어디를 건드렸어? 백 청장 정신 나간 거야? 이 중요한 시기에 누굴 조진 거야! 당장 전화 연결해!”
최병박은 불같이 화를 내며 시종처럼 따라다니는 총무비서관을 닦달했다.
“장만수 장관님이 TS 그룹 세무조사를 지시했다고 합니다.”
허대욱이 재빨리 자백했다.
“뭐? 만수가?”
장만수라는 이름에 최병박이 순간 멈칫했다.
다른 장관과 달리 장만수는 자신과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었다.
“에잉……. 쯧.”
혀를 차며 입맛을 다시는 최병박.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최고 권력자가 된 최병박은 머리가 비상했다.
“바로 세무조사 취소하고 오해가 있었다고 바로 연락해!”
지시는 간단명료하게 하달됐다.
“넵!”
“그리고 정중하게 사과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제발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조도 해.”
“조치하겠습니다!”
“FTA 다들 몰라? 괜히 국제 소송이라도 걸리면 국고가 나가잖아! 다들 정신 차려! 이게 당신들 돈 아니잖아!”
국민 돈을 개인 호주머니 돈으로 생각하는 최병박이 한바탕 큰소리를 쳤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때 국무회의를 위해 들어서던 장만수가 조용히 옆에 있던 비서에게 물었다.
“어이! 만수! 너 도대체 뭔 짓 하는 거야!”
그 모습을 보고 최병박이 장만수를 향해 삿대질을 퍼부었다.
“네?”
“머리는 장식품이야?”
보는 눈이 많았지만 품격이 덜 갖춰진 최병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만수를 꾸짖었다.
“…….”
무슨 일인지 눈치채지 못하고 자라목이 되어 고개를 숙이는 장만수.
“앞으로 TS 그룹 건들지 마! 다시 건들면……. 너 죽는 줄 알아!”
TS라는 말에 장만수는 정신이 멍해졌다.
이렇게 빨리 반격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기가 죽은 채 다짐했다.
다시는 TS 그룹 일에 절대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
“대표님 뭐죠?”
“뭐가 말입니까?”
“왜 미국만 오면 사라져요? 그리고 이 낯선 여인의 향기는…….”
여우가 개코다.
도도희는 내 옆에 다가와 여자의 촉감을 발휘했다.
“미국 여성분들 향수가 진하네요. 하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조심해요. 하룻밤 쿨이 영원한 쿨이 될 수 있어요~.”
도도희가 뭔가 아는 듯 얇은 미소를 띠었다.
“…….”
이럴 때는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다.
괜히 더 말을 했다가 눈치 빠른 도도희에게 걸릴 수 있었다.
“잘 지냈어요?”
화제를 돌렸다.
“뭐~ 친구들 만나고 바빴어요.”
도도희를 노리던 중국 놈은 강제 출국당했다.
이제는 활동에 안전해진 만큼 도도희는 마음껏 뉴욕을 활보했다.
“월가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한풀 꺾였어요. 지난해처럼 미래가 불확실한 것 같지 않아요. 한바탕 인력 재조정이 있었지만 프린터 된 달러가 활기를 불어 넣고 있어요. 이럴 때 보면 미국 참 무서워요……. 세계 통화 발권국이라지만 자기들 빚을 자신들이 찍어낸 돈으로 갚아버리다니…….”
도도희가 고개를 저었다.
미국의 무서움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직까지 누구도 대체 못할 세계 패권국의 저력이었다.
빚이 있어도 연방준비은행에서 무제한으로 돈을 풀면 끝났다.
도리어 달러가 강세로 돌아섰다.
미국이 환란의 주범이 분명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부러운 일이죠.”
“그렇죠? 대한민국도 빨리 경제성장해서 위기 때 돈으로 때웠으면 좋겠어요. 일본이 그런 점에서 보면 대단한 것 같아요.”
화폐는 전쟁 중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특별한 이익을 누렸다.
“아마도 그렇게 될 겁니다.”
“피이~ 어느 세월에요. 제 이번 생에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혁명적 과학 기술로 선도를 넘어 압도하기 전까지……. 이 조국의 앞날은 캄캄하답니다. 지금은 중간재 팔아 엄청난 이익을 보고 있는 중국과의 특수거래가 10년 정도면 끝날 게 뻔해요. 절대 타인을 믿지 않는 중국인들은 야심가예요. 이번 환율 사태로 중국에 투자한 상당수 한국 기업들은 위기에 처할 게 뻔하답니다. 중국인들이 이제 한국인들을 쫒아낼 타이밍이거든요~.”
괜히 미국에서 대학교 나오고 월가에 입사한 게 아니었다.
도도희의 예견은 정확했다.
다만 그녀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걸 난 추진 중이다.
“도도희 상무, 이제 대표해도 될 것 같군요.”
“그럼 저 볼부 대표 주는 거예요?”
도도희 꿈도 컸다.
하지만 볼부는 자국 출신인 스웨덴인이 대표가 될 것이다.
그들의 안전 철학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하는 거 봐서요.”
“와아……. 진짜 이렇게 충성 다 바치는 21세기 직원이 어디 있다고!”
“직원 복지에 최선을 다하는 이런 21세기 대표는요?”
“……헤에~ 대표님 존경하고 사랑해요.”
“…….”
여우에게는 아직 상대가 안 됐다.
사랑한다는 말을 던지며 반짝이는 저 눈빛.
위험했다.
“그런데 오늘 누구를 만나는 거예요?”
“아주 위험한 남자입니다.”
“갱단 보스요?”
“아니요.”
“그럼 누구요?”
“그보다 더 중요하고 위험한 남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요?”
“저기 오는군요.”
저녁 약속을 잡았다.
도도희와 함께 미슐랭 투 스타 레스토랑에서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버트 라이언과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눈에 보였다.
큰 키에 백색 금발, 호기심과 욕망 가득한 눈빛을 감추지 않는 그가 다가왔다.
“다니엘 대표. 여기 자네가 보고 싶어 하던 분이 왔네.”
로버트 라이언이 남자를 소개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다니엘 장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난 레오날드 존 트럼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