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9화 (368/1,284)

 # 369

회귀의 전설

369장. 뜨거운 한 잔

“건방진 새끼가 날 무시해? 회장도 회장 나름이지 어디 근본도 없는 놈이 감히!”

기획재정부 장관 장만수가 평소답지 않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으르렁거렸다.

이런 모욕은 장관 자리에 앉은 이후 처음이었다.

2008년 신정권 출범 후 기획부와 재정부가 통합되면서 기획재정부가 출범했다.

권한이 대단했다.

최병박은 자신이 계획한 대운하와 해외 투자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측근인 장만수를 장관에 앉혔다.

누구 하나 건들 자가 없었다.

제왕적 대통령제도 하에서 장만수는 왕의 사랑을 듬뿍 받는 인물이었다.

예산이 모든 걸 지배한다는 정부의 실세 조직이 바로 기획재정부였다.

한국은행과 함께 외환 공개시장 조작이 가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획재정부가 모든 걸 주관했다.

한국은행은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 불렸다.

최병박 정부 들어 외환 위기가 발발하자 여실히 힘의 우열이 드러났다.

한국은행은 기획재정부의 팩스로 가이드라인을 받았다.

모든 걸 장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휘했다.

아낌없이 보유달러를 투입해 환율방어에 나섰다.

장관 명의의 외국환평행기금채권도 발행했다.

국무총리보다 더 실재적인 실세였다.

최병박 대통령의 아낌없는 후원에 힘입어 권력의 칼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누구 하나 감히 말릴 수 없었다.

국회의원도 장만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지역구 예산을 모두 기획재정부에서 담당했다.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을 조율하는 행정기관이었다.

장만수 눈에 나면 지역구 예산으로 100원도 건지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산하 외청에 국세청, 관세청, 조달청, 통계청이 존재했다.

기획재정부 장관 한 마디에 기업 하나 공중분해되는 건 일도 아니었다.

“6년근 홍삼? 이게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얼마 전 만났던 TS 그룹 회장은 돈 상자 대신 진짜 홍삼을 세트를 건넸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가 기분 좋게 와이프에게 상자를 건넸다가 제대로 면박을 당했다.

산삼도 아니고 홍삼을 받아왔다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직접 홍삼인 것을 확인한 장만수는 그날 밤 분이 나서 잠을 못 잤다.

하관우가 대놓고 엿을 먹인 꼴이었다.

“게다가 내가 말한 청원도 다 무시하고 말이야!”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일단 참았다.

몇몇 계열사 임원이나 감사 자리에 아는 사람들을 천거해 놓은 상태였다.

정권에 줄을 섰던 자들에게 내줘야 할 자리가 많이 필요했다.

비공식적 선거자금이 공짜가 아니었다.

그들이 입을 다물어야 나중에 후환이 안 됐다.

대부분 그룹들은 장만수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자회사에 자리가 없던 사외이사나 감사 같은 자리를 잽싸게 만들어 냈다.

하지만 TS 그룹은 예외였다.

외국 자본을 믿고 배짱을 부렸다.

외국계 자본이 투입된 무늬만 국내 그룹이었다.

자칫 잘못 건들었다가는 탈이 날 수 있었다.

하지만 하관우 회장의 대놓고 하는 무시는 장만수의 꼭지를 돌게 만들었다.

파워 싸움이 시작된 셈이었다.

“지들이 내 도움 없이 수출할 수 있을 것 같아?”

산하단체에 한국수출입은행, 한국투자공사 등이 존재했다.

조달청을 통해 TS 그룹 산한 기업들의 제품들을 보이콧 할 수 있었다.

수출에 필요한 신용장 개설로도 엿을 먹이는 게 가능했다.

“일단 뜨거운 맛을 한 번 봐라. 흐흐흐.”

그중에 가장 사용하기 쉬운 방법이 하나 있었다.

장만수는 장관실에서 직통 전화를 돌렸다.

“백 청장. 나 장만수야.”

- 장관님 직접 이렇게 전화를 다 주시니 영광입니다!

새로 임명된 백성철 국세청장은 장만수의 오른팔과 같았다.

기업들을 쪼아 자금을 받아내는 선봉장 역할을 맡았다.

예비세무조사 서류만 보내면 알아서 돈다발을 싸다 쟁였다.

백 청장은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출신이었다.

“내게 투서가 들어와서 말이야.”

- 투서요?

두 사람 만의 신호였다.

“그래. 탈세가 있다는데 백 청장이 수고 좀 해줘야겠어.”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뱉는 장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투서할 미친놈은 세상에 없었다.

- 아니 이런 청렴한 세상에 탈세라니요! 어떤 놈들입니까! 당장 박살을 내겠습니다!

권력의 개가 된 국세청장은 사냥개처럼 짖었다.

죽이 잘 맞았다.

“TS 그룹 한번 조사해 봐. 외국계라고 이 나라 법체계를 우습게 보는 것 같아.”

- 넵! 알겠습니다! 바로 세무조사를 실시하겠습니다!

국세청의 무소불위 권력 사용 명령이 하달됐다.

“내가 신경 쓰고 있으니까 결과는 바로 보고해줘.”

특별히 강조하며 일을 지시했다.

- 저만 믿으십시오. 아주 탈탈 털겠습니다!

장만수의 심복답게 백성철 청장은 바로 장관의 의중을 알아들었다.

“그래 수고해.”

- 들어가십시오.

통화가 끝났다.

“어디 한 번 재롱을 피워봐~. 흐흐흐.”

세무조사로 벗어날 수 있는 그룹과 사업체는 대한민국에 없었다.

자의적 해석이 충분히 가미될 세무처리가 한두 개가 아니다.

덫을 설치한 장만수는 음흉하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하관우 회장이 반드시 자기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잘 지냈어요?”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멈춰져 있다는 말로 답해도 될까요?”

예쁘고 지적인 여자는 말도 잘했다.

우연은 항상 낯선 것들 사이에서 인연을 창조해 냈다.

전혀 알지도 만날 수도 없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게 만드는 재주 넘치는 녀석이었다.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다니엘은 눈썰미가 좋아요. 전 아직 그 마음 그대로예요.”

그녀가 웃는다.

그날 밤처럼 매혹적이다.

마음이 그대로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유혹이다.

뉴욕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와인 바였다.

VIP 카드를 소지해야 들어올 수 있는 차별적 공간에서 그녀와 난 와인을 마셨다.

“이탈리아 와인은 마실수록 깊은 맛이 느껴집니다.”

붉은 와인에 시선을 담았다.

“어떤 맛이요?”

“하늘에 맞닿는 넓은 포도밭, 오래된 포도나무와 가족의 깊은 신뢰, 정직한 오크통과 비밀스러운 지하 셀러……. 그 동네에서 자라는 풀꽃 향기까지……. 그려지지 않나요?”

“다니엘은 사업가가 아니라 시인이 되었어도 성공했을 것 같아요. 표현하는 방법이 사람이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요.”

그녀가 또 웃는다.

처음 만남부터 독특했던 그녀.

평범한 신분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세의 딸.

로버트도 어려워했지만 내 앞에서는 순수한 미소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 재주로 오늘도 한 건 했답니다.”

“포드가 욕심 때문에 언젠가 큰 코 다칠 줄 알았어요.”

그녀는 이미 나에 관해 알고 있었다.

포드와 체결했던 계약 내용을 알고 있는 눈치다.

“제가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같군요.”

“그게 뭐에요?”

아직 동양적 농담에는 익숙하지 않는 그녀였다.

“당신 손바닥 안에 있는 장난감 인형 같다는 소리입니다.”

“그건 아니죠. 다니엘은…… 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은 남자잖아요.”

대답과 함께 그녀는 포도주를 한 모금 삼켰다.

속이 타는 것 같았다.

몇 잔 마신 와인으로 여자의 맑은 피부는 분홍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녀가 풍겨내는 향기가 숨을 타고 달콤하게 퍼졌다.

“볼부보다 매력적인 매물들이 많은 데 왜 볼부를 선택한 거예요?”

“튼튼하잖아요. 자동차 첫 번째 미덕은 안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납득은 안 되는군요.”

“돈 드는 취미 생활이라고 해두죠.”

“그건 이해가 가요.”

돈을 돈으로 생각하지 않는 부류들은 생각하는 바가 달랐다.

몇 십억 달러야 취미생활 비용에 불과했다.

만수르 형아는 수백억 달러를 취미 비용으로 지불했다.

그 금액에 비하면 나는 소소했다.

“반대 안 할 거죠?”

“그럼요~ 월가의 떠오르는 신성 로버트 라이언의 투자를 누가 말려요~.”

“제 지분도 있습니다.”

배시시 그녀가 웃는다.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눈치다.

그래도 모든 것을 파악한 것 같지 않았다.

로버트 라이언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라고는 생각까지는 못할 것이다.

“다니엘……. 날 도와주실 수 있나요?”

“당신을?”

“아니죠. 정확히는 제 아빠 일이죠.”

이제야 본론 이야기가 나왔다.

포드와의 일이 처리된 직후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때를 맞춘 듯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로버트 라이언 곁에도 첩자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시작한 본격적인 대화.

중요한 순간이었다.

“차일드 가문의 일에 끼어 좋은 꼴을 본 자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랍니다~.”

“알다시피 요즘 전 능력도 자금도 부족합니다.”

“로버트 라이언의 친구잖아요. 그거면 됐습니다.”

내가 아니었다.

로버트가 최종 목표물이었다.

친분 있는 관계의 내 말을 잘 듣는다는 것까지 파악한 모양이다.

“로버트도 차일드 가문은 벅찰 겁니다.”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다만…… 도움을 청할 때 조금만 도와주면 될 겁니다.”

대통령 주변 권력 배분에 대해서 그녀도 알 것이다.

로버트 라이언의 지분이 상당했다.

“일단 말은 해 보겠습니다.”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것도 거래였다.

도움을 줬다면 받는 건 인지상정이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멋대가리 없는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한국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중요한 출장길에 오른 나에게 전화를 할 정도라면 심상치 않는 일이 터졌다는 의미였다.

- 대표님……. 장만수 장관이 본격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미세하게 떨리는 하관우 회장의 목소리.

그는 아직 장만수 상대가 아니었다.

“어딥니까?”

-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부가 움직였습니다. 예비 통고도 없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래요?”

검찰 중수부 취급을 받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부.

국세청장의 직접 명령을 받는 조직이었다.

장만수가 선전포고를 제대로 날렸다.

기다리고 있었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최대한 협조하세요.”

- 그렇게 지시했습니다.

“다들 놀라지 말고 업무에 집중하면 됩니다. 회장님도 포함해서.”

- 알겠습니다.

“바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 네?

바로 처리해 주겠다는 말에 하관우 회장이 귀를 의심한 듯 다시 물어왔다.

“좋은 소식 있을 겁니다.”

- 아, 알겠습니다.

아직도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 같다.

상식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이럴 때는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통화는 짧게 끝냈다.

“거짓말처럼 절 도와줄 일이 생겼군요.”

“그래요?”

그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는다.

거래는 생각보다 빨리 체결될 것 같았다.

“한국 정부가 로버트와 내 재산에 눈독을 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아주 나쁜 버릇이 있군요.”

“혼내주실 수 있습니까?”

“조건인가요?”

“네.”

“바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아직 내 칼은 뽑을 때가 아니었다.

쥐 잡는 데 큰 칼은 쓰는 건 아까웠다.

“다니엘…….”

그녀가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불러왔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개인적인 부탁……도 들어줄 수 있나요?”

과거 그날 밤과 달리 이제 그녀는 나에게 부탁하는 입장이 됐다.

“오늘 밤 와인 한 잔…… 더 할래요?”

한 번 경험했던 뜨거운 그녀가 말하는 와인 한 잔.

달아오른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내 고개는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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