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6화 (365/1,284)

 # 366

회귀의 전설

366장. 별이 빛나는 밤 (1)

“형조야, 나다~.”

- 아이고,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요즘 뭐하고 지내냐?”

- 뭐하긴요…. 요즘 경기가 어려워져서 집에 박혀 소주 한 잔 하고 있습니다. 전원주택 붐 좀 부나 싶었는데…. 마누라가 나가서 노가다라도 뛰라고 난리네요. 목장 자존심이 있지….

“그럼 나하고 일 좀 할래?”

- 형님하고요? 뭔데요? 일 잡혔습니까?

“뭐긴, 뭐야. 형님이 큰 건 하나 잡았다~.”

- 진짭니까? 얼마나 큰 건데요? 사찰 공사라도 들어갑니까?

“흐흐흐. 형님이 누구냐~. 나 대목장 윤용곤이야~. 최소 3년짜리다. 큰 거 땄다.”

윤용곤 대목장은 목에 힘을 팍 줬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아무리 대목장이라 해도 공사 따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한옥 건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돈이 많이 들었다.

또 자재부터 최고급품에 검증된 상품만 고집했다.

대목장 이름에 맞춤하는 일이 드물었다.

이것저것 단가를 맞추려면 최소 수십 억 단위가 넘어갔다.

- 아이고! 형님! 존경합니다.

목장 송형조가 예기치 않은 소식에 기쁨을 드러내며 흥분에 찬 목소리로 존경을 외쳤다.

겨우내 빨았던 손가락을 계속 빨게 되는 줄 알았는데 대형 일이 터졌다.

대목장이 큰소리 칠 정도의 일이라면 몇 년 동안은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재인 대목장.

대목장만이 공사의 설계와 감리까지 취급할 수 있었다.

문짝, 난간 등을 취급하는 소목장이나 단청장, 석수, 기와장이, 흙벽장이 모두가 대목장 지시를 받았다.

과거에는 벼슬도 받았을 정도의 장인이 대목장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만한 인물을 보기가 드물었다.

철저하게 도제방식으로 기술이 전수됐고 암기나 제도술, 현장 관리능력까지 겸비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그중 한 명인 윤용곤 대목장이 큰 소리치는 일이었다.

“나 내일부터 현장에 내려가 있을 것이야. 그러니까 너도 애들 데리고 짐 싸서 와라.”

- 얼마나 불러야 합니까?

“쓸 만한 애들 추슬러서 싹 데려와.”

- 형님 그러면 열 명이 넘습니다.

“그것밖에 없어?”

- 더요? 흐흐. 기다리십시오. 그럼 전국에서 싹 뽑아서 데려가겠습니다.

“기와장이 윤택이하고 다른 애들도 전화 돌려라. 주소 찍어줄 테니까.

- 바로 돌리겠습니다!

“그래…. 우리도 이제 일다운 일 좀 해보자. 이 형님이 확실히 밀어주마!”

- 형님….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울먹이기까지 하는 동생의 말을 뒤로 하고 윤용곤은 통화를 끝냈다.

일이 있어야 기술을 전수할 수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근근이 버티며 살고 있는 목장들.

통화하는 윤용곤 대목장의 눈가에 얼핏 이슬이 맺혔다.

죽기 전에 큰 건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기회가 찾아왔다.

“녀석…. 왕이 되고 싶은 것이야? 그런 촌구석에 궁궐을 짓다니….”

대목장 윤용곤은 알고 있었다.

후에 확장될 설계도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엄청난 터에 자리 잡을 건물은 궁궐이나 진배없었다.

왕을 꿈꾸는 젊은 청년의 야망이 그 안에 고스란히 들어차 있었다.

***

“학교생활 재밌어?”

“재미는 무슨~.”

“뭐야? 표정 보니까. 재밌네~. 맞지? 풋풋한 신입생들 화장품 냄새에 취해 벌 떼처럼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남학생들이 한 둘이야?”

“내, 내가 나이가 몇인데….”

임윤아의 물음에 뻔뻔하게 대답이 냉큼 나오지 않았다.

벌떼까지는 아니더라도 풋풋한 신입생들에 눈길이 가는 건 맞았다.

“이제 스물하나잖아. 좋을 때야~ 흐으.”

나와 말을 텄지만 임윤아는 엄연히 한참 선배였다.

대학교 생활 끝내고 대학원 석사까지 마무리한 임윤아.

반면 나는 대학교 2학년에 불과했다.

그냥 입 닥치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안 추워?”

“태산 씨가 있잖아.”

누구나 다 아는 대한민국에서 첫째가는 오정랜드를 걸었다.

시간은 밤 10시.

3월 평일이라 폐장 시간은 저녁 8시였다.

놀이공원에 모였던 인파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직원들도 이제는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었다.

차를 타고 내부까지 들어왔다.

오정랜드 주인댁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오정랜드의 봄을 상징하는 녹색 튤립 줄기만 보였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스윽.

임윤아가 팔짱을 끼며 깊숙이 안겨왔다.

작은 임윤아의 어깨를 감싸며 체온을 나눴다.

한국에 들어왔지만 막상 임윤아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데이트는 오늘까지 세 번이 전부였다.

영화 보고 밥 먹고 드라이브를 했다.

시골집에도 한 번 들렸다.

그리고 내일이면 임윤아는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학업을 계속 지속하기로 결정이 됐다.

지난 생에 임윤아는 이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를 비롯해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지만 나는 알았다.

그래서 그녀가 더 애틋하고 소중했다.

“좋다~”

품에 파고들며 미소 짓는 임윤아.

나이는 나보다 많았지만 임윤아는 어린 동생 같았다.

애교도 많았고 톡톡 튀는 행동도 귀여웠다.

“박사 과정은 어렵겠지?”

“그럼~ 학부생은 모르겠지만 이게 아주 골 때려요. 미국 대학원도 실력과 함께 정치력이 발휘되어야 해. 교수들 간에 기 싸움이 장난 아니거든. 미술사라는 게 공대처럼 확 티 나는 게 아니잖아. 코에 걸며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그런 학문이야.”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임윤아도 열심히 살고 있었다.

미국 명문대 박사 과정이 쉬울 리 없었다.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

“왜? 다른 그림도 그릴 줄 알아?”

임윤아가 품에서 눈을 반짝거렸다.

“그럼~ 말만 해. 난 안 되는 그림이 없어.”

“와아~ 완전 자만감 쩔어.”

“자만이 아니라 실력에서 나오는 자신감이지.”

“그래 인정…. 진짜 태산 씨 그림 실력은 미쳤어.”

미술사를 전공하는 임윤아답게 내 실력을 인정해 줬다.

“어떤 그림이나 조각, 화풍도 다 되니까 걱정하지 마.”

“고마워~.”

임윤아가 고마운지 더 깊이 품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호젓한 오정랜드를 걸었다.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없었지만 가로등 불빛은 여전히 환하게 그대로였다.

놀이기구들 대부분 불이 꺼졌다.

주변이 아직 개발 전이라 하늘의 별이 총총하게 보였다.

“미국 가면 보고 싶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 벌써 그리움이 한 가득이다.

“조금만 기다려. 곧 미국에 갈 일이 있어”

“왜?”

“자동차 회사 하나 매입하려고.”

“자동차 회사? 어떤 거?”

오정에 있어 자동차 회사란 치욕 그 자체였다.

대규모 사업 중 유일하게 실패한 자동차 산업.

임윤아도 관심을 보였다.

“미국에서 보유한 유럽 쪽 회사야.”

“그래? 돈 안 필요해?”

“돈?”

“할아버지가 용돈 하라고 예전에 주신 통장 있어.”

“얼마나?”

“1,000억쯤.”

이게 바로 재벌 클래스였다.

1,000억이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주는 용돈이란다.

그것도 완벽하게 자금 세탁을 거친 자금일 것이다.

“많네?”

“뭐 자랑할 건 아니지만…. 우리 집 정도 되면 다들 그런 통장 하나씩 갖고 있어.”

“빌려 줄 거야?”

“아니~.”

“그럼?”

“그냥 가져. 태산 씨 필요하면 계좌 줄게.”

뭐지…. 이 포스는?

1,000억이 누구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그냥 가지라는 임윤아다.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그걸 다?”

“난 괜찮아. 아빠에게 용돈 타서 쓰면 돼. 계열사 주식도 좀 있고~ 받을 게 많잖아~.”

임윤아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오정 그룹 비자금은 미래에 가서 유명해진다.

밝혀지지 않은 자금이 수십조 원은 가뿐하게 넘을 것이다.

해외 투자자를 자처하고 투입된 비자금도 있었다.

“됐어. 그냥 용돈 해.”

물론 나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다.

1,000억 정도는 비행기도 못 사는 푼돈이었다.

“언제든 말해.”

임윤아는 쿨 하게 내 의사를 받아 들였다.

이런 관계…. 좋다.

“어? 여기만 불이 켜졌네.”

“내가 부탁했어.”

임윤아가 품에서 벗어나 놀이기구 앞에 섰다.

반짝반짝 알록달록 빛들이 주변을 밝혔다.

놀이공원에 가면 반드시 한 번은 타는 놀이기구.

평범해서 나이가 들면 대부분 이용하지 않는 회전목마 앞에서 임윤아는 활짝 웃었다.

“이게 좋아?”

“응…. 처음 탔던 놀이기구가 이거야. 할아버지가 태워주셨어. 가족들끼리 모두 와서 김밥 먹고…. 그때가 그리워.”

세상 사람 모두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추억 하나쯤 품고 사는 것 같다.

임윤아 역시 그 시절이 그리운 모양이었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아저씨~.”

그때 놀이기구를 조작하는 장소에서 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임윤아는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누구?”

“응~ 나 어렸을 때 이걸 담당했던 아저씨야.”

나이 지긋한 중년 남자는 조직에서 계급이 꽤 되는 것 같았다.

평범한 직원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임윤아를 위해 특별히 나온 것 같았다.

“타십시오. 말들이 오늘따라 더 달리고 싶은 모양입니다~.”

“네~,”

임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마 앞에 섰다.

“태산 씨~.”

그녀가 날 불렀다.

꼬마를 안아주는 아빠처럼 임윤아를 들어 말 위에 올려줬다.

안전장치까지 채웠다.

“공주님, 소인은 옆에서 경호를 서겠습니다.”

“내가 말을 타는 게 서투르니 같이 타도록 하라!”

“명을 받드옵니다!”

동심을 자극하는 행동에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임윤아 뒤에 올라탔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품에 쏙 안겼다.

나 역시 회전목마는 태어나 처음 타봤다.

부모님과 놀이공원에 와 봤던 추억이 없다.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단체로 왔던 기억이 있지만 회전목마를 탈 나이가 지났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아저씨가 힘차게 외쳤다.

띠링 띠링 띠리리링~♬.

경쾌한 방울 소리와 함께 음악이 흘렀다.

“으랴!!!”

임윤아는 말고삐를 잡고 달리는 자세를 취했다.

“공주님! 너무 빠르옵니다!”

“스피드를 올릴 터이니 잘 따라오도록 하라!”

사극 놀이에 빠진 듯 임윤아는 소녀처럼 즐거워했다.

***

“춥지?”

“안 추워. 태산 씨 품이잖아. 스트레스도 다 풀렸어.”

임윤아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줬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어느 순간 말은 멈췄고 기계를 조작하던 아저씨도 사라졌다.

불이 꺼진 회전목마.

깊어진 밤하늘에는 별만 빛났다.

“태산 씨….”

품에 안겨 걷던 임윤아가 조용히 날 불렀다.

“응?”

스윽.

임윤아가 고개를 돌리며 날 봤다.

그윽하게 빛나는 별이 그녀의 두 눈에도 있었다.

사르릇.

떨면서 천천히 감기는 그녀의 눈.

이런 거 무슨 뜻인지 알면서 거절하면 두고두고 욕먹는다.

그녀의 입술은 달콤한 향기로 가득했다.

욕망을 이기기에는 나의 인내심은 얕았다.

스륵.

“!!!”

가볍게 뽀뽀만 하려했지만 거침없이 침입해 오는 악마의 속삭임.

나의 눈도 자연스럽게 스르르 감겼다.

기필코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임윤아는 누구에게나 사랑 받기 충분한 여인이었다.

길고 긴 키스가 이어졌다.

“하아….”

볼이 상기된 채 한숨을 뱉어내는 임윤아.

그녀를 힘주어 품에 끌어당겼다.

“오늘… 같이 있어도 돼?”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피할 수 없는 임윤아의 유혹.

나도 모르게 그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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