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3화 (362/1,284)

 # 363

회귀의 전설

363장 수연제처만반성(隨緣諸處萬般成) (2)

대상과 2차 접촉을 완료했습니다.

관찰한 대로 특별한 능력을 소유했지만 그 외 특이점은 없습니다.

엘자 그룹 딸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정보대로 주변에 여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음식은 서민적인 걸 좋아합니다.

저를 의심하지 않는 게 확실합니다.

계속 접촉해 보고 하겠습니다.

코하네는 인터넷으로 암호 메일을 전송했다.

“아쉽네.”

오랜만에 대상 접촉을 핑계로 술을 마셨다.

더 마시고 싶었다.

장태산과 우연을 가장해 만남을 가졌다.

상부를 통해 한국대 서버를 해킹해 같은 교양 과목을 신청했다.

한국 최고 대학이라고 했지만 서버 관리는 허술했고 형편없이 금방 뚫렸다.

계획대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장태산에게 접근했다.

눈치 채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관건이었다.

장태산은 눈치가 빨랐고 주변 경호도 삼엄했다.

다른 조직원이 주거지에 침입해 쓸데없는 걸 빼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코하네는 진짜 교환 학생처럼 굴었다.

딸깍. 치이이익.

미니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꺼내 뚜껑을 땄다.

평소에는 순진한 교환 학생 역할 때문에 술을 거의 먹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장태산 접촉을 핑계로 대고 술을 좀 마셨다.

갈증에 목이 탔다.

“재밌는 녀석이야.”

코하네보다 어린 장태산은 나이와 상관없이 매력적이었다.

조직에서 찾는 ‘쇠탈의 후예’ 같지는 않았다.

그는 소탈했고 친절했다.

쇠탈의 후예라기보다 카사노바의 아바타라고 하는 게 더 어울렸다.

장태산은 여기저기 염문을 뿌리고 있었다.

코하네가 평범한 여성이었다면 진작 장태산의 매력에 넘어 갔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부정할 수 없는 호기심이 넘쳤다.

감정을 조절하는 훈련과 직업적 특성이 아니었다면 진짜 빠져들었을 것이다.

“훗……. 다음도 기대되는걸?”

수업 시간 돌발 행동들이 연속 됐다.

머리도 뛰어나고 신체 능력도 남달랐다.

그래도 쇠탈의 후예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뭐랄까? 진지함이 결여돼 보였다.

인생을 즐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고 그렇게 행동했다.

쇠탈의 후예라면 최대한 능력을 감추고 조용히 일신을 드러내지 않고 보호했어야 정상이었다.

“계속 지켜보면 알겠지…….”

시원한 맥주를 넘기며 뭔지 모를 아쉬움을 달래보는 코하네.

대형 유리 너머에 그 녀석이 술잔을 들고 마주보며 웃고 있는 듯한 환영이 어른거렸다.

***

“투자자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걸 원하네.”

“많이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부족한가?”

“전 진실밖에 드릴 말이 없습니다.”

“하하하. 그래서 오 회장님이 좋아하는 거군.”

“극찬도 많이 드렸습니다.”

“우리가 부족한가 보군.”

“많이요.”

“음…….”

가볍게 웃고 떠들었지만 고자룡은 마음이 무거웠다.

눈앞의 청년 장태산이 어떤 자인지 안아 사태 때 알게 됐다.

재계 서열 1위인 오정 임성철 회장이 눈여겨보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임 회장이 직접 막내딸을 서슴없이 소개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또 미국 월가의 전설로 떠오르는 로버트 라이언의 한국 파트너였다.

안아 그룹을 산산조각 내고 TS 그룹 회장을 임명했을 정도로 라이언의 신임을 받고 있는 장태산.

투자자로서 재능이 탁월해 고등학교 때 이미 투자 프로그램을 만들어 수조를 번 남자.

그 사실도 웬만한 정보통을 꾸린 인사들은 다 알고 있었다.

개인 수익률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요즘 들어 주가 폭락으로 고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끝까지 가 봐야 알 일이었다.

아직까지는 상위 재벌들 사이에서만 알려지고 있는 이름이 장태산이었다.

고자룡 회장 역시 장태산을 진작 한 번 보고 싶었지만 딱히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치 않게 딸과 함께 제 발로 찾아왔다.

“오정과 달리 엘자 그룹 주식에 투자하고 있지 않은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

장태산이 오정 그룹 주식 상당수를 매입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다소 불쾌하게 엘자 그룹에 관련한 주식은 매입하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전 수익을 추구하는 투자자입니다. 엘자 그룹은…… 재미가 없습니다.”

“주가가 안정됐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지 않나?”

“……회장님 같으면 엘자에 장기 투자 하겠습니까?”

장태산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오정에 밀려 만년 2인자 소리를 들어왔다.

“……말이 아프군.”

“그 말이 듣고 싶으셨던 것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그만 둘까요?”

‘집안에 호랑이를 끌고 들어왔군.’

나이도 어린 친구가 현역 회장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았다.

웬만한 대기업 대표들도 고자룡 회장 면전에서 이런 소리는커녕 고개를 들고 똑바로 쳐다보는 일도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장태산은 거침이 없었다.

기세도 점점 변하고 있었다.

연지와 함께 집 안에 들어올 때와 달리 투자자로서 말을 하는 장태산의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한 잔 더 마시겠습니다. 안주도 괜찮군요.”

한우로 만든 잘게 찢긴 육포가 나왔다.

안동주가 독주지만 숙취가 없는 탓에 간단한 안주가 어울렸다.

쪼로록.

태연하게 직접 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장태산.

“듣고 싶군. 우리 그룹에 지금 뭐가 필요한지.”

고자룡은 장태산의 나이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께 귀 따갑게 들어왔고 교육받아 왔었다.

절대 사는 동안 젊은 놈 괄시는 하지 말라는 것.

미래는 알 수 없고 젊은 사람이 가진 가능성은 언제든 발휘된다고 했다.

그 말은 젊은 놈 괄시했다가 뒤통수 맞는다는 소리다.

“어디부터 말씀드려야 할까요?”

“……큰 것부터 말해 보게.”

“그럼…… 시작할까요?”

느긋하게 술잔을 내려놓고 고자룡 회장을 똑바로 쳐다보는 장태산.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사공이 너무 많습니다.”

“사공?”

사공이라는 말에 고자룡 회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알고 있지만 가장 아픈 역사라 입 밖에 꺼내고 싶지 않은 부분일 것이다.

“연대가와 함께 가장 많은 식솔들이 그룹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된 사공들이 문제입니다.”

“그건 자네 생각이 틀렸네. 우리 엘자 그룹은 아버님 때부터 우애 경영을 해왔네. 하 씨 가문과 2005년에 서로 깔끔하게 계열사를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지.”

이 부분에 있어 나름 자랑스럽게 말하는 고자룡 회장.

“동전의 양면은 떨어질 수 없는 법입니다. 음이 있으면 양이 존재하는 것처럼 장점 뒤에는 반드시 단점이 있습니다. 세상에 완벽하게 옳은 것도 없듯이 완벽한 정리도 없습니다. 그 사공들이 모두 회장님 믿음처럼 다 정직하고 완벽하게 배를 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른 앞에 두고 잘난 척 문자 쓰는 것 같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목숨을 걸고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온 나였다.

2020년까지 엘자 그룹의 명맥은 유지되었지만 경영 성과가 좋지 않았다.

그룹을 먹여 살렸던 디스플레이가 중국에 따라 잡혔다.

오정과 유사하게 사업을 구성했지만 집중력에서 밀렸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껏 올바른 길을 걸어왔어. 정도를 걸어야 뒤탈이 없는 법이니까.”

고자룡 회장은 인정하지 않았다.

죽기 전에 엘자 그룹에 대한 증권회사 보고서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증권맨들 사이에서는 재미없는 주식으로 정평이 났었다.

오르지도 그렇다고 바닥을 치지도 않는 무난한 기업 연합체가 바로 엘자 그룹이었다.

가끔 특이하게 시장을 선도하는 기술을 선보였지만 뒷심이 부족해 후발 주자들에게 금세 자리를 빼앗겼다.

그룹 힘이 집중되지 못한 탓이었다.

“정도, 저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사공이 많다는 건 내세울 만한 게 못됩니다. 회장님은 인정하기 싫으시겠지만 엘자 그룹의 파워가 과연 과거에도 이랬습니까?”

찔리면 아플 질문을 계속해서 던졌다.

“오정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엘자 그룹이 왜 이렇게 됐을까요? 의리, 좋습니다. 하 씨 집안 돈으로 성공했으니 갚아야지요. 그룹을 떼어줘도 충분히 문제가 없습니다. 형제들도 수고했으니 회사 하나씩 떼 주는 것도 인지상정이지요. 가업을 일으킨 공은 형제간이라도 그 대가를 치러야 하고 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니까요.”

“…….”

고자룡 회장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며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에게는 피하고 싶은 진실일 것이다.

“한국 특유의 그룹 경영 장점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세계적 IT 대기업도 회사 지분에 민감합니다. 애플과 구글 창업주들이 주식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주주들의 이익에 그룹의 방향성이 흔들리지 않도록 방어막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사실 말이 좋아 주주이지 다들 투기꾼 아닙니까? 기업의 사회적 가치보다는 눈앞의 이익에 다들 눈이 멉니다. 이런 와중에 엘자 그룹은 인심 좋게 하나씩 나눠줬습니다. 결과는…….”

결과는 굳이 내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다.

선대 회장이 사망하면서 자연스럽게 계열사가 분리된 것을 알고 있다.

구자룡 회장의 작은 아버지들에게 돌아간 회사들은 대부분 엘자 그룹의 간판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그룹의 보호막 속에서 살아가던 화초들이 냉혹한 경영인의 세계에서 무너졌다.

누구나 알고 있는 엘자 카드, 엘자 화재, 엘자 증권, 엘자 선물, 엘자 투자 신탁 등등 수많은 괜찮은 사업체들이 계열 분리됐다.

방대한 가계도에 비해 그룹 경영권 같은 문제로는 잡음이 적었지만 상처는 컸다.

분리된 회사들은 대부분 무리한 사업 영역 획장과 방만 경영으로 거의 공중분해가 된다.

엘자 그룹 방계 그룹 금융사들 상당수가 대한민국 금융지주사들 소유가 됐다.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네.”

고집이 상당한 양반이다.

그러니 뚝심 경영의 대가라는 소리를 듣게 됐을 것이다.

존경하는 기업인은 맞았다.

“지주회사가 되며 방만한 경영 흐름이 개선됐네. 단단하게 묶여 서로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어.”

“물론 장점도 있습니다. 쓸데없는 계열사 정리도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장 뼈아픈 후회는……. 오정과 같이 수직 계열화를 완성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룹 캐시 카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주머니들을 나눠줬습니다. 만약 엘자 카드나 금융사들을 품고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금산분리 압박에서 우리는 자유롭네.”

“타 그룹들은 버티고 있습니다.”

“그건 정도에서…….”

“그래서 엘자 반도체를 빼앗겼습니까?”

“뭐라고!!!”

고자룡 회장의 가장 아픈 손가락을 사정없이 물었다.

엘자 그룹이 두고두고 후회하는 엘자 반도체.

“죽 쒀서 개 줬다는 표현이 과격하게 들리시겠죠?”

IMF 여파의 산업구조합리화 조치가 있으면서 강제로 빼앗기게 되는 엘자 반도체.

그때부터 엘자 그룹은 한쪽 날개가 꺾이게 되었다.

대북 사업에 열성적인 연대 그룹을 정부 권력자들이 확실하게 밀어줬다.

“자, 자네 말이 너무 심하군!”

이 순간 아직 닥칠 미래를 모르고 살아가는 게 대부분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과 달리 나는 누가 뭐라 해도 미래를 경험했던 사람이다.

만약 엘자 그룹이 엘자 반도체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재계 서열이 바뀌었을 것이다.

엘자는 기술 투자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대우도 나쁘지 않았던 엘자 그룹이었다.

다만 가족 경영으로 인한 허점이 명백하게 노출됐다.

과거 경기 호황 시절에는 문어발 확장이 가능했다.

다른 직원들보다 가족이 믿을 만했던 시대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밀어주고 끌어줘 성장이 가능한 시대는 이미 오래전 지났다.

고자룡 회장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엘자 그룹은 경영권 문제로 2010년부터 시끄러워졌다.

확실한 승계자가 없어 대주주인 형제들의 보이지 않는 반목이 더욱 심했다.

형제도 경쟁자인 시대가 됐다.

하물며 사촌에 오촌들은 말해 봐야 입만 아팠다.

“정도 경영 이념 추구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한 수 앞을 지를 수 있는 선견지명은 부족했습니다. 지주회사를 통해 정치권의 더러운 요구에 방어한 것도 옳습니다. 그렇지만 정치권을 멀리한 건……. 패착입니다. 미국과 유럽도 정치권과 기업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그룹 회장님들은 감옥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정치권이 개판인데 홀로 청정하다면 그건 과연 옳은 일일까요?”

파르르 떨고 있는 고자룡 회장에게 다시 의견을 물었다.

“난…….”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승계 원칙이 명확했다면 엘자 그룹은 더욱더 큰 대기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정과 쌍벽을 이뤄 대한민국 경제 기반을 이끌어 갈 쌍두마차가 될 기회를…… 놓쳤습니다.”

“너무 속단하는군…….”

“속단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조만간 하이넥스는 주인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뭐라고?”

지금은 채권단 공동경영으로 운영되는 하이넥스 반도체.

2012년 NK 그룹에 최종 매각된다.

그리고 NK그룹은 하이넥스를 이용해 또 한 번 확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에 반해 덩치가 작아진 엘자 그룹은 세계적 기업이 될 기회를 놓친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지 못했다.

핸드폰 시장도 따라가기만 하다가 좋은 기회를 날렸다.

엘자 전자를 품고 있었다면 오정처럼 세계적인 대기업이 될 수 있었다.

“차라리 잘 된 것일 수 있습니다. 엘자가 하이넥스 주인이 됐다면 정치권뿐만 아니라 방계들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작정하고 진실을 밝혔다.

“……오늘은 이만 가게.”

고자룡 회장이 축객령을 내렸다.

“술 잘 마셨습니다.”

자리에서 미련 없이 일어났다.

좋은 기업이지만 세계적 기업이 되기에는 부족한 엘자 그룹.

국가에서 밀어주는 중국 디스플레이와 백색 가전에 밀리는 날이 멀지 않았다.

“멀리 나가지 않겠네.”

그래도 이성을 잃지 않는 고자룡 회장이 대단했다.

젊은 놈이 함부로 지껄이는 말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경영권 방어에 최선을 다 하십시오……. 그리고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십시오. 오늘 마셨던 술값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수연제처만반성(隨緣諸處萬般成).

우연히 만나 인연이 이루어졌어도…….

두두물물진여체(頭頭物物眞如體) 수수산태태고정(水水山山太古情)이라.

모든 나타나는 현상은 참되고 진실하여 물과 산이 예부터 있었듯 지금 그대로가 진실이라는 걸 사람들은 몰랐다.

냉정한 평가를 부탁했던 고자룡 회장.

그 역시 손톱 밑의 가시에 아파했지만 마주한 진실이, 진실이 아닐꺼라 애써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