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
회귀의 전설
362장. 수연제처만반성(隨緣諸處萬般成) (1)
“연지는?”
“이제 온다고 전화 왔어요.”
“왜 이렇게 늦는데?”
“친구들하고 저녁 먹고 술 마셨대요.”
“친구하고 술? 그 녀석이?”
“연지도 이제 2학년이에요. 아직 미성년자지만 그 정도는 괜찮죠. 그리고 집에 들어온다고 하잖아요.”
“처음이군….”
엘자 그룹 회장 고자룡은 아내의 말에 벽시계를 봤다.
밖에서는 합리적인 기업 운영과 정도를 걷는 경영인으로 소문이 났지만 집에서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보통 아버지처럼 귀가가 늦는 막내딸을 걱정했다.
어느새 시간은 늦은 밤 11시.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연지라는 이름 때문에 놀림을 제법 받았던 막내딸이었다.
그 스트레스로 독하게 공부해 한국대에 들어간 막내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애교도 많았고 아빠라고 뒤를 따르는 유일한 녀석이었다.
집안 가풍 때문에 딸애한테 계열사를 물려줄 수는 없었다.
엘자 가문을 세운 고인호 회장의 유언이었다.
그룹은 대대로 남자 핏줄로 잇도록 유지를 내렸다.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인 덕에 모두 무리 없이 유지를 받들었다.
유지는 2009년이 되어도 바뀌지 않았다.
하 씨 집안이 분가할 때도 큰 걸 뚝 떼 줄 정도로 말의 신의를 지켰다.
“어때요. 이제 연애할 나이가 됐잖아요.”
“아직 어려.”
“선경이는 그 나이 때 남자 친구 있었다고요.”
“선경이는 성격이 괄괄하잖아.”
“연지도 만만치 않아요. 당신 앞이라고 응석을 부려서 그렇지 얼마나 야무진 아이인데….”
가문의 불합리한 규칙 때문에 딸들이 손해 보는 걸 달가워하지 않던 진윤정이 말끝을 흐렸다.
다른 기업 일가와 달리 엘자 그룹은 유독 딸들에게는 상속이 박했다.
계열사 주식도 얼마 안 됐고 기껏 건물이나 현찰 지원이 주어지는 게 전부였다.
다른 그룹 사모들과 달리 진윤정은 이렇다 할 명함도 없었다.
겨우 장학 사업의 이사 신분이 다였다.
돈이야 차고 넘쳤지만 명예가 없었다.
그래도 다른 그룹들과 달리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 버틸 만했다.
국민들 인식도 엘자 그룹에는 아직 호의적이었다.
띠이이이이.
인터폰이 울렸다.
[회장님.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경호원이 연지의 도착을 알렸다.
“알았어요.”
진윤정이 대답했다.
[그런데… 손님과 같이 왔습니다.]
“손님요?”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인터폰 너머로 들려왔다.
[태산 씨… 끄으…. 인사하고 가… 우리 아빠~ 헤헤헤…. 좋은 분이야….]
“???”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인터폰 너머의 목소리는 분명 딸의 목소리였다.
다른 그룹들과 대기업 일가가 밀집해 살고 있는 평창동 부촌이었다.
“일단 들여보내게.”
뒤에 서 있던 고자룡이 인상을 쓰며 허락했다.
[알겠습니다.]
삐이이이이.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얘가 오늘 무슨 일이야?’
진윤정은 당황했다.
커플이 가장 많다는 인문대에 다녔지만 아직 남자 친구 한 번 사귀지 않았던 막내딸이었다.
연애라도 해보라는 소리에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다고 콧방귀를 뀌던 게 얼마 전이었다.
그런 막내딸이 집에 남자를 데려왔다.
그것도 밤 11시.
카디건을 걸치고 진윤정이 서둘러 현관 밖으로 나갔다.
평소에는 자상하지만 지기관리에 실수를 하거나 선을 넘으면 엄하게 대하는 남편이었다.
고연지는 오늘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큼큼.”
못마땅한 표정으로 연신 헛기침을 하며 고자룡도 진윤정의 뒤를 따라 나왔다.
딸의 일탈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어떤 녀석을 데려왔는지 궁금했다.
“태산 씨~ 여기가 우리 집이야. 좋지? 으흐흐흐~.”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딸을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대문을 들어서는 남자.
가로등 불빛에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연지야….”
진윤정이 딸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우아아아아! 요조숙녀 우리 엄마~ 뽀뽀~.”
고윤지는 술에 취해 막내딸 애교 진수를 보였다.
진윤정을 안고 볼에 뽀뽀를 하며 껴안았다.
“뭐하는 짓이야!”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고자룡이 호통을 쳤다.
“오올~ 우리 아빠 센데~ 사랑해요~ 엘자~.”
갑자기 그룹 로고송을 부르며 고자룡에게 다가가 안기는 고연지.
“끄응.”
고자룡은 자신의 호통이 통하지 않자 살짝 체면이 서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연지 씨가 취해 어쩔 수 없이 동행했습니다.”
청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자네가 먹였나?”
“그게….”
“내가~ 먹었지롱~ 아빠! 우리 2차 가요! 순댓국에 쐬주~ 캬아~”
고연지가 제대로 취했다.
“얘, 얘가 왜 이래….”
딸의 취중 행동에 진윤정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낯선 청년 앞에서 딸의 이런 모습이 공개되는 게 부끄러웠다.
“뭐하는 청년인가?”
“한국대 법학과 08학번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법학과…. 응? 뭐라고? 자, 장태산?”
법학과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이름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는 고자룡.
“LOR 대표?”
“절 알고 계십니까?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LOR 투자법인 대표 장태산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반듯하게 인사를 하는 장태산.
“태산 씨~ 들어가요. 아빠 양주가 엄청 많아요~ 으흐흐.”
낮에 봤던 모습과 전혀 다른, 술에 취해 버린 고연지.
장태산 팔을 잡고 집안으로 끌었다.
“연지 씨…. 전 이만.”
“같이 들어가지.”
“여보….”
고자룡의 허락에 진윤정이 한 번 더 놀랐다.
야밤에 누가 찾아오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고자룡이었다.
국무총리가 야밤에 불러도 미리 약속이 돼 있지 않으면 나가지 않을 정도로 예의를 중요시했다.
오늘도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인데 고자룡의 모습이 예상과 달랐다.
“손님 오셨는데 술상 좀 봐줘.”
차도 아니고 술.
“안동주 있지. 그거 준비해.”
회장댁 부탁으로 특별 제조된 안동주는 제사 때나 꺼내는 술이었다.
그런 술을 꺼내오라는 고자룡 회장.
“와아! 술이다 술! 둘이 먹어도 둘이 죽을 맛난 술~♬”
술에 취한 고연지가 이제는 노래를 불렀다.
예정에 없이 한 밤의 만남이 또 이렇게 이뤄졌다.
우연과 우연이 만들어 낸 또 다른 필연의 운명이었다.
***
“앉게.”
“밤늦게 실례가 많습니다.”
“우리 딸이 잘못했지. 자네가 무슨 잘못인가.”
맞는 말이다.
난 그저 순댓국에 소주 한잔하고 싶었을 뿐이다.
세상에…. 소주에 저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다 채운 것도 아니고 반잔씩 다섯 잔을 먹고 고연지는 쓰러졌다.
그 와중에 순댓국은 또 다 비웠다.
코하네는 술이 강했다.
소주 세 병을 마시고 기숙사 통금이라고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그렇게 둘이 남겨진 고연지와 나.
하도 어이가 없어 취기가 다 날아가 버렸다.
조용히 소주잔을 기울였다.
자꾸만 얽히는 그룹 자제들과의 인연.
지난 생에는 상상도 못한 일로 살면서 만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 순간 고연지가 테이블에서 고개를 들었다.
말릴 사이도 없이 또 소주 한 잔을 마셨다.
그때 고연지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곧 들어가겠다는 애교 섞인 대답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또 쓰러졌다.
다른 재벌가들은 경호원이 항시 대기 중이었는데 엘자 그룹은 그것도 아니었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를까 했지만 핸드폰이 잠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차에 태우고 평창동으로 향했다.
시큐리티에 연락해 엘자 그룹 회장댁 주소를 알아냈다.
내공으로 술기운을 모두 날렸다.
오는 중에 음주단속에 차를 한 번 세웠지만 수치가 전혀 나오지 않아 무사통과했다.
그렇게 도착한 엘자 그룹 회장의 저택.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크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내 집보다 살짝 작았다.
평창동 다른 저택들처럼 마당에 소나무와 잔디 정원까지 가꿔져 있었지만 생각보다 소소했다.
집안 장식품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하거나 눈에 띄게 사치스럽지 않았다.
집안 살림도 손때가 묻었을 만큼 고풍스러웠다.
거실에 걸린 기세 짱짱한 소나무 그림 한 점이 가풍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술주정하던 고연지는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고 방으로 끌려갔다.
술에 취해 아픈지도 모르고 엄마를 끌어안고 걸어가는 고연지 모습이 여느 가정집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룹 회장댁에서 보는 광경이 낯설면서도 정겨웠다.
재벌집이나 일반 가정이나 사는 게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모두가,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다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좀 복잡하고 곤혹스러웠다.
“받게.”
“넵!”
죄지은 것도 없는데 자세가 바르게 잡혔다.
LOR 투자 대표가 아니라 한참 인생 선배 앞에 불시에 앉게 되었다.
“난 자네를 알고 있네. 나이도 어린데 대단하더군.”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
“작은 재주라고 하면 대한민국 전문 투자자들이나 오너들은 약사발을 들어야겠군.”
농담을 하자고 던진 말 같은데 뼈가 있었다.
다른 회장을 대할 때와 기분이 좀 달랐다.
오정 회장님과는 분위기가 더 틀렸다.
50대 중반의 고자룡 회장.
엘자 화학을 모기업으로 하는 기업집단의 수장이었다.
엘자 전자, 엘자 디스플레이, 엘자 화학이 그룹의 핵심 기업이었다.
사돈이었던 CS 그룹을 분리해 주고도 재계 서열 3위에 올랐다.
실로 대단한 기업가였다.
창업자인 고인호 회장은 진주 만석꾼 하 씨 집안과 동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의리는 계속 됐다.
계열사를 깔끔하게 분리해 주고 서로 미래의 무한한 발전을 빌어주며 끝났다.
자식들끼리도 계열사 상속 문제로 싸우는 타 그룹과 색깔이 달랐다.
지주회사 전환도 빨랐고 오너 일가의 소유와 경영 분리도 나름 깔끔하게 정리했다.
주주배당도 다른 그룹과 달리 잘하는 편이었다.
보통의 한국 재벌들이 선택하는 방법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탈세 의혹이나 비자금, 하청업체 착취, 비정규직 대우나 뇌물수수에서도 욕을 덜 먹었다.
인간존중과 고객가치 창조가 그룹 이념일 정도였다.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독특한 향이 도는 안동소주의 주향이 거실에 퍼졌다.
“오랜만이군. 아니 처음인가? 집에서 낯선 손님과 이 시간에 술을 마셔보는 게 말이야.”
“그래서 옛 선인들이 수연제처만반성(隨緣諸處萬般成)이라고 말씀하셨나 봅니다.”
“인연 따라 어디서도 또 무엇으로 이루어진다라…. 젊은 친구가 별걸 다 아는군.”
고자룡 회장이 희미하게 웃었다.
스마트한 인상과 어울리는 미소였다.
“저도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습니다. 연지 씨와 오늘 처음 만나 이 시간까지 함께했는데 이렇게 늦은 밤에 회장님까지 뵙게 되었습니다.”
나도 인연의 법칙이 놀라울 뿐이었다.
“한잔하지.”
긴 말이 오고가지 않았다.
잔과 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술이 달았다.
독한 것 같았지만 끝 맛이 입에 침이 가득 돌 정도로 달달했다.
“좋군요.”
“그래? 술맛을 아는군.”
“귀한 술 같습니다.”
“특별히 부탁해서 제조한 녀석이지. 아버지가 좋아하셨어. 대대로 가문 제사에 사용하는 술이야.”
“귀한 술 감사합니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당연하지.”
고자룡 회장이 술잔을 내려놓고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래도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한 가지 묻고 싶네.”
질문을? 왜?
“자네는…. 우리 엘자 그룹을 어떻게 생각하나?”
엷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빛만은 불꽃이 튈 정도로 이글거리는 고자룡 회장의 눈동자.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