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1화 (360/1,284)

 # 361

회귀의 전설

361장. 괜찮은 남자 (1)

“내가 필요하다고?”

“제 코치님이 되어 주십시오.”

“나 알파인 스키 전문이야. 노르딕 쪽은 잘 몰라.”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전 교수님이 꼭 필요합니다.”

“왜?”

‘도대체 이 자식 뭐하자는 거야?’

조교에게 법학과 장태산의 이름을 듣는 순간 서준호 교수는 희열 대신 온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갔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크로스 컨트리 스키 대학부 금메달리스트 주인공이 바로 장태산이었다.

게다가 100미터 단거리 기록마저 끝내줬다.

스프린터 달린 육상화에, 자세까지 잡고 제대로 뛰었다면 한국인은 불가능하다는 마의 9초대도 가능했을지도 모르다.

그런 녀석이 서준호에게 스키 코치가 되어 달라고 청했다.

수업은 조교 전화를 받은 직후 끝냈다. 더 이상 수업을 진행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장태산을 교수실로 데려왔다.

다른 과도 아니고 공부벌레들이 주위에 득실거리는, 법대생 출신이라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

공부도 잘하는 놈이 외모도 끝내줬고 스포츠에도 만능이었다.

교수실로 이동하는 동안 몇 가지 질문을 해봤지만 무늬만 법대생이 아니었다.

지난 두 학기 동안 전 과목 성적이 올 A+을 받았다고 했다.

솔직히 보통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교수님, 전 그냥 인생 재밌게 살고 싶은 학생일 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즐기는 소소한 행복 같은 개념입니다.”

“소소한 행복? 농담이지? 네 실력이면 올림픽 메달도 가능해!”

“그래서 2010년 동계 올림픽에 출전하려고 합니다.”

“사법시험 안 봐?”

“1차는 봤습니다.”

“그럼 사법시험 봐야지. 두 마리 토끼 못 잡는다. 네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봤지만 올림픽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아.”

“취미 활동입니다.”

“끙….”

생글 웃으며 고작 메달을 딴 일이 취미 활동 정도라고 말하는 장태산이 밉지가 않았다.

서준호 교수는 입만 산 놈보다 실력으로 보여주는 사람을 좋아했다.

체육인의 피는 승리에 대한 열정과 투지에 늘 고팠다.

장태산의 태도는 역시 장난은 아니었다.

눈빛이 진지했다.

“부럽다. 공부도 잘하는 녀석이 운동 신경까지 타고 났으니….”

“집도 먹고 살 만합니다.”

“뭐라고? 하하하하.”

어린 녀석이 농담도 적당히 할 줄 알았다.

서준호는 귀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 웃음을 터트렸다.

“교수님, 스폰까지 잡아 놨습니다. 올림픽 구경 한 번 가셔야죠.”

“스폰? 어디?”

“TS 그룹요.”

“TS 그룹!!!”

10대 그룹에 들 만한 기업을 스폰으로 잡아놨다고 당당히 말하는 장태산.

“진짜야?”

귀가 의심스러웠다.

쉽게 믿기지 않았다.

“기다려 보십시오.”

장태산은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뭐야? 지금 확인시켜 주겠다는 거야?’

서준호 교수는 흥미롭게 장태산을 지켜봤다.

“서준호 교수님과 만나고 있습니다. 말씀 좀 부탁합니다.”

장태산은 다짜고짜 전화 연결이 되자 몇 마디를 통화를 하고 서준호 교수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안녕하십니다. 한국대 체육교육과 교수 서준호입니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였기에 정중하게 신분을 밝혔다.

- 반갑습니다. TS 그룹 회장 하관우입니다.

“네? 누, 누구요???”

- 회장 하관우입니다.

서준호 교수는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아니. 회장님께서 어떻게….”

- 우리 장 대표 잘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이 번호로 연락 주십시오. 회사 비서실에 말해 놓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최대한 돕겠습니다!”

- 조만간 저녁 식사에 초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 그럼….

서준호 교수는 품고 있는 야망이 컸다.

실력도 있지만 꿈도 컸다.

대한민국에서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류층과 끈이 닿아야 한다는 걸 잘 알았다.

속물까지는 아니었지만 세상사는 법을 알았다.

그런 서준호 교수에게 재벌 회장과의 인연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 승낙하시는 거죠?”

“…장태산, 너 정체가 뭐냐?”

“아시면… 머리 많이 아파지십니다~.”

빤히 눈앞에 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장태산을 바라보는 서준호.

보통 이상의 배경을 갖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말만 해라. 내가 마음먹으면 또 확실히 도와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복 받으실 겁니다!”

대기업 스폰을 받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 말고도 얻는 이익이 말로 다 할 수 없다.

교수 사회에서도 어깨에 힘을 더 줄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갑자기 굴러 들어온 복덩이.

서준호는 손을 내밀어 장태산과 힘껏 악수를 했다.

계약 체결이 된 것이다.

***

“야심 많은 교수님이야~ 훗.”

이것저것 감투를 많이 썼다는 건 그만큼 명예욕이 강하다는 증거였다.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으로 관상을 좀 봤다.

물욕보다는 명예욕이 높은 상이 맞았다.

계획적으로 접근해 확실히 마무리까지 지었다.

서준호 교수는 이제 든든한 방패가 돼 줄 것이다.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체육계에서도 든든한 병풍을 세운 셈이다.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다 뒤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처지와 상황이 달라졌다.

“어?”

교수실에서 나오니 사범대 본관 정문 앞에 익숙한 두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안 갔어요?”

고연지와 코하네가 어색하게 거리를 둔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고연지가 상큼하게 아미를 찌푸렸다.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뭐가요?”

“운전기사로 사람을 부렸으면 밥 한 끼 사는 게 일반적이고 상식적이지 않을까요?”

“본인이 자청한 걸 잊었습니까?”

“저 때문에 편안했잖아요.”

바쁜, 엘자 그룹 막내딸은 토라진 것 같았다.

세상에 태어나 오늘처럼 관심 밖의 인물이 된 것도 처음 겪은 일일 것이다.

“코하네는 안 바빠?”

“태산 씨 기다리는 거 좋아요.”

고연지와 달리 활짝 웃는 코하네.

“오늘 정말 멋있었어요. 태산 씨 스포츠 스타 같아요.”

코하네가 엄지 척을 하며 날 띄워줬다.

애교가 많은 일본 여성이었다.

“갑시다.”

“어디를요?”

“죽여주는 밥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그래야죠~ 양심이 있다면~.”

오늘 수업에서 만난 사이지만 오후 내내 함께한 동지가 됐다.

두 여인에게 대접할 저녁 메뉴가 떠올랐다.

3월 초라 아직 바깥 날씨는 꽤 쌀쌀했다.

이럴 때는 그 메뉴가 끝내줬다.

“가죠.”

“이제 태산 씨가 운전해요.”

차가 법대에 있긴 하지만 자신의 차를 내주는 고연지.

그녀 캐릭터도 독특했다.

“저는….”

눈치를 보는 코하네.

“같이 가요. 이것도 인연인데~.”

둘 보다는 셋이 좋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코하네는 꾸벅 고개를 두 번이나 주억거리며 넉살 좋게 차 뒷좌석에 앉았다.

“출발!”

계획했던 대로 개운하게 하루가 마무리 되었다.

두 여인을 태우고 기분 좋게 출발했다.

어울리지 않게 지프를 타고 다니는 고연지.

그녀의 차를 몰고 학교를 빠져 나갔다.

***

“이, 이게 뭐죠?”

“이걸 몰라요?”

“네…. 오늘 처음 봐요.”

“세상에~ 이 맛있는 걸 처음 먹다니.”

장태산이 장난스럽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코하네는 얼큰한 거 좋아합니다!”

‘이걸 먹으라고?’

고연지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신림동으로 왔다.

그리고 자리를 잡은 허름한 식당.

“이거 보약입니다. 24시간 돼지 뼈를 우려낸 국물을 육수 베이스로 사용합니다. 보세요. 다른 집과 달리 부속물도 거의 없고 순대하고 고기만 들어 있어 잡내도 없어요~.”

입맛을 다시며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설명하는 장태산.

고연지는 난생 처음 보는 순댓국의 비주얼을 보고 멘붕에 빠졌다.

사람으로 태어나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보글보글 뚝배기 안에서 끓고 있는 순대와 돼지고기.

그리고 얼큰한 국물 냄새는 식욕을 자극하기보다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여기 깻가루가 진짜입니다. 줘 봐요.”

당황하는 고연지의 뚝배기에 묻지도 않고 깻가루와 부추를 듬뿍 넣어주는 장태산.

“매운 거 안 좋아하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고연지.

집에서는 아침에 빵과 샐러드를 먹었다.

점심에는 수업 시간을 조절해 밖에서 먹거나 아주머니가 만들어 주는 특별 샌드위치에 커피 정도를 마신다.

그리고 저녁에는 집에서 부모님과 같이 정찬으로 하루 식사를 마무리했다.

순댓국은 생애 첫 경험이었다.

“청양고추하고 양념 살짝 넣었습니다. 이제 먹어봐요.”

자상하게 세팅해 놓고 웃는 장태산.

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의 저녁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최소 삼겹살 이상이면 됐다.

하지만 이런 음식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태산 씨. 저도 부탁합니다!”

코하네가 웃으며 꼬리를 쳤다.

고연지 앞에서는 능숙하게 한국말을 사용했었던 코하네였다.

하지만 단어들이 딱딱 끊어지는 외국인 말투로 외국인 티를 팍팍 내는 코하네.

보면 볼수록 일본 여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운 거 잘 먹는다고 했으니~.”

장태산은 붉은 양념을 더 넣고 다시 한 그릇을 뚝딱 세팅했다.

“소주는 마실 줄 알죠?”

“그, 그럼요.”

고연지는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소주도 처음이다.

학교 과모임에서도 소주는 절대 사양했다.

그녀의 배경을 알고 있는 학과생들은 결코 그녀에게 소주를 권하지 않았다.

쪼로로.

잔에 소주가 정확히 반절 채워졌다.

“오늘 우연한 인연을 기념하며~.”

잔을 들고 건배사를 선창하는 장태산.

“간빠이!”

코하네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잔을 들고 소리쳤다.

“위… 하여!”

고연지는 코하네에게 기죽기 싫어 잔을 부딪쳤다.

용기를 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와인과 전혀 맛이 다른 소주의 독특한 향기와 독기에 고연지는 자신도 모르게 주당들이 뱉어내는 신음을 냈다.

“맛있죠? 이제 국물 먹어봐요.”

입에서 불이 날 것 같아 고연지는 장태산의 마법 주문 같은 말에 이끌려 수저로 국물을 떠 입에 넣었다.

“!!!”

그 순간 입안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풍미에 눈이 번쩍 떠졌다.

입안 가득하던 소주의 독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때요?”

장태산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어왔다.

“마, 맛있어요!”

진심이었다.

탁한 것 같았지만 맑고 시원한 맛이 입안에 쫙 감돌았다.

동시에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 느껴졌고 전체적으로 얼큰했다.

고연지는 태어나 이렇게 맛이 다양한 음식은 처음이었다.

“죽여줘요!”

코하네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 본격적으로 달려 볼까요?”

장태산이 다시 소주병을 들었다.

처음으로 맛보고 경험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었다.

고연지는 들뜨는 기분으로 잔을 내밀었다.

언제 다시 경험하게 될지 모르는 특별하고 유쾌한 자리였다.

소주 한 잔에 빠르게 올라오는 취기.

눈앞에서 술을 따라주는 남자가 더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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