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0
회귀의 전설
360장. 체육이 만만해? (2)
‘이 녀석은 뭐야?’
서준호 교수는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체교과 필수 전공에 가끔 이런 놈들이 찾아왔다.
어릴 때 운동 실력을 믿고 육상이나 스키 같은 체교과 전공과목을 만만하게 보고 도전한 것이다.
공부 잘하는 놈들 중에 한두 명씩 이런 꼴통이 끼어 있었다.
체육이 몸만 받쳐주면 되는 걸로 알고 만만하게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태도였다.
체육도 공부만큼 타고난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부단히 노력해야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한국대 체교과는 공부는 물론 운동 실력 둘 다 소유한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
어설픈 생각에 객기 부리는 학생들이 도전할 과목이 절대 아니었다.
“교수님. 부르셨습니까.”
서준호 교수가 출석을 체크하다 손짓으로 장태산을 앞으로 불러냈다.
“법대생이 왜 온 거야?”
나오기 전에 받은 임시 출석부에 기재된 법학과 08학번 장태산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서준호 교수였다.
서준호는 인상을 쓰며 괄괄하게 나갔다.
“체육 교양과목 패스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교양과목은 따로 있잖아. 이거 우리 과 애들 필수 과목이야.”
“일반 학생이 들어도 아무 문제없다고 하던데요. 교무처에 확인했습니다.”
“그거야 문제없지만 다른 게 문제잖아.”
“뭐가 말입니까?”
“몰라서 물어? 체육이 만만해?”
서준호 교수는 자존심이 강했다.
한국대 졸업생임에도 체육교육과 출신이라는 학벌이 발목을 잡았다.
후에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야 그나마 무시를 덜 당하게 됐다.
농생대와 함께 체육교육과는 항상 다른 과 학생들의 무시를 받았다.
학벌로 인정받는 한국 사회에서 한국대 출신임에도 덮어 놓고 무시당하기 일쑤인 유일한 두 학과였다.
그런 까닭에 더 예민했다.
타과생들의 개념 없는 도발에 강하게 응대했다.
대부분은 이 정도에서 꽁무니를 빼고 내빼면서 끝났다.
하지만…….
“저 체육 좋아합니다. 건강한 육신에 바른 정신이 깃드는 법입니다.”
‘이 자식 싸이코야?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거야? 아니면 진짜 무시하는 거야?’
예상 밖의 진지한 장태산의 표정에 서준호 교수는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교수님~ 법대생한테 현장 교육 한 번 들어가시죠~.”
체교과에서 가장 운동능력이 뛰어난 2학년 과대표가 나섰다.
“맞아요! 말보다는 실력이죠!”
“법대생 오빠~ 미팅이나 한 번 주선해 주세요~. 흐히히.”
여학생들도 동조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봐도 허우대 멀쩡한 훈남이었다.
체교과도 사범대 소속이었기에 여학생 숫자가 반절 정도 됐다.
여학생 대부분이 장태산에게 호감을 보였다. 몸매도 체교과 남학생들보다 호리호리하고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 과목 패스하는 방법 알지?”
학생들의 요청에 서준호 교수도 승낙했다.
현장 교육도 나쁘지 않았다.
체육 실기가 어렵다는 걸 몸소 가르쳐 깨우침을 주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넵! 잘 알고 있습니다.”
실력만 있다면 패스가 가능했다.
체육인은 오로지 결과로만 말하고 증명할 뿐이다.
아름다운 패배란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었다.
“재한이가 상대해 줘라.”
“넵!”
과대 백재한이 선택 됐다.
체교과 2학년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발군인 학생이었다.
단거리 육상이 특기였다.
“법대생. 재한이에게 털리면 바로 강의 빼.”
“알겠습니다.”
법대생 장태산도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애들은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를 아니 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 법대생을 보며 서준호 교수는 타이머를 들었다.
“저기 트랙 끝에 가서 신호와 함께 출발해.”
“법대생 파이팅~.”
“재한아 살살 모셔라~.”
체교과 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장난스럽게 함성을 질렀다.
일반인들의 근육과 체육인의 근육은 발달되는 부분부터가 달랐다.
하체가 단단한 백재한.
가볍게 뛰며 100미터 트랙을 향했다.
‘법대 새끼들 다 재수 없어!’
1학년 교양 과목 때 좋아했던 여학생이 있었다.
호감 있음을 밝히고 이것저것 공을 들였다.
여학생도 처음에는 관심을 보였다.
백재한은 08학번 중에 사범대 얼짱에 들 만큼 인물이 훤했다.
그러나 어느 날 별 볼일 없는 찌질이 같은 법대생이 건넨 쪽지 한 장에 그 여학생은 백재한을 멀리했다.
키도 작고 여드름 박박 피부에 안경까지 쓴 법대생이었다.
외모는 물론 근육질 몸부터 시작해 밀리는 게 없었지만 현실의 벽은 냉혹했다.
되지도 않은 찌질이에게 밀렸다는 생각에 백재한은 법대생이라면 이를 갈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법대생의 코를 납작하게 해줌으로써 스스로의 자존감을 다시 새우는 것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백재한은 제대로 밟아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꺄아아아! 장태산 파이팅!!!”
코하네가 방방 뛰었다.
‘얘는 쪽팔리는 것도 모르나?’
도도한 인문대 퀸카 고연지는 코하네의 반응에 얼굴이 붉어졌다.
체교과뿐만 아니라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학생들까지 돌아볼 정도였다.
“쟤 장태산 아냐?”
“어머! 맞네!”
장태산은 유명인이 맞았다.
종합운동장은 학교 정문에 가까워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태산을 알고 있던 일단의 여학생들이 속속 모였다.
한눈에 봐도 여학생들 눈빛에 관심이 대단해 보였다.
“이번에는 체교과 교육 중이야?”
“흐흐흐. 쟤들 오늘 난리 났네.”
공대생들로 보이는 남자들도 자전거를 타고 가다 멈춰선 채 구경했다.
‘장태산…… 너 도대체 뭐야?’
제대로 의구심에 빠진 고연지.
출발선에 여유롭게 서서 스타트 자세를 잡는 장태산을 보고 있으려니 입이 쓰디 썼다.
***
“너…… 이 새끼……. 오늘 씨 제대로 발라버릴 거다!”
이 자식은 내가 뭐 어쨌다고 이렇게 적개심이 강해?
옆에서 몸을 풀고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체교과 과대표가 괜히 욕을 퍼부었다.
오늘 처음 보는 녀석이지만 녀석이 풍기는 적개심은 배고픈 오크 수준이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체육과 관련된 학과인 체교과.
서준호 교수의 도움이 필요했다.
올림픽 대표로 선발 출전하기 위해서는 스폰서 말고도 대한체육회에 영향력 있는 체육계 인사가 필요했다.
이것저것 귀찮게 하지 못할 방패막이 말이다.
서준호 교수는 태권도 연맹 조직위원회 위원 및 프로농구, 한국야구위원회 등의 사외이사와 자문위원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현 문광부 정책자문 위원이기도 했다.
한국대 교수라는 신분이 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대단했다.
교수 신분임과 동시에 체육계 알짜 감투는 다 둘러썼다.
올림픽 대표가 되면 태릉선수촌 생활은 필수였다.
바쁜 나에게는 결코 필요 없는 장소.
선수촌 입소를 막기 위해 단단한 방패가 되어 줄 서준호 교수였다.
뿐만 아니라 명목에 지나지 않겠지만 코치도 필요했다.
그 자리에 서준호 교수가 적임자였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수업을 신청했다.
그와의 첫 대면에 강한 인상을 남겨야 했다.
교수지만 학창 시절 체육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실력으로 나를 증명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동계 체전 대학부 금메달을 내밀어도 되지만 그건 맛이 심심했다.
어차피 체육 교양 학점은 필수다.
운동도 하고 학점 관리도 할 수 있었다.
“씨 못 바르면 형님이라고 해라.”
“뭐?”
“귓밥에 기름 꼈냐? 못 알아들어? 나한테 지면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새끼야.”
이유 없이 악감정부터 품는 놈한테 좋은 말 할 성격은 안 됐다.
싱긋 웃음 띤 얼굴로 녀석을 기분 나쁘게 갈궜다.
“이 X새끼가!”
찰진 욕이 돌아왔다.
“체육인이 그러면 쓰나~. 나중에 애들 가르칠 입에 걸레를 물고 살면 못써~.”
“너……. 수업 끝나고 남아. 오늘 제대로 죽여준다!”
화가 나 으르렁거리는 하룻강아지.
“콜.”
어리석은 녀석이 겉모습만 보고 무덤을 팠다.
“준비해!”
교수가 100미터 전방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올라가는 손.
육상 수업이라 그런지 스타팅 블록이 바닥에 준비되어 있었다.
과대표는 스파이크가 박혀 있는 육상화까지 신고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였다.
반면 난 초등학생 달리기 준비하는 폼으로 평범하게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병신……. 크크.”
내 폼을 보며 비웃은 과대표.
“출발!”
그 순간 교수의 손이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내려지며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타다닷.
상체부터 앞으로 치고 나가는 체교과 과대표.
“백재한! 백재한!”
체교과 여학생들의 응원 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나 역시 출발은 늦었지만 힘차게 보폭을 넓히며 팔을 흔들며 트랙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출발은 미약하나 마지막에 웃게 될 자는 오로지 나였다.
쇄애애앳.
귀를 가르는 바람소리.
먼저 출발했던 과대표 녀석을 순식간에 뒤로 재껴 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
“!!!”
체교과 2학년 과대표 백재한은 자신을 치고 나가는 법대생의 등을 보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백재한은 전직 육상 선수였다.
10초대는 돌파하지 못했지만 준수한 11초 초반 성적으로 고등학교 때까지 상을 몇 번 타기도 했다.
출발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오늘 수업을 위해 방학 때 육상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학교 교수가 목표였던 만큼 교수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특히 서준호 교수는 한국대에서도 실력을 인정받는 본교 출신 교수에 해외 유학파였다.
교수에게 잘 보이면 박사 학위뿐만 아니라 타 대학 교수 자리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런 백재한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출발이 분명 늦었음에도 50미터 지점에서 곧바로 백재한을 치고나간 법대생.
녀석이 등이 점점 멀어졌다.
“이이!”
이를 악물고 팔을 더욱 거칠게 흔들며 뒤쫓는 백재한.
하지만 결코 잡을 수 없었다.
분노에 숨이 꼬였다.
숨이 꼬이자 몸의 밸런스가 깨지면서 발이 엇박자를 탔다.
콰다다당.
집중력까지 흐트러지며 트랙 위에 볼품없이 고꾸라졌다.
“크으윽.”
넘어지면서 탄성에 의해 몸이 튕기고 피부가 까졌다.
배워놨던 낙법으로 큰 부상은 면했지만 얼굴까지 보기 좋게 까져 버린 백재한.
그의 눈에 바람 같은 속도로 트랙 끝에 도달한 법대생의 등판이 보였다.
“허억…….”
교수 서준호는 몰아치는 충격에 신음을 삼켰다.
백재한을 연호하던 체교과 학생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체교과에서 10초대에 가장 근접한 과대표가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었다.
출발이 반절이라는 100미터 육상의 이론이 보기 좋게 깨졌다.
그냥 서서 평범하게 스타트했음에도 50미터 지점에 들어서며 백재한을 추월해 버린 법대생 장태산.
숨도 차지 않은 듯 빙긋 웃고 있었다.
‘10초…… 50!’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타이머로 시간을 쟀다.
전자장치에 비교할 수 없지만 거의 근접한 시간을 추출하는 게 가능했다.
그런 서준호 교수 눈에 정확하게 보이는 엄청난 기록.
2009년까지 한국 신기록은 10초 34였다.
9초대 올림픽 기록에는 못 미쳤지만 이 정도도 대단한 실력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운동화에 체육복을 입고 뛴 법대생은 한국 신기록에 근접한 기록을 냈다.
“…….”
주변 사방이 침묵에 휩싸였다.
체교과 학생들은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하게 알았다.
자신들의 명예를 짊어진 과대가 참패했다.
교수가 놀랄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차를 보이면서 말이다.
그것도 누구나 흉내 낼 수 있는 평범한 주법으로 뛴 법대생이었다.
띠리리리리리 띠리리리리리.
그때 서준호 교수의 휴대폰이 침묵을 깨며 울렸다.
정신없는 중에 서준호 교수는 무의식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조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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