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9화 (358/1,284)

 # 359

회귀의 전설

359장. 체육이 만만해? (1)

‘이 남자 뭐야?’

고연지는 남자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언니 고선경이 어느 날 모임에 나갔다고 돌아와 흥분한 목소리로 연락을 했다.

한국대 법학과에 재학 중인 장태산이라는 남학생을 한 번 만나보라고 말이다.

자수성가한 청년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인재라고 했다.

불과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 연대 그룹 자제들과 한판 겨뤄 이겼다는 것이다.

고연지도 언니 말만 믿을 수 없어 그룹 경호실을 통해 나름 알아봤다.

아빠도 주목할 정도로 투자의 귀재였다.

재계의 거장인 오정 회장과 인연이 깊다는 정보를 추가로 얻었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에서도 괴짜로 통하고 있었다.

실기 실력이 대한민국 첫 번째로 평가받는 한국대 음대와 미대 실기 강의를 교양으로 돌파해버린 괴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학과 컴공과 전공까지 진짜 실력으로 뭉개버린 천재였다.

흥미가 생겼다.

한국대를 다니는 동안 처음으로 눈에 차는 인물이었다.

사진을 입수해 미리 장태산의 인물을 파악해 두는 일도 잊지 않았다.

언젠 어디서든 마주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인문대 로비에서 그를 봤다.

연예인들처럼 자체발광하는 외모를 겸비한 장태산.

고연지는 장태산의 실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룹 행사에 참여했던 슈퍼스타들도 장태산에게 밀릴 정도였다.

범접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같은 강의를 들었다.

인문대 전공과목 교수님의 교양 강의였다.

다른 여학생들도 장태산에게 관심이 있는 듯했지만 쉽게 그의 옆에 앉지 못했다.

고연지는 당당하게 장태산 옆 자리를 차지했다.

가볍게 통성명을 했다.

엘자 그룹 일가의 막내딸임을 알았음에도 처음 잠깐만 놀라던 장태산.

곧 관심도 두지 않고 수업에 빠져들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한눈에 봐도 크게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인문대 퀸카 소리를 듣던 고연지였다.

하지만 고연지를 보는 장태산의 눈은 그저 그런 여학생이 옆자리에 앉은 듯 취급했다.

다른 남학생이었다면 황송하다는 표정을 짓거나 극도의 호감을 보였을 것이다.

지금껏 그렇게 대우받고 살아왔던 고연지는 장태산 앞에 찬밥 신세가 됐다.

장태산은 고연지보다 강의에 관심이 더 많아 보였다.

그리고 첫 번째 발표자가 되겠다며 자진해서 손을 들었다.

시 창작은 생각보다 쉬운 수행 과제가 아니다.

문예창작과가 없는 한국대 인문대에는 시 창작보다는 작품 분석과 문학적 평가가 주를 이뤘다.

학점이 인색하지 않고 교수님이 유쾌해 인기 강의가 됐지만, 여태껏 A+를 받은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얘는 또 뭐야?’

스미마셍 하며 인사를 하고 장태산 옆자리에 앉는 일본 여자.

한눈에 봐도 귀염성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인문대 학생은 아니었다.

“코하네?”

“하이.”

장태산이 아는 체를 하자 가지런한 윗니를 드러내 보이며 활짝 웃는 여학생.

그녀는 고연지보다 더 자연스럽게 장태산에 가깝게 다가가 앉았다.

다른 자리와 달리 중앙에 위치한 자리는 세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돼 있었다.

한 마디로 중앙에 앉은 장태산은 양 옆에 미모의 여인 둘을 앉히고 그 사이에 낀 것이다.

“고연지.”

“…….”

코하네에 신경을 쓰다 교수님의 출석 체크에 대답할 기회를 놓쳤다.

“대답 안 해요?”

장태산이 조용히 고연지에게 눈치를 보냈다.

“네? 네!”

정신을 차리며 누구보다 큰 소리로 대답하는 고연지.

“고연지. 그 옆에 친구 멋있지?”

강의실 학생들의 시선이 고연지에게 쏠렸다.

‘뭐야…….’

순간 쪽팔림에 고연지는 얼굴이 붉어졌다.

태어나 오늘처럼 민망하고 부끄러운 상황을 맞닥뜨린 경우는 처음이었다.

“네! 멋있으므이다!”

고연지가 대답을 못하고 주춤거리는 사이 코하네가 힘차게 말했다.

“푸하하하하하하하!”

“키키키키키.”

급기야 사방에서 웃음이 터졌다.

일본 여학생의 사심 가득한 대답은 누가 봐도 통쾌하고 재미있는 상황이 됐다.

‘둘이 아는 사이야?’

코하네의 말에 장태산도 금방 미소를 머금었다.

어정쩡하게 시작된 첫 만남.

고연지는 알 수 없는 패배감에 몸서리를 쳤다.

***

“저기요.”

“저요?”

출석 체크를 끝낸 교수님이 지난 강의 때 A 학점을 받은 학생의 시를 읊어줬다.

그리고 가볍게 끝난 강의.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고연지가 날 불렀다.

그녀의 눈동자에 처음과 달리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자존심, 호감, 민망함 등등.

“오후 강의 더 없죠?”

뭐지? 이 말투는?

고연지가 부드러운 말투로 도발을 해 왔다.

“왜요?”

“차 한잔해요.”

차? 언제 봤다고.

“강의 있습니다.”

“이 시간에요?”

오후 8교시 강의가 끝났다.

다른 학과라면 이 시간 후에는 강의가 없는 게 맞았다.

하지만 나는 남아 있었다.

“같이 가실래요?”

“네?”

“못 믿겠다면 직접 봐야죠.”

“저는 같이 가보고 싶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코하네가 활짝 웃으며 바짝 다가왔다.

도쿄대에 재학 중인 경영학과 교환학생 코하네.

단 한 번 우연히 마주쳤던 그녀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 몰랐다.

일본인인 그녀가 설마 이 강의를 들을 수도 있을 거란 상상도 못했다.

뭐가 좋은지 연신 생글생글 웃는 코하네.

발음이 정확할 때도 있지만 조금 전처럼 일본인 특유의 말투가 튀어나올 때도 있었다.

아낌없이 나에게 사심을 드러내 보이는 그녀였다.

“그, 그럼 같이 가요!”

고연지도 뭔가에 홀린 듯 갑자기 합류했다.

“차 가져왔죠?”

“네…….”

“그럼 법대로 가죠.”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갔다.

“태산 상. 보고 싶었어요~.”

곧장 쪼로로 따라서 달려오며 애교를 부리는 코하네.

“하아.”

또각또각.

한숨을 푹 내쉬며 고연지가 힐을 신고 뒤따라 걸어 나왔다.

갑자기 얽혀버린 나와 두 여학생과의 운명.

피식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

“이게……. 왜 우리 과에 온 거야?”

한국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 교수 서준호는 교수실로 배달된 감사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준호 교수는 스포츠마케팅과 스포츠경영학, 스포츠전략기획론을 비롯해 실기로 스키와 육상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국대학교에서 스포츠는 취미나 건강을 위한 운동이지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과거 패기로 야구나 농구, 동아리를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결성한 적이 있지만 대학 리그에서 언제나 꼴찌였다.

고영대와 연지대는 스포츠로 학교 라이벌이 가능했지만 한국대는 무적이었다.

나갔다 하면 깨졌기에 그 어떤 학교도 한국대와 경기를 하려 하지 않았다.

체육학과가 없는 한국대에서 그나마 스포츠 쪽에 연관되어 있는 체육교육과.

서준호 교수는 대한체육회에서 날아온 감사패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누구야? 도대체 누가 동계 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거야?”

2월에 있었던 전국 동계 체전 크로스컨트리 15KM 프리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한국대 학생을 배출한 학교에 주는 감사패였다.

방학 때 감사패가 도착했다.

조교가 새로 바뀌면서 감사패가 도착했었다는 사실이 이제 알려졌다.

오후에 이 일로 학과가 발칵 뒤집어졌다.

체육교육과지만 나름 체육인들이었다.

전국 동계 체전 금메달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잘 알았다.

그렇게 따고 싶어도 인연이 닿지 않아 흠모만 했었다.

금메달을 딴 학생을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대한체육회 쪽으로 급히 전화를 넣었다.

담당자가 출장 중이라 내일 다시 전화를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도대체 누구야?”

이름도 없었다.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정보가 다였다.

조교들에게 정보 취합 명령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연락이 없었다.

띠띠띠띠.

핸드폰 알림음이 울렸다.

9교시 수업 시간.

체교과 전공 필수인 육상 트랙 수업은 1학점 강의였다.

그래서 상당수 체육 실기 수업은 9교시에 배정됐다.

서준호 교수는 체육복과 임시 출석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강의실이 아닌 종합운동장 트랙에서 수업이 있다.

수업 방식은 간단했다.

자세를 알려주고 랩타임 성적 순위로 학점이 나갔다.

공부와 체육이 병행되는 체육교육과만의 특징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찾아내면 대박이야.”

스키 담당 교수인 서준호도 뼛속까지 체육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스키 선수로 뛰었다.

그런 그도 전국 동계 체전에서 순위권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희망이 보였다.

전국 체전 대학부 1위라면 올림픽 대표로 뽑힐 가능성이 높았다.

특기생이 없는 한국대에서는 역사상 거의 찾아보기 힘든 사례였다.

***

“진짜……. 이게 뭐야.”

고연지는 이 상황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인문대에서 차에 장태산과 일본 여학생을 태우고 법대로 향했다.

그곳에서 장태산은 자신의 차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장태산을 태우고 다시 종합운동장으로 향했다.

졸지에 운전기사 신세가 됐다.

정말 9교시에도 수업이 진행되는 과가 있었다.

그것도 1학점짜리 체교과 전공 수업.

운동장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몸을 풀었다.

모두 다 체교과 단체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개중에 홀로 붉은색 선이 가미된 강렬한 운동복을 입고 있는 장태산.

큰 키에 누가 봐도 잘생긴 외모라 홀로 튀었다.

체교과 학생들이 장태산보다 몸이 더 부실해 보였다.

체교과생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수군거렸지만 장태산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미쳤네……. 미쳤어.”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상대는 체교과였다.

체교과 실기는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과목이 아니었다.

겉모습이 그럴싸해 보이는 장태산이 덤빌 상대들로 보이지 않았다.

“왜요?”

그때 옆에 서 있던 코하네가 순진하게 물었다.

“네? 뭐가요?”

“태산 씨가 못 버틸 것 같아요?”

수업 시간에는 귀여운 척 일본인 발음을 흉내 내던 교환 학생이 정확하게 한국말을 구사하며 말을 걸어왔다.

‘얘는 정체가 뭐야?’

장태산과 아는 사이인 듯했지만 그렇다고 친해 보이지는 않았다.

“당연하죠. 쟤들 체교과 학생들이에요. 우리 학교에서 제일 힘 센 애들이라구요.”

고연지는 쉬운 단어들만 골라 설명했다.

“글쎄요……. 쟤들이 개발릴 것 같은데?”

“네? 뭐 발려요?”

고딩 때나 사용하던 비속어를 서슴없이 내뱉는 코하네.

“그런데 연지 씨는 왜 연지대 안 갔어요?”

“뭐, 뭐라고요!”

학창시절 항상 친구들에게 이름으로 놀림을 당했다.

‘고연지는 반드시 연지대 갈 거다’라고 말이다.

그 말이 싫어 독하게 공부해 한국대에 왔다.

그런데 일본 교환 학생 따위가 능수능란한 한국말로 고연지를 희롱했다.

고연지의 뒷골이 뜨거워졌다.

“농담이에요~ 헤에~.”

귀여운 척 눈웃음을 지으며 꼬리를 마는 여우같은 코하네.

‘오늘! 완전 꼬였어! 아우!’

고연지는 상대가 한국 사람이 아닌 것에 더 열 받았다.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며 콧김을 뿜어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운동장을 바라봤다.

운동복 차림의 40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교수가 나타났다.

출석부를 손에 든 교수.

그가 장태산을 지목해 손짓으로 불러내는 게 보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