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8
회귀의 전설
358장. 꽃밭의 여인 (2)
“실패했습니다.”
“빠가야로!!!”
지하에 위치한 비밀 딜러 룸에서 욕설이 터졌다.
“…….”
20여 명의 딜러들이 분주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투가 끝났다.
딜러들이 고개를 숙였다.
세상에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으로 알려진 이들.
하지만 일본은행 외환팀을 비롯해 각 은행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외환 프로 딜러들이었다.
엄청난 연봉과 일본을 위한다는 명분 앞에 기꺼이 이 일에 합류했다.
이들은 일본을 건국한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신을 숭배했다. 섬에서 태어났지만 대륙을 꿈꾸는 후예들로, 대 일본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영혼을 불사르기로 맹세했다.
역시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국을 위해 온몸과 열정을 불태웠다.
정보가 새어나가면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랬던 프로 딜러들도 치열한 전투에서의 패배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공을 들였던 일들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늘 손해 본 자금만 100억 달러였다.
전체 운용 자금에 비해 적은 액수였지만 적에게 기세를 들켰다는 게 문제였다.
암묵적으로 한국 외환 시장을 노리던 세력들이 공격에서 수비로 전환했다.
이제는 난장판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환율 전쟁은 작전 주식과 비슷한 흐름을 탔다.
세계 환율 시장을 좌지우지 하는 어둠의 세력들은 결코 상대를 믿지 않았다.
누군가 배신했다는 생각에 공격의 기세가 꺾였다.
성을 차지하고 전리품을 배분하기 직전에 일어난 사건.
서로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지금껏 이런 식으로 공격해 재미를 봐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97년 동남아에 불어 닥친 외환위기 시절이 가장 끝장을 쳤다.
넘치는 전리품에 만족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환율 수익뿐만 아니라 국가를 강제로 개방시키고 알짜 사업체를 국제개방이라는 명분 아래 쓸어 담았다.
일본은 남아도는 자금을 한국 사채 시장에 투입했다.
와타나베 부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일본과 비교할 수 없는 수익을 거뒀다.
금리 1퍼센트 자금으로 66퍼센트의 고리 대금업 장사를 시작했다.
돈 몇 푼에 한국 정치인들은 솔선수범으로 나서서 법을 개정했다.
수많은 가정과 개인이 파산하고 무너져 내렸지만 그 틈에 일본 자금은 폭리를 취해 풍족해졌다.
2009년도는 기회도 좋았다.
일본 태생이 한국 대통령이 됐다.
한일 공조는 과거 역대 정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이때를 노려 제2의 IMF를 만들려고 작업을 했다.
금 모으기를 통해 IMF를 극복한 한국을 이번만큼은 지근지근 밟아놓고 싶었다.
잡초처럼 끈질긴 한반도인의 생명력.
운이 맞아 떨어졌다.
미국발 금융위기에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휘청거렸다.
핫머니 연합군들이 은밀히 조성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목표가는 1,600원 이상.
외환 선물 시장을 비롯해 여러 작업이 마무리 되는 마당에 갑자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팀장님…….”
딜러들의 선임이 조심스럽게 다가서며 눈치를 봤다.
투입된 자금이 천억 달러였다.
이대로 발을 뺄지 계속 공격할지 묻는 것이었다.
“일단은 대기하라…….”
“넵!”
상부의 지시가 필요했다.
그리고 오늘 한국을 도운 조력자를 찾는 것도 급했다.
‘도대체 누가……. 어떤 놈이 감히 조센징한테 손을 내민 거야……!’
***
“손해를 봐? 그것도 70억 달러를?”
“죄송합니다. 단주님.”
리장창은 어이없는 시선으로 제갈유량을 쳐다봤다.
기진맥진한 호랑이를 코너에 몰았다. 가죽을 벗기고 배를 갈라 뼈까지 발골해 먹을 생각이었다.
IT와 관련된 한국 기업들을 흡수하면 부족한 기술력을 단시간에 확보할 수 있었다.
2003년 구조조종을 통해 헐값에 팔린 한국 기업의 LCD 사업 같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필요했다.
일각이 급한 때에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았다.
중국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장 걸림돌이 되는 먹잇감을 다 죽여 놓은 마당에 기사회생해 버린 것이다.
“누군가? 장태산 그놈은 아니겠지?”
“놈은 아닙니다. 10억 달러는 모두 물 타기로 소진했습니다. 그리고 놈이 가진 자금으로 덤빌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수백억 달러를 투입할 정도면 그보다 거물입니다.”
“로버트 라이언 쪽에서 손을 보탠 건 아닌가?”
“그쪽 자금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 환율 시장에 투입된 자금은 없습니다. 조세피난처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환율 계좌에서 분산 투입됐습니다.”
“기사단은 아니고 차일드 가나 뱀의 자식들이……. 배신을?”
“가능성이 낮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리장창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내일이면 오랜만에 딸이 방문하기로 한 날이다.
기분 좋게 일을 승리로 마무리하고 딸을 맞으려 했으나 문제가 발생했다.
예상치 못한 복병의 등장.
찝찝하고 불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시각.
일본과 홍콩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뉴욕, 그리고 유럽 여러 곳도 깊은 시름에 빠져 들고 있었다.
***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질 만큼 깜짝 놀랐다.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걸었던 여학생.
싱그러운 봄꽃이 따로 없었다.
언뜻 봐도 키는 165센티미터 정도.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봄에만 피는 은은한 자목련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강의실 안에 있는 여학생들 중에서도 홀로 빛났다.
쉽게 소화하기 힘든 진분홍 원피스를 입고 나를 보며 미소 짓는 단발머리의 여인.
나를 이미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가방…… 좀.”
“아!”
옆자리 의자에 놓여 있던 가방을 재빨리 치웠다.
빈자리가 여러 군데 남아 있음에도 굳이 내 옆에 앉으려는 그녀.
몸에 배인 습관인 듯 참 조신하게 자리에 앉았다.
“반가워요. 장태산 씨.”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 앉자마자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말을 걸었다.
“저를…… 아십니까?”
“그럼요~ 언니가 꼭 만나보라고 했어요.”
“언니요?”
말투와 행동이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말은 스무고개 수수께끼 같았다.
“고연지잖아…….”
“하아. 끝났네.”
“쳇…….”
주변에 떨어져 앉은 여학생들의 한숨이 들려왔다.
“고연지라고 해요.”
악수를 청하는 그녀는 당당했다.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건넸다.
“저 남학생 땡잡았네. 엘자 그룹 막내딸이 대놓고 관심을 보이고…….”
“연지가 웬일이래?”
엘자 그룹?
인문대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계속 수군거렸다.
고연지는 인문대에서 유명세를 타는 여학생인 듯했다.
“고자룡 회장님이…….”
“저희 아빠세요.”
당당히 집안을 밝히는 고연지.
“…….”
한국 5대 그룹에 들어가는 엘자 그룹 고자룡 회장의 딸이었다.
철저하게 집안 여성들의 사업 참여를 배제하는 엘자 그룹의 딸이 내 앞에 있었다.
그것도 애지중지하는 막내딸 고연지.
그녀를 아는 여학생들이 한숨을 푹
미모가 받쳐주는 한국대 학생이라는 타이틀.
게다가 재벌가의 딸이라는 기본 배경은 나머지 학생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스윽.
간단한 인사를 끝내고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엘자 그룹 막내딸이라고 특별히 관심 가질 이유가 없었다.
망한 대웅의 도운중 회장의 딸과 오정 그룹 딸과도 이미 인연이 깊었다.
엘자 그룹이라고 해서 더 대단하게 생각되는 것도 없었다.
뚜벅뚜벅.
그사이 교수가 앞문으로 들어왔다.
3 대 7 가르마가 인상적인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교수.
학생들을 둘러보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반가워요~.”
교수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내 이름은 양유종입니다. 국어 국문학과 교수고 이번 학기 현대시 창작의 세계라는 교양 과목을 맡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가 강단에 서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학생들 상당수가 저절로 그를 따라 인사를 했다.
“다들 긴장할 필요 없어요. 강의 제목처럼 이번 학기가 끝나기 전에 여러분들이 괜찮은 시를 창작하면 됩니다. 리포트도 없어요. 다음 시간부터 시를 창작하고 발표하고 품평할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 스스로에게 감동을 선물한다면 학점은 수월하게 나갈 겁니다. 쉽죠?”
한국대 교수들 수업 방식 정말 독특했다.
학생들을 포함해 교수들을 감동시키는 일이 말처럼 쉬운 줄 안다.
그것도 창작과 먼 공부벌레들이 우글거리는 한국 대학교에서 말이다.
“표절하면 F 나갑니다. 학기가 끝나고 나서 밝혀지더라도 응분의 책임을 지게 될 겁니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시를 창작해 발표하세요. 다음 강의 시간에 일찍 발표하는 학생에게는 가산점이 주어질 겁니다. 통과하면 수업에 출석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파격적인 수업 방식이었다.
그러나 환호성을 지르는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인문대 학생들은 특히 뭔가 더 열심히 보여줘야 합니다. 타과생들보다 감수성이 풍부한 여러분들이 모범을 보여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요.”
“으으으…….”
“교수님…….”
사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발표된 시는 묶어서 단행본 시집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학교 다닐 때 추억 하나 결과물로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물론 비용은 전액 학교 출판부에서 지원할 겁니다. 문학도라면 누구나 꿈꾸는 등단의 꿈도 이룰 수 있답니다.”
젊은 시절에는 잘 나갔을 것으로 짐작되는 교수님이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말로 강의실 분위기를 이끌었다.
결론은 시 창작 수업이었다.
이런저런 당근을 내놓았지만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다.
교수들과 학생들의 마음을 동시에 만족시키고 훔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감동을 줄 수 있는 시는 세상에 드물었다.
특히 자존심 강한 한국대생들의 생리는 서로를 경계하기에 바쁠 것이다.
“점수는 아주 객관적이게 박수로 대신할 겁니다. 저를 비롯해 여러분들의 박수 소리가 바로 학점입니다.”
생글생글 웃기까지 하는 교수님은 즐거워보였다.
저런 식이라면 학생들을 놀리는 재미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교수님. 시 형식에 제한은 없습니까?”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물론입니다. 창작의 세계에 제약을 둔다는 건 죄악입니다.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 모두 가능합니다. 한시는 더더욱 환영입니다.”
“졸작이어도 F는 없습니까?”
“당연하죠. 단, 패스하기 전까지 출석해서 수업은 계속 들어야 합니다.”
출석으로 올무를 걸겠다는 교수의 선언.
“패스의 기준이 너무 모호하지 않습니까? 창작자는 완벽이라 생각해도 청중의 취향과 다를 수있지 않습니까?”
“시는……. 쉽게 전하는 마음의 소리입니다. 비유와 은유가 섞여 만들어 내는 화음이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전하지 못 한다면…… 그건 시가 아니죠.”
결국은 기준이 깐깐하다는 소리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교수님의 눈빛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보였다.
능력을 보이지 못하면 창작의 감옥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대충 얘기가 끝난 것 같은데 순서를 정해 볼까요.”
양유중 교수는 강의실을 둘러봤다.
수능 형태가 바뀌고 있지만 아직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학생들이 둘러보는 교수의 눈을 피했다.
교수까지 만족하는 시를 일주일 만에 창작할 수 있다면 이미 데뷔를 했거나 그만한 실력일 것이다.
“다들 긴장하지 마세요. 세상에 타고나는 시인은 드물어요. 일상생활에서 발견하는 모든 재료들이 시가 됩니다. 도서관, 짝사랑 여인, 학교 오가는 풍경, 계절과 날씨 등등 맛깔스런 재료들이 주변에서 손짓하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마음을 여세요. 한 번밖에 없는 인생에서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 훈련을 이 수업에서 받는다고 생각하세요.”
교수님의 취향과 사상을 엿볼 수 있었다.
한국대 교수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거기에서 얻은 노하우를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주고 싶어 하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자~ 첫 번째로 데뷔할 용감한 학생은 누굽니까?”
교수님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아래쪽부터 위쪽으로 올라왔다.
그러다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빙긋 웃었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각종 예술신들뿐만 아니라 푸시킨의 재능을 흡수하고 있는 내가 눈길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빨리 패스하고 나머지 시간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 그래 거기 잘생긴 남학생.”
“법학과 2학년 장태산입니다!”
힘차게 나를 소개했다.
“장태산? 어머! 진짜네…….”
“누구야? 알아?”
“너 몰라? 바이올린하고 피아노로 전공 선배들 올 킬 했잖아.”
“뭐야? 진짜?”
“수학과도 박살냈는데…….”
“오! 아이펀 선물했던 법대생이다!”
지난 1년을 조용히 보낸 것 같지는 않았다.
사방에서 날 알아보는 타과생들의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요. 장태산 학생이 다음 주에 발표하겠습니다.”
교수님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석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장태산 군 다음 발표 순서는 출석 부르면서 임의로 정하겠습니다.”
이렇게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교수님은 능수능란하게 학생들을 후렸다.
“강고석.”
“넵!”
순차적으로 부르기 시작한 출석.
여기저기서 나를 보기 위해 학생들이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마침 그때.
“스미마셍…….”
비어 있던 오른쪽 자리에서 들린 조심스런 일본말.
좋은 냄새가 먼저 코끝을 자극했다.
촉촉한 샴푸 향기였다.
스르르 고개가 돌아갔다.
“어!”
이분은……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