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7
회귀의 전설
357장. 꽃밭의 여인 (1)
“1,560! 누가 받아줘!”
“콜!”
“1,560.5 매수 나왔습니다!”
“미친 거 아냐! 막아!”
외국환 은행 딜러룸에 비명이 난무했다.
2009년 3월 2일.
세계 금융위기 여파가 제대로 한국을 강타했다.
IMF 급으로 환율이 급하게 치솟았다.
수입업자들이 치솟는 환율에 비명을 질렀다.
달러로 수출 대금을 받는 기업들은 달러가 더 오를 거라 예상하고 달러를 풀어 놓지 않았다.
정부에서 닦달을 했지만 꿈적하지 않았다.
대신 한국은행에서 긴급히 달러를 풀었다.
IMF에 놀란 한국은 외화를 금고에 쌓아 놓기 바빴다.
지난 정권에 과거 정부를 반성하며 곳간을 채워놓았던 게 유용하게 쓰였다.
그 혜택을 2009년에 충분히 봤다.
하지만 밀려드는 달러 수요에 딜러들 모두 사색이 됐다.
밖에서는 달러 품귀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외환 시장에서 달러당 1,500원 선을 돌파하자 명동 개인 환전상은 1,600원을 훌쩍 넘었다.
방송에서는 제2의 IMF가 논의 되었다.
10년 전 악몽을 기억하는 국민들이 동요했다.
가뜩이나 지지율이 낮은 정부는 한국은행을 통해 무제한으로 달러를 풀었다.
2000억 달러가 넘는 세계 5위의 외환 보유 국가였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채를 시장에 팔아 달러를 충당했다.
지난달에 미국과 200억 달러 통화 스와프 연장 계약이 체결했다.
한 달 만에 그걸 반절이나 꺼내 썼다.
미국과 통화 스와프를 체결한 10여 개 국가 중 유일했다.
미국이 불편한 눈으로 한국을 바라봤다.
문제가 심각해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최병박 정부는 6, 7퍼센트 고금리로 외평채 30억 달러를 발행했다.
만기까지 매년 2억 달러에 가까운 이자를 지불해야만 했다.
국가채에서는 보기 드문 금리였다.
한국 외한 사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다.
‘핫머니’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불길한 소문에 핫머니들이 벌 떼처럼 달려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1,560.9!”
“콜!”
딜러들도 상부 지시를 받아 달러를 무제한으로 풀었다.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한국은행에서 풀어 놓은 가상의 계좌에서 쏟아져 나온 달러들이 방어에 나섰다.
힘겨웠다.
딜러들 눈알이 모두 충혈 됐다.
“1,570!!!”
딜러 한 명이 놀라서 소리쳤다.
11년 만에 나타난 최고 환율.
“미친…….”
심리적인 마지노선이 1,600원대였다.
그걸 방어해 내지 못하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환율이 날뛸 것이다.
흑자 도산이라는 말이 적용될 수도 있는 판.
외환 딜러 팀장 정일국은 눈을 감았다.
지난 연말부터 계속된 전쟁에 피가 말랐다.
오늘 아침에 당국과 정한 1,570이 뚫렸다.
이 전쟁의 끝이 어디인지 누구도 몰랐다.
다만 IMF 같은 저주만 임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1,570.3입니다!”
“으아아아아!”
딜러 한 명이 긴장감에 소리를 질렀다.
정신적으로 모두 한계에 부딪혔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 한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몰랐다.
“어? 다, 달러가 풀립니다!”
“미국 쪽에서 달러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때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환율 그래프를 보고 있던 정일국도 놀라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아군이 등장했다.
그것도 강력한 달러로 몰려드는 핫머니들을 후려팼다.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1,570 근처에 화력이 집중됐다.
‘기회다!’
지금껏 수많은 환율 거래로 팀장까지 오른 정일국은 이 때를 놓칠 수 없었다.
“막아! 총알 쏟아부어! 모조리 던져!!!”
정일국은 딜러들에게 미친 듯 고함을 질렀다.
“콜!”
피는 튀기지 않았지만 수많은 숫자들이 치열하게 서로를 물고 뜯는 이곳 외환 딜러룸.
엔화와 유로화 팀도 마찬가지였다.
엔화도 1,600엔을 돌파했고 유로화도 1,970을 찍었다.
기축 통화국인 아닌 무늬만 OECD 가입국의 서러움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흑기사가 등장해 적들을 베어 넘겼다.
달러뿐만 아니라 치솟던 환율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짧은 순간 거래량이 백억 달러에 달했다.
피 말리는 치열한 공성전.
“꺼, 꺾였습니다!”
“1,565로 밀렸습니다!”
딜러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도대체……. 누가 밀어 넣어 준 거야?’
정일국은 혼란스러웠다.
비이성적인 환율 시장.
보이지 않는 손들에 의해 한국은 전쟁터 한복판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
“하아~ 좋다!”
3월의 봄.
햇살이 쏟아지는 싱그러운 교정에서 들이켜는 공기는 뭔가 달랐다.
1학년 때와는 뭔가 다른 2학년.
온전하게 한국대 대학생이 된 것 같았다.
지난 학기에는 전 과목 A+를 획득했다.
장학금도 받았다.
돈이 궁한 건 아니었지만 장학금이라는 게 또 받는 맛이 있었다.
열심히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는 나에게 주는 보너스 같았다.
법대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고 천천히 걸어 인문대 쪽으로 향했다.
2학년 말까지 모든 교양과목을 패스할 생각이다.
2학년 1학기 첫 강의는 인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개설한 현대시 창작의 세계.
전공이 아닌 교양과목을 선택했다.
인문대에서는 도장 깨기하고 싶지 않았다.
러시아어나 불어 기타 등등 인문학도 충분히 격파 가능했지만 남겨뒀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학문 세계라다 보니 자존심 대결로 번질 우려가 있었다.
수학을 비롯해 컴퓨터나 음대, 미대와 같이 객관적으로 실력을 평가할 방법이 드물었다.
그래서 평범한 교양과목을 선택했다.
졸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들어야 할 필수 과목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인문대는……. 모든 대학교의 낭만이 숨 쉬는 꽃밭이었다.
아무리 한국대라 해도 그 진리에는 예외가 없었다.
인문대에 가까울수록 여학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어떡해……. 나 강의 계획 잘 못 짰나봐……. 교수님이 깐깐해. 리포트를 다섯 번이나 제출하래…….”
“괜찮아. 변경 신청도 있잖아. 선배들에게 물어봐서 바꿔.”
“그래야겠지?”
“쓸 만한 교양들 다 빠졌겠지만 우리는 신입생이잖아. 기회가 남았어~.”
“어떻게 그걸 알아?”
“우리 승주 오빠가 알려줬어.”
“꺄아아! 너 승주 선배랑 사귀는 거야?”
“응~ 일주일 됐어.”
“진짜 빠르다.”
새로 입학한 신입 여학생 둘이 어색한 화장으로 무장한 채 걷고 있었다.
자신들은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신입생 태가 났다.
어색한 화장과 한껏 멋을 낸 옷과 액세서리가 눈에 띄었다.
2학년만 되어도 취업과 미래 진로 때문에 표정과 옷차림이 달라졌다.
나의 동기생들도 학교 물 좀 먹었다고 때깔이 달랐다.
오직 신입생들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캠퍼스를 누볐다.
“나도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오빠가 멋있잖아.”
선배와 사귀게 된 듯한 신입생 여학생이 활짝 웃었다.
미모가 상당했다.
오빠라는 선배 능력이 이미 출중한 걸로 확인된 셈이다.
신입생인 그녀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선배로부터 설계를 당했다는 걸 말이다.
지난 생에도 3월이 되면 캠퍼스의 남학생들이 들뜨기 일쑤였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입학한 1학년 여학생들이 여친 만들기의 가장 쉬운 타깃이 됐다.
OT를 통해 이것저것 가르쳐 주겠다는 미끼를 던져 친분 쌓기가 시작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선배가 몇 시간 사이 오빠가 되는 건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3월 1학기 초가 아니면 신입생들과 썸을 탈 수 있는 기회가 지나가 버린다.
괜찮은 남녀들이 커플이 되고 커플을 되지 못한 남학생들은 패잔병처럼 어슬렁거렸다.
2학기 연애 시장은 복학생과 이별을 경험한 이들의 패자부활전으로 이어진다.
간혹 월척들이 남아 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경향은 확실히 뭔가 달랐다.
물론 한국대 남학생들은 타 학교에 비해 연애에 목을 매는 편이 아니었다.
학교가 학교다 보니 소개팅이나 미팅이 쉽게 잡혔다.
이때부터는 순수함보다는 여러 사심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만남이 진행된다.
장외 연애 시장은 장외 주식 시장과 비슷했다.
대상이 동일한 캠퍼스 사용자가 아닌 이상 상대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내릴 수 없다.
한 번 투자로 대박과 쪽박이 결정 났다.
저벅저벅.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인문대 강의실로 향했다.
한국대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 군에 속했지만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다.
수십 년이 넘은 강의 동은 붉은 벽돌로 건축되었다.
건물 때깔이 달랐다.
선배들이 짱짱한 법대나 알아서 모셔가는 공대 쪽과 달리 인문대는 한국대 내에서도 찬밥이었다.
한국의 인문학은 21세기에 들어서며 천대받는 학문이 됐다.
커리큘럼도 문제였다.
고지식한 교수들은 학문 연구를 게을리 했다.
게다가 인문학적 성과라는 게 단시간에 눈에 띄지 않았다,
문단도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며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과거로 퇴행됐다.
‘한 번 교수는 영원한 교수’ 시스템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교수가 공부하지 않고 안주하면서 발전이 멈췄고 육성되는 제자들도 맥을 잡지 못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교육 방법에 대한 모색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한국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인문학에서 노벨상을 배출하지 못하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았다.
“운치는 있네…….”
건물이 낡은 만큼 계단도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쑥 자란 나무들은 인문대의 오랜 역사의 증거였다.
최근 건축된 건물이 드문 만큼 전체적인 느낌은 고풍스러웠다.
마주한 인문대 본관.
“누구야? 인문대생?”
“와우……. 잘생겼다…….”
“신입생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학부에 저렇게 멋진 남자가 있을 리 없어!”
몇 년 전부터 인문학부가 된 한국대 인문대.
오가는 여학생들이 슬쩍슬쩍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아침 일찍부터 바빴다.
오늘이 2009년 한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을 그날이었다.
오늘 IMF 이후 최고 환율을 찍는다.
실탄을 들고 기다렸다.
한국 외환 시장의 미래는 바뀌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야금야금 환율로 재미를 봤다.
겨우 수십억 달러 푼돈이었다.
그러나 큰 강도들이 대기 중임을 알고 있었다.
환율이 치솟자 핫머니 강도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뉴욕, 홍콩, 런던에서 집중적으로 자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정보와 돈을 쥔 강도들의 협박이 시작된 것이다.
지켜보고 있다 툭툭 자금을 밀어 넣어 놈들의 공격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1,570.3 원을 찍을 때 달러를 몽땅 투입해 놈들을 공격했다.
핫머니들은 늑대 같은 놈들이었다.
한국의 약점을 물어뜯기 위해 거침없이 돌격해 왔다.
제대로 죽빵을 날렸다.
화들짝 놀란 핫머니들이 반격했지만 한 번에 수십억 달러를 투입하자 놈들이 나가 떨어졌다.
나에게 웬만한 자금으로 덤비면 안 된다는 걸 놈들은 몰랐다.
한국 외환 당국까지 방어에 나서자 놈들은 수십억 달러의 시체를 남기고 철수했다.
현재 정부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도움을 줄 수밖에 없었다.
물 말아 놓은 밥에 다른 놈이 숟가락 담그는 건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고금리로 외평채만 발행하지 않았어도 놈들이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곳간이 비고 있다는 걸 최병박 정부 금융팀은 만천하에 떠벌린 꼴이었다.
국민들의 피 같은 자산을 개인 호주머니 돈처럼 여기는 최병박.
그들이 뿌린 적폐의 뿌리는 깊고 넓게 퍼진다.
그렇게 한바탕 전쟁을 끝내고 도착한 오후 강의 시간.
법대와 확연히 다른 외모의 인문대 여학생들이 곳곳에서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나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꽃밭이 좋을 뿐이었다.
사무실의 3총사 미녀들에 비하면 아직 평범하고 순수한 수준의 여학생들이었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풋풋한 청춘이 뿜어내는 기운이 생기 넘치고 좋았다.
몸은 20대지만 마음은 30대인, 인생을 두 번 사는 회귀자만이 누릴 수 있는 유희였다.
뭇 여인들의 관심을 한껏 받으며 1층에 있는 대강의실로 향했다.
교양과목답게 얼추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책상에 앉아 수업을 기다렸다.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수업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옆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날 발견하고 홍조를 띠며 주변에 포진하는 여학생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들은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그녀들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졌다.
툭.
갑자기 작은 가방 하나가 옆 책상 위에 놓이기 전까지.
“실례합니다.”
듣기 좋은 여학생 목소리가 들렸다.
느낌 적으로 나를 아는 사람인 듯한 목소리였다.
나 역시 어디서 들어본 듯한 여학생의 음색.
고개를 들고 가방 주인을 돌아봤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