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3화 (352/1,284)

 # 353

회귀의 전설

353장. 대장간 라이트

영주가 만족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아린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법 견식이 그렇게 좋을까?’

아린도 이런 시간을 갖게 된 것에 만족했다.

마력 홀이 텅 빌 정도로 마법을 쏟아내 본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마법사는 위기 상황이 아닌 이상 언제나 반절 이상의 마력을 보유하라는 스승님의 가르침도 잊고서 말이다.

든든한 아군이 곁에 있어서 마음껏 마법을 쏟아 부었다.

지금껏 배웠던 마법을 복습하는 시간을 갖는 것 같았다.

마법사라고 모든 마법에 능통하지 않았다.

기초 사대 마법을 펼칠 수 있게 되면 다음 서클을 준비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아린은 스승 덕분에 다른 마법사들보다 몇 배나 많은 마법들을 섭렵했다.

최고 수준의 마탑 출신들도 아린을 쉽게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휘리리리링.

차가우면서도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하아…….”

아린은 마음껏 숨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맛보는 평안이었다.

이 영지에 오기 전까지 매일 반복적으로 지독하게 마법을 수련했다.

오직 마법! 마법! 마법만이 아린 인생의 전부였다.

스승은 얼마 전에 마나의 부름을 받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아린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혔다.

스승은 이 날을 대비하여 자신이 사라지면 찾아가라며 비밀 소개서를 써줬다.

아린은 그 길로 유베스 상단에 합류했다.

막혀 있던 벽이 뚫리면 다시 스승님이 만든 던전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할 일이 많았다.

스승으로부터 유언처럼 듣게 된 자신의 출생과 가문의 비밀.

그녀의 심장을 딱딱한 화석으로 만들어 버린 엄청난 무게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이곳 영주를 만나고부터 그녀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좋은 사람이야.’

아린은 영주만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졌다.

영주는 처음 볼 때부터 아린의 흉측한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 뒤로 언제나 한결 같이 아린에게 친절했다.

사실 마법사가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는 일은 쉬운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아린은 영주에게 아낌없이 밑천을 보여줬다.

어차피 마법이란 게 구경한다고 배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더욱이 영주는 마법 수련의 대가로 마력석을 건네기로 했다.

“배고프죠?”

“네.”

“오늘 저녁은 특별 생선구이로 모시겠습니다~.”

“네에…….”

영주의 밝은 목소리에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뭔지 모르고 살았다.

그저 때가 되면 주는 대로 먹고 살기 위해 허기를 채웠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만 섭취했던 수단이 음식이었다.

그런데 요즘 영주로 인해 아린은 음식을 먹는 즐거움과 미각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흙저씨~.”

영주는 대지의 정령을 소환했다.

후두두둑.

부름과 동시에 바닥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대지의 정령 흙저씨.

“알지?”

영주의 말에 땅의 정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콰드드드드득.

순식간에 주변 대지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강가에 어느새 바람을 막아주는 원통형의 흙벽이 생겼다.

뿐만 아니라 간이 화덕도 모양을 갖췄다.

“인어야~ 저녁거리 부탁해.”

허공을 향해 외치는 영주.

파앗! 

빛과 함께 나타난 물의 요정이 강가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곧 내장까지 깨끗하게 제거된 각종 물고기들을 들고 돌아왔다.

“언제나 고마운 거 알지?”

배시시시.

영주의 칭찬에 인어가 환하게 웃었다.

“화룡아 불 피워라~.”

화르르르르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덕 밑에 나타나 웅크리고 있던 불의 중급 정령이 뜨거운 불을 뿜어냈다.

“루루~♬.”

영주는 말안장에서 꼬치를 꺼내 생선을 굽기 시작했다.

촤르르르릇.

요상한 폼으로 몸을 비틀며 멋들어지게 소금도 뿌렸다.

“바람아 환기~.”

바람의 정령도 영주의 부름에 금세 나타나 주변을 정화시켰다.

“아…….”

보고 있어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아린은 참았던 탄성을 터트렸다.

‘이렇게 정령과의 친화력이 강한 정령사가 있을 수 있나? 그것도 사대 정령 모두와…….’

아린이 배웠던 정령 상식에 전혀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놀랍다 못해 경이로웠다.

이곳 영주의 정령 친화 능력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대군주들이 영주를 포섭하기 위해 침을 잔뜩 흘릴 것이다.

“화룡아. 타잖아. 이럴 때는 골고루 열을 내야지.”

정령을 구박하기까지 하는 정령사.

이런 상황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예민한 정령은 정령사가 자식보다 더 소중하고 섬세하게 대했다.

화르르르르르.

“오! 그렇지. 우리 화룡이 갈수록 똑똑해진다니까.”

“…….”

아린은 영주의 말도 안 되는 친화력에 할 말을 잃었다.

중급 정령은 대단한 존재였다.

계약만 하더라도 왕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런 중급 정령을 애처럼 다루는 영주.

‘정체가…… 뭘까?’

아린은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영주의 모습을 지켜봤다.

“와아! 아린 양. 어떻게 딱 구워진 걸 알았어요? 그렇게 배고팠어요?”

영주가 아린의 몰입감 넘치는 눈빛을 오해하며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 한 마리를 넘겼다.

“아직 뜨거우니까 호호 불어서 먹어요.”

친절한 영주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

아린은 떨리는 손으로 영주가 건넨 생선꼬지를 받았다.

아작아작 씹었다.

‘맛있다.’

세상 누구도 이런 호사는 누릴 수 없었다.

무려 중급 정령들이 합동해 만들어 낸 생선구이였다.

알맞게 밴 소금기에 고소하고 바삭거리는 식감과 어우러져 입에서 살살 녹았다.

살짝 탄 듯한 식감이 의외로 고소함을 더했다.

“아린. 그거 알아요?”

“뭐, 뭐요?”

생선을 양손에 잡고 본격적으로 뜯던 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오늘이 우리 만난 지…… 22일째랍니다~.”

“아~.”

외마디 탄성을 부끄럽게 토하며 아린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왠지 모르지만 저 날짜만 헤아리는 말만 들으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린, 이것도 먹어봐요. 맛이 아주 끝내줘요.”

귀족임에도 체통을 앞세우기보다 허물없이 아린에게 생선 한 마리를 더 건네는 영주.

“고, 고마워요.”

아린은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죠? 그럼 내일은 마법진 가르쳐 주시는 거죠?”

“네에?”

생선을 물어뜯으려다 고개를 번쩍 드는 아린.

‘아!’

그가 웃고 있었다.

아린을 향해 장난스럽게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웃는 영주.

‘내일은 23일째.’

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날짜를 계산했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남자.

화르르르.

정령이 모닥불처럼 피워내는 따뜻한 불길이 아린의 얼굴을 후끈 데웠다.

***

“루벡 남작이 아라돈 후작에게 영지를 넘겼다고 합니다. 복수를 부탁한 것 같습니다.”

성에 거주하는 사비나가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상단 소속이라 정보가 무척 빨랐다.

“아라돈 후작 정예 기사단은 수백 명이 넘습니다. 그를 따르는 타 영지 기사들까지 합치면…….”

기사 카르스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이거 무서워서 잠이나 자겠습니까? 크크크.”

용병 탈만은 이 와중에도 농담을 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몇 달 만에 엄청난 속도로 영지를 재건했지만 아직도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이었다.

옆집 남작령을 털어 살림에 보태긴 했어도 영지는 아직 배고팠다.

영지 규모에 넘치게 4000명의 정규 병사가 편제됐다.

일개 연대 급 병사였지만 옆집 건너 후작은 병력만 수십만이 넘는다.

“아라돈 후작을 따르는 귀족들이 많나?”

“스물 정도 되는 가문이 후작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과거부터 이 근방에서는 왕국에 버금가는 가문이었습니다.”

기사 카르스가 자세히 알고 있었다.

“욕망이 큰 귀족입니다. 가일란드 왕국에서 공작의 작위를 내세워 포섭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영지 붙박이 상인 사비나가 추가 정보를 흘렸다.

“잔혹한 자라고 용병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합니다. 귀족의 권위에 도전하면 삼족을 노예로 삼는다고 합니다.”

탈만도 목소리를 더했다.

여러 정보가 속속 추가됐다.

전쟁 위기가 그만큼 커졌다.

이전 회의 때 없었던 긴장감이 흘렀다.

루벡이 영지를 포기하고 복수를 부탁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린에게 마법을 배우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마법 배우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었다.

그러나 그사이 문제가 발생했다.

이계 역시 정치가 중요했다.

강자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동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카이루 후작과 손을 잡으라는 이야기인가?”

아침부터 시작된 영지 회의는 동맹을 맺는 얘기로까지 이어졌다.

아라돈 후작을 막기 위해서는 이웃 영주의 도움이 절실했다.

이계 인맥 없는 내가 취할 최선의 방책이었다.

“카이루 후작은 좋은 분입니다. 영지 세금도 다른 곳보다 낮습니다. 과거 500년 전부터 이곳을 다스리는 소왕국의 후손입니다. 그에 반해 아라돈 후작의 쥬넨 후작가는 드보르 왕국의 가신이었습니다. 제국 통일 전쟁 때 왕국을 배신하고 현재의 위치를 차지한 가문입니다.”

“가문의 원수?”

사비나의 정보는 역사적 사실까지 고증해 상황을 설명했다.

“제국 시절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곳 동네 기사 카르스가 잘 알고 있었다.

“나와 동맹을 맺을 확률은?”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어 귀동냥을 아끼지 않았다.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확신합니까?”

사비나 대답에 질문을 던졌다.

“드보르 후작령에는 후사가 없습니다. 일찍 사랑했던 부인이 요절한 뒤에 카이루 후작은 독신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카이루 후작의 마지막 남은 소원은 가문의 적을 끝장내는 일입니다.”

“흐음.”

짧은 신음이 터졌다.

대한민국보다 정치는 단순했지만 파괴력은 컸다.

목숨과 영지 파멸이 대가였다.

“그곳에서 상단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영주님과 친분이 있습니다. 절 딸처럼 여겨주셨습니다.”

“!!!”

머리에 그림이 그려졌다.

사비나와 친분이 있었다.

쉽지 않겠지만 희망이 보였다.

“주군. 잃어버린 요새들과 마을을 복원해야 합니다. 성과 요새는 이제 포화상태입니다. 광산이 있던 덱턴을 비롯해 샤우린, 카델 요새 등을 수복해야 영지 발전을 꾀할 수 있습니다.”

이계의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내년을 위해 영지의 안전과 지속적인 발전이 필요했다.

루벡 남작령의 백성들을 흡수하면서 본성은 이제 포화 상태가 됐다.

“카르스 경이 계획을 짜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드보르 후작가 방문은…….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

때를 기다렸다.

뭔가 강력한 필이 오지 않았다.

대신 전쟁을 착실히 준비했다.

중급 정령사에 이어 마법도 4서클에 올랐다.

아직 마력이 부족하지만 매일같이 마력석을 빨아 마시며 착실하게 기반을 다지고 있다.

오늘도 아린과 마법 훈련이 준비됐다.

“주군. 오늘 정말 성문을 만들 수 있습니까?”

탈만이 궁금한 듯 물었다.

“아마도~.”

아직 성문 복구가 안 됐다.

박살난 성문만 네 짝이었다.

집 나가기 전에 문짝을 고치는 건 가장으로서의 책무였다.

일분일초가 바빴다.

요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냈다.

지구 생활보다 이계 생활에서 보람을 더 느꼈고 재밌었다.

아린은 마법진을 비롯해 마법 공학 시현을 준비했다.

빠르게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성에서 성문을 다시 재건하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마력을 다루는 마수나 기사들의 공격을 막아낼 튼튼한 성문을 달아야 했다.

1차적으로 성의 안전과 직결됐다.

마법성문.

마법 공학을 이용해 각종 방어 마법진으로 무장한 성문만큼 든든한 아군도 없었다.

성문도 없이 보내던 성안 영지민들에게 오늘은 축제일이나 진배없었다.

본격적으로 재건되기 시작한 베커 성의 또 다른 하루.

넉넉하지 않은 삶 속에서도 희망은 꽃피고 있었다.

***

“화룡아! 힘줘!”

내 응원에 화룡이가 힘을 썼다.

화르르르르르르르르르.

대지의 정령이 만들어낸 흙으로 빚은 쇳물통에서 붉은 쇳물이 펄펄 끓었다.

장작이나 석탄이 아닌 오직 정령의 힘만으로 쇠가 녹았다.

“흙저씨! 지금이다! 쇳물을 받아 마셔!”

대지의 중급정령이 끓는 쇳물을 들어 입으로 마셨다.

그것도 한 방에 원 샷!

쇳물을 꿀꺽 삼킨 흙저씨는 지시한 대로 쇳물을 마신 채 바닥으로 깔아지며 틀로 변신했다.

“인어!”

촤아아아아아아!

대기하고 있던 물의 중급 정령 인어가 차가운 물을 쇳물에 뿌렸다.

강한 성문을 얻기 위해서는 대장간 작업 순서에 빈틈이 없어야 했다.

치이익 소리가 나며 엄청난 수증기가 뿜어졌다.

“바람아!”

명령은 연달아 내려졌다.

바람의 정령이 불어내는 바람과 인어의 물줄기가 합쳐져 성문이 빠르게 식었다.

대지의 정령 가피가 가미되어 성문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흐윽!”

마력이 바닥을 쳤다.

정령들을 모조리 소환하자 마력이 텅텅 비는 게 느꼈다.

그 동안 놀고먹지 않았는데도 부족했다.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마력을 유지하기 위해 집중했다.

일반적 방식이 아닌 특별 정령 제조 방식이었다.

불의 정령의 힘으로 화력이 더해지면서 고순도의 쇳물이 정제됐다.

대지의 정령의 능력으로 철에 강성과 탄성을 조절한 금속 성문이 추가됐다.

물의 정령이 품은 정갈한 힘이 함께했다.

바람의 정령의 에너지 가득한 입김이 성문에 불어 넣어졌다.

사대 정령의 힘으로 완성되어 가는 거대한 성문.

마력이 완전 방전 되는 순간 거짓말처럼 성문이 완성됐다.

“헉!”

배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인상이 절로 써졌다.

마력 홀이 텅텅 비었다.

몸이 휘청거렸다.

“영주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린이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내가 만든 경이로운 장면을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사방에 넘쳐나는 마력의 향기에 그녀도 취했다.

중급 사대 정령을 동시에 소환하는 순간 아린이 경악에 빠지는 걸 봤다.

나와 결합한 불, 물, 대지, 바람의 마력이 정령들과 다시 한 몸이 되는 걸 마법사인 그녀는 알았다.

마법보다 더 친밀하고 자연스러운 마력의 변환.

내가 봐도 실로 엄청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마력 친화력이었다.

아린이 급하게 달려와 휘청거리는 나를 부축했다.

하지만 내 몸뚱이는 여자 마법사가 부축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나의 육중한 체중이 아린 쪽으로 쏠렸다.

콰당.

아린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앗!”

빙빙 도는 어지러움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아린을 오른팔로 감싸 안았다.

쏙 품에 안겨오는 야리야리한 아린의 몸.

그녀가 품에서 작은 숨을 내쉬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놀란 사슴 눈망울을 한 아린.

누가 보면 계획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

우연이 또 사고를 빙자해 관계를 창조했다.

엄청 좋은 마력 호흡법 덕분에 마력이 서서히 차면서 정신이 맑아졌다.

하지만 아린은 여전히 몸을 떨면서 내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품 속의 포로가 된 그녀.

말로만 듣던 전설의……. 대장간 라이트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