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1
회귀의 전설
351장. 오늘부터 1일
“김선달 님 스킬도 별거 없네~. 흐흐.”
평양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의 심정으로 방을 나섰다.
더 이상 함께 동석해 있기에는 양심이 쿡쿡 찔리고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흐뭇한 마음으로 내성의 성벽 위로 향했다.
어느새 시간은 오후 늦은 시간.
이곳 계절도 겨울이었기에 해가 짧았다.
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성벽 너머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게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북쪽에서 시작된 붉은 빛깔이 강물을 건너 성벽까지 진득하게 물들었다.
지구에서는 일 년에 몇 번 보기 힘든 맑은 수채화 한 폭 같은 석양이 눈을 사로잡았다.
“아름답다…….”
다른 미사여구는 무의미했다.
눈동자를 물들이는 밀감빛 노을은 그대로 한 폭의 명화나 진배없었다.
붉게 타오르던 태양은 천천히 저물어가며 마지막 빛을 토했다.
태양이 남기고 가는 잔상은 지독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뜨거웠다.
지구와 같이 이곳에서도 하루하루의 시간이 열정적으로 흘렀다.
아르펜 대륙 생활에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방문할 때 사용되던 포인트가 점점 싸졌다.
장기 고객 우대 할인이 착실하게 적용됐다.
환경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대한민국은 중국에서 넘어오는 미세 먼지로 숨이 턱턱 막히는 날이 많았다.
아직까지는 미세 먼지의 위험성을 다들 간과하고 있었다.
몬스터나 마수, 이웃한 영주의 창칼이 위협적이긴 했지만 그만큼 대가는 존재했다.
“평화롭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
“???”
그때 옆에서 맑고 고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랐다.
레벨이 오르고 매일같이 마력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에 당황했다.
차분한 회색 로브가 눈에 먼저 보였다.
마법사였다.
로브 모자를 눌러쓴 채 한 손에 고풍스러운 마법 지팡이를 들고 석양을 바라보는 여인. 자연스럽게 나의 왼쪽에 다가섰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처음 보는 마법사였다.
사비나와는 풍기는 마력의 향기가 달랐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마법사의 등장이었다.
쿵쿵 심장이 뛰었다.
“헛!”
- 고서클 마법사와 접촉했습니다.
- 인연과 새해의 신 쥬피로의 가피가 두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신음을 터트렸다.
쥬피로 신의 직접적인 축복은 처음 받았다.
뭔지 모르지만 진한 인연의 냄새가 났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베커 영주님.”
나를 알고 있었다.
여자 마법사가 고개를 돌리며 날 응시했다.
스윽.
모자를 벗는 마법사.
“상단 소속 용병 마법사 아린이라고 합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다시 인사를 해오는 아린.
“!!!”
석양빛에 드러나는 아린의 얼굴을 본 순간 다시 한 번 숨이 헉 하고 막혀왔다.
날씬한 키와 짤랑거리는 목소리는 보기에도 듣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로브를 벗으며 드러난 아린의 얼굴 오른쪽은 깊은 화상 흉터가 있었다.
다른 한쪽 얼굴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선(善)과 악(惡).
미(美)와 추(醜).
유(柔)와 패(敗).
이 여인이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는 난생 처음 대면하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깨끗하고 맑은 피부의 한쪽 얼굴은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그에 반해 흉터로 일그러진 반대쪽은 마치 악의 화신을 보는 것 같았다.
옥의 티를 넘어 보는 이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얼굴을 돌릴 정도의 흉하고 강렬한 흉터였다.
아름다움을 질투한 악마의 저주가 각인된 것 같았다.
아무리 한쪽이 경이롭고 아름답다 해도 다른 한쪽의 흉터로 인해 마주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여인으로서는 최악의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보이는 면모에 인상을 쓰고 싶지 않았다.
여인인 아린이 더 힘들 것이다.
나에게 인사하겠다고 모자까지 벗고 얼굴을 드러낸 그녀의 용기가 놀라웠다.
“!!!”
도리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에 아린이 당황한 듯했다.
지금껏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보고 놀라지 않은 자들이 없었던 것 같다.
여자라면 환장하는 용병들조차도 아린 얼굴을 보면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아름다우면서 가장 추하고 흉측한 두 가지 모습을 가진 아린.
씨이이익.
미소를 짓자 아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우연치 않게 이 땅의 주인이 된 베커 장 백작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정식으로 밝혔다.
반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마법사라는 신분을 떠나 아린은 대귀족 가문의 여식처럼 느껴졌다.
흉측한 얼굴만 아니었다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수시로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었다.
“아린…… 입니다.”
그녀 역시 다시 정식으로 인사를 해왔다.
성은 주저하며 밝히지 않았다.
뭔가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로브 안에 감춰진 기품 있는 여성스러운 자태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흉터로도 감출 수 없는 푸른 눈동자는 맑기가 가을 하늘빛 같았다.
지금까지 봤던 여인들 눈빛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맑았다.
그리고 은연중에 드러나는 부드러운 기운.
고약한 심성의 여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력의 기운도 본래의 성품과 섞이어 비슷해지는 법이다.
그녀의 서클이 궁금했다.
- 6서클 마법사를 처음으로 조우했습니다.
6서클!
친절을 베푸는 알파닥이 나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토끼 눈으로 아린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나와 동갑이거나 한두 살 위일 것 같았다.
눈빛을 보면 짐작하기 어려운 아린의 나이.
흉터를 제외한 나머지 피부는 매끄럽고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역시 주름 하나 없는 피부는 탱탱했다.
- 흥!
갑자기 울리는 알파닥의 심정 상한 알림음.
- 칭호가 ‘치마만 두르면 다 오케이냐?’로 바뀌었습니다.
미친! 난 마법사가 궁금한 거야!
애써 변명했다.
- 칭호가‘ 이제는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쟁이’로 바뀌었습니다.
믿어줘! 나 그런 남자 아니다!
- 됐고. 저 여자 마법사 조심해라. 자칫 잘못 엮였다가는……. 이계 밥통 날아간다.
밥통까지?
오늘따라 사설이 많은 알파닥의 경고에 궁금증만 증폭됐다.
알파닥과의 사적인 대화는 생각보다 자주 있는 게 아니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는 때가 더 많았다.
진짜 알파닥과 기계적으로 대응하는 알파닥이 다른 것 같았다.
- 알면 다친다. 저 여자……. 이 대륙에서 위험순위 3위 안에 든다.
위험순위 3위? 약 먹은 드래곤이라도 돼?
- 그 이상은 신들의 맹약으로 묶여 있다. 묻지 마라. 나도 피곤타.
신들의 맹약? 그건 또 뭐야?
알파닥이 일정 이상 세상의 일에 개입할 수 없음은 진작 알고 있었다.
친절하고 싸가지 없는 누군가의 배려로 나와 교신하는 조력자였다.
대화가 통하는가 싶어 기회를 봐서 신과 감춰진 세상 이야기를 물으면 입을 굳게 닫았다.
6서클 마법사가 그렇게 위험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문에 찬 시선으로 아린을 봤다.
“여, 영주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린도 이런 낯선 상황이 처음인 것 같았다.
아린의 얼굴이 사르르 붉어졌다.
천사와 악마의 얼굴에 피는 꽃송이.
묘한 매력이 흘렀다.
“예뻐서요.”
“네에???”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나도 말하고 충격을 받았다.
시공간이 오그라드는 환상을 맛봤다.
갑자기 그런 마음이 불쑥 들었다.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이 순간이 낯설지만 기분 좋았다.
붉은 노을이 지는 석양 탓을 하고 싶었다.
사르륵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진 탓이었다.
예기치 못한 맑은 목소리에 귀가 행복해져서였다.
비록 얼굴의 흉터는 흉했지만 그녀의 마음에서 풍겨오는 향기에 취했다.
그리고 그냥…… 아린이 예뻐 보였다.
화상 흉터에 가려져 있는 아린의 맑은 심상(心象)
그걸 보았다.
아린은 화들짝 놀라 되묻다가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
‘지금 이게 무슨…….’
아린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태어나 처음 거울을 봤을 때 마주한 얼굴.
그 얼굴에 난 흉터에 아무런 감응도 생기지 않았었다.
마법이라는 학문은 쉽지 않았다.
공포스럽고 매서운 스승님의 독설을 피하기 위해 아린은 여인으로서의 삶을 버렸다.
하지만 가끔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꽃과 나비가 들판에 가득할 때 아린도 사랑을 꿈꿨다.
일상에 지친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는 봄비에 가슴이 촉촉이 젖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거울을 보게 되는 순간이면 아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기겁하며 도망가거나 손가락질 할 때를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평범한 여인으로서의 삶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예쁘다는 말을 들었다.
콩닥콩닥 아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예쁘다는 마법 주문 한 마디에 얼굴은 붉어졌고 온몸은 나른해졌다.
“…….”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상하게 꼬인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두 사람은 부인하지 않았다.
“아린.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아린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석양이 사라지고 하늘에 별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며칠 전 떴던 보름달이 살짝 일그러져 빛을 발했다.
두 사람 사이에 축복처럼 달빛의 요정이 임했다.
“저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네? 마, 마법이요?”
아린은 당황스러웠다.
중급 정령사가 마법을 가르쳐 달라는 황당한 청을 했다.
정령사는 정령을 통해 마법을 펼친다.
마법사와는 마법의 결과 길이 달랐다.
지금껏 정령사가 일반 마법을 배웠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왜요? 안 되나요?”
영주가 물었다.
“영주님은 정령사잖아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
영주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아린은 할 말을 잃었다.
정말 모르고 청하는 표정이었다.
“가르쳐 드릴게요.”
아린은 영주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알려준다 해도 기초를 깨우치기도 힘들 것이다.
정령 마법과 달리 일반 마법은 인공적인 배움이 뒷받침돼야 했다.
게다가 아주 많이 힘들었다.
“그럼 우리 이제부터 1일째입니다.”
“네???”
영주의 말에 아린은 또 한 번 화들짝 놀랐다.
대륙에서 통용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듣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마법 스승과 제자~ 1일째 말입니다. 자 약속해 주십시오~.”
영주가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아린도 엄지를 내밀어 영주와 손가락 도장을 찍었다.
찌리릿.
순간 짧고 강렬하게 흐르는 전류.
영주와 아린의 1일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