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0
회귀의 전설
350장. 아이 쇼핑 타임
“이, 이게 무슨…….”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래를 위해 유베스 상단에서 파견한 1급 상인 바크셔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베커 영주가 원했던 물건이 다양해 상단을 꾸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루벡 남작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어서 다른 영지를 경유해 돌아왔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과거 베르샤 백작령.
다리를 건너자마자 새카만 벌판이 눈에 들어왔다.
“부, 불길이…… 계획적으로 타올랐습니다.”
“한순간에 다 꺼진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용병들이 소리쳤다.
1급 상단은 상단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했다.
기사급에 해당하는 용병들과 고서클 마법사까지 따라붙었다.
실력 있는 호위 용병들도 수백 명이 넘었다.
소규모 영지의 전력과 맞먹을 정도의 규모였다.
곳곳에 도적 떼와 몬스터들이 날뛰었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무력을 소유한 상단 용병들도 광경을 보고 놀라워했다.
‘설마 성에 무슨 변고가 있는 건 아니겠지?’
바크셔는 내심 걱정에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이곳 성에 들어간 재화가 작지 않았다.
더욱이 영주가 소유하고 있다는 드워프와 엘프의 물건은 반드시 확보해야만 했다.
“정령이에요.”
그때 바크셔 뒤에서 한 여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령? 아린! 그게 사실입니까?”
바크셔가 놀라며 몸을 돌려 여인을 봤다.
“정령이 흘렸던 마력의 향기가 아직도 남아 있어요. 흐음~ 진한 냄새로 보아 중급 정령이네요.”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 마법사가 바크셔 뒤에 섰다.
로브 모자를 깊이 둘러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키가 작지 않았고 몸매도 호리호리했다.
젊은 여자 마법사였지만 1급 상단주 바크셔도 말을 놓지 않았다.
아린이라 불리는 여자 마법사에게서는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손에 들린 범상치 않은 마법 지팡이도 한몫했다.
“중급 정령이라면 그럴 수 있겠군요.”
바크셔는 정령이라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베커 영주가 정령사라고 했지……. 하지만 중급 정령사가 아닌데.’
사비나의 보고에 의하면 영주는 하급 정령사였다.
“사대 정령 모두의 냄새가 납니다. 하아…….”
로브를 살짝 들고 마력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는 아린.
가녀린 아래턱에 깊은 흉터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곳 영주가 정령을 다룬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급 정령사는 아니라고…….”
“맞습니다. 중급 정령. 제 마력을 걸겠습니다.”
아린의 확언에 바크셔는 입을 다물었다.
아린은 고서클 마법사였다.
정확한 서클은 몰랐지만 5서클 이상이었다.
어지간한 영지에 가서도 대접 받을 수 있는 고서클 마법사의 말이었다.
그것도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젊은 마법사였다.
앞으로의 미래가 얼마나 더 발전할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일단 가보면 알겠지.’
“상단 전진하라!”
1급 상인 바크셔도 마력을 다룰 줄 아는 하급 마력 전투사였다.
고위 상인이 되기 위해서는 상술뿐만 아니라 자기 몸 하나 건사할 수 있는 실력을 소유하고 있어야 했다.
“이럇!”
히이이잉.
마차를 끄는 말이 힘겨운 소리를 내며 발을 내딛었다.
불에 탄 벌판 광경과 달리 고요하기만 한 성.
특이한 무늬의 영지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성벽 위에는 갑주를 착용한 병사들이 다가오는 상단을 준엄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주군. 이게 뭡니까?”
“떡국이라고 한다.”
“떡국요?”
“내가 살던 지방에서는 새해가 되면 이 음식을 요리해 먹는다.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의미도 있고 무병장수 기원도 있지.”
“아! 그렇군요.”
“다들 먹어보라.”
“네…….”
대답과 달리 다들 수저를 들고 주저했다.
설날 아침에 먹는 떡국에는 유기농 방목소의 살점과 유기농 떡, 엄마 표 간장과 소금, 대파 등등이 들어갔다.
분주히 설 아침을 보내고 인사를 나눈 뒤 이계로 넘어왔다.
설날의 따뜻함을 이곳의 부하들에게도 넉넉히 나눠주고 싶었다.
자식들을 생각하는 부모 마음이 이와 같을 것이다.
다른 세상이라고 외면하고 있기에는 이계의 인연들도 나와 인연이 되어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다.
챙겨온 떡국과 소갈비, 각종 전을 푸짐하게 내놨다.
낯선 식문화에 당황해 쉽게 맛보기를 주저하는 기사들과 사비나.
수저를 들어 그들에게 시범을 보였다.
“!!!”
엄마 손맛에 버금가는 떡국 맛이 죽였다.
내가 먼저 수저를 들고 먹자 곧 뒤를 따라 사비나와 기사들이 맛을 보기 시작했다.
“어!”
“아…….”
육수를 내서 끓인 떡국은 풍미가 더했다.
감탄을 터트린 기사와 상인이 빠르게 그릇을 비워갔다.
“맛이 끝내줍니다. 주군!”
영지 첫 번째 기사 탈만은 그릇이 구멍이 날 지경으로 박박 긁어 먹었다.
“이런 특이한 맛은……. 처음이에요.”
야무지게 육전을 베어 먹는 사비나는 요즘 들어 살이 좀 쪘다.
힘든 상행 대신 영지에 눌러앉아 매일 맛난 요리를 대접받은 티가 눈에 띄게 났다.
“주군. 언제나 황송하고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FM기사 카르스가 경건하고 존경 넘치는 시선을 보냈다.
- 마나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되면 타이밍 제대로 맞추는 오묘한 포인트 지급.
그 진리는 오늘도 옳았다.
“경들이 보기에 아라돈 후작군은 어떻게 나올 것 같나?”
지구에서도 계속 신경이 쓰였던 아라돈 후작.
루벡 남작 따위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왕국을 선포할 정도로 무력이 막강했다.
휘하의 기사만 수백 명에 병사들도 수십만이 훌쩍 넘는다고 했다.
공격해 오면 나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당장은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사비나가 기름 묻은 입술로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유는?”
“아라돈 후작은 이곳까지 힘을 쓰기에는 지금 상황이 복잡해요. 왕국을 선포하기 위해 주변 귀족들을 포섭해야 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대귀족들도 주변에 많아요. 그리고 백작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요. 아라돈 후작은 보기보다 신중한 귀족이거든요.”
사비나가 밥값 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때는 대륙의 중심이었지만 산맥 통행로가 막혀 이곳은 변방이 됐습니다.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카르스도 정세에 밝았다.
“아라돈 후작은 야심만만한 자입니다. 용병들 중에서도 실력자들은 골라서 우대하기도 합니다. 아마……. 주군께 사절단을 먼저 보낼 것입니다.”
인재풀은 작지만 베커 성의 인물들은 일당백이었다.
탈만까지 의견을 내놨다.
“그래도 역시 위험하다는 소리군.”
“무력이 강하지 않은 영지는 언제나 전쟁 상대가 됩니다. 베커 영지가 과거에는 먹잇감이 될 자격도 없었지만 지금은…….”
사비나가 뒷말을 흐렸다.
내가 가져 온 물건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는 말로 들렸다.
언제나 답은 정해져 있다.
일단 강해지고 나면 상대가 후작이고 나발이고 상관없었다.
그래서 마법이 더 아쉬웠던 것이다.
지구의 과학 기술과 접목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게 자명한 마법이다.
“영주님! 지금 막 상단이 성 근처에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찾아온 반가운 손님.
나를 비롯해 모든 이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
“영주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베스 상단의 상인 바크셔라고 합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이토록 나이가 어리단 말인가!’
바크셔는 베커 성에 입성하자마자 영주에게 안내되었다.
기다리고 있던 상단 소속 사비나와 함께 내성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주를 만났다.
그리고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깜짝 놀랐다.
대륙에서 보기 드문 검정 머리칼에 유색 피부를 한 영주 나이가 아주 어려 보였다.
‘마, 마력이 강하다!’
하지만 바크셔는 나이 어린 영주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은은하게 영주에게서 뿜어 나오는 마력이 강렬했다.
아니 마력보다 더한 그 무엇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귀족의 포스다!’
상인으로 오래 살아온 바크셔는 영주에게서 은연중 풍겨 나오는 기운의 정체를 알았다.
제국 시절 백작급 이상의 고위 귀족에게서 느껴졌던 그 기운이었다.
좌중을 압도하는 강렬한 힘.
그건 바로 귀족만이 품고 있는 자신감이었다.
“여러 신들과 영주님의 은혜 덕분에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바크셔는 더욱더 공손하게 영주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상인이 받은 느낌은 언제나 정확한 법.
눈앞의 영주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풍모와 말투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바크셔 님이 긴장했다.’
사비나는 바크셔의 행동을 지켜보다 놀랐다.
대상단의 1급 상인은 어지간한 귀족 앞에서도 기가 죽는 법이 없었다.
귀한 물건을 취급하는 상인이기에 귀족들이 무시할 수준이 넘었다.
대형 상단의 1급 상인은 중소 영주를 무너뜨릴 정도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 바크셔가 긴장하고 있는 모습은 사비나도 낯설었다.
하지만 이해도 됐다.
‘베커 영주님의 능력을 봤다면 더하시겠지.’
사비나는 며칠 전 사건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웃한 루벡 남작령의 영주가 영지전을 걸어왔다.
누가 봐도 승패를 점칠 수 있는 압도적인 전력 차를 보였다.
사비나는 숨을 죽였다.
성이 함락되면 애꿎은 상인들도 피해를 보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나 베커 영주는 정령을 이용해 가뿐하게 영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사비나는 그때 확신했다.
자신의 예상이 매번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대신 베커 영주를 다시 봤다.
그가 세상을 한 번 뒤집어 놓을 인물임을 말이다.
‘행동도 파격적이었지.’
루벡 남작과 기사들은 모조리 지하 감옥에 투옥됐다.
단단한 쇳덩어리 수갑을 차고 끌려가는 모습은 사비나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귀족과 기사는 포로가 되어도 대접 받는 게 관례였다.
그에 반해 포로 병사들 대부분은 풀려났다.
무기는 압수당했지만 노예로 팔거나 구속하지 않았다.
성벽과 성안의 낡은 집과 건물들 보수에 투입되었다.
먹을 것도 충분하게 제공했다.
포로가 아닌 일당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대했다.
포로들 얼굴이 활짝 펴졌고 성안 주민들과 일이 끝나면 술자리까지 함께 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포로들을 회유한 뒤 남작성에 쳐들어가 한밑천 거하게 챙겨 왔다.
마차가 수백 대 분량이었다.
루벡 남작령에서 무려 수만이 넘는 영지민들이 베커 성으로 이주해 왔다.
그들이 가져온 재산도 영지의 자산이 됐다.
순식간에 과거 영지의 위상을 회복했다.
정말 무서운 베커 영주였다.
“먼 길을 왔지만 그대는 전혀 지친 것 같지 않소. 그대의 눈동자가 어서 물건을 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한 것 같소. 맞는가?”
“황송하옵니다.”
“황송은 무슨~.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들이 아닌가. 바로 들어가서 확인하도록 하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영주가 앞장섰다.
그 뒤를 바크셔와 사비나가 따랐다.
***
1급 상인 바크셔는 한눈에 봐도 대상인이었다.
사비나와는 분위기부터가 확실히 달랐다.
욕망을 품고 있지만 저열하지 않았다.
귀족 못지않은 기품이 그에게서 넘쳤다.
지구에서라면 대기업 사장급처럼 느껴졌다.
깊이 있는 눈빛은 노련한 사업가 같았다.
“이쪽이오.”
지구 컬렉션이 가득한 방으로 상인들을 안내했다.
이번 지구 방문 후 최신상 물품들을 다시 세팅했다.
“아아!!!”
들어서자마자 상인 바크셔가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물의 정령 인어를 불러내 물광 낸 스테인리스 제품들은 오늘따라 광빨이 더 죽였다.
흐뭇하게 경탄에 빠진 바크셔를 바라 봤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워낙 비싼 고가의 물건이었기에 사비나는 흥정에 나서지 못했다.
그렇기에 1급 상인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실로 대단합니다!”
“만져 봐도 된다.”
“오오오! 이 고결한 광택과 매끄러운 마무리까지……. 완벽합니다.”
지구에서는 널리고 널린 스테인리스 제품에 바크셔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기의 보물을 대하듯 다뤘다.
“역시 드워프들이 만든 역작답습니다! 단 한 치도 틀리지 않는 정교함이라니…….”
공장 제품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웃픈 현실 속에서도 영주로서 위엄을 지키며 근엄한 표정으로 무장했다.
“능력이 된다면 마음껏 팔도록 하라.”
“여, 영광입니다! 영주님!”
갈수록 얼굴이 철판처럼 단단해짐을 느꼈다.
얼마 하지도 않는 물건은 차원 좀 건너왔다고 후려치자니 남아 있는 양심이 작동했다.
“영주님. 물량은 어느 정도 준비되었는지요?”
바크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금화 무게만큼 언제나 교환이 가능하다.”
“오오오오!”
다시 터지는 바크셔의 탄성.
오오오오!
내 마음도 바크셔와 다르지 않았다.
바크셔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에 대박을 예견했다.
“엘프들이 제조한 시계도 필요한가?”
“물론입니다! 반드시 필요합니다!”
시계에 대한 보고를 받은 유베스 상단 수뇌부는 환호성을 질렀다.
귀족들과 돈 좀 있는 마법사들에게 이만한 귀중품은 없었다.
엄청나게 돈 되는 물건이었다.
그릇보다 시계가 더 상단에 도움이 됐다.
“가격은 알고 있나?”
“넉넉할 만큼 폐마력석뿐만 아니라 금화와 보석들을 가져왔습니다.”
보석도 콜이다.
폐마력석, 보석과 황금이 가득 찰 아공간을 생각하며 황홀한 상상을 즐겼다.
특히 보석류는 지구에서 어떻게 먹힐지 궁금했다.
“가져갈 품목을 작성하라.”
나도 눈치가 있었다.
마음껏 물건을 보고 고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일명 아이 쇼핑 서비스 타임.
욕심에 눈먼 상인들을 뒤로하고 방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