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9화 (348/1,284)

 # 349

회귀의 전설

349장. 설날 선물

“아, 아빠요……?”

주아가 얼어붙었다.

꿀꺽.

집안에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만 깔렸다.

누구도 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나 때문에 가문의 역사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오정이란 이름에 비할 수 없었다.

오정은 대한민국 재계 서열 넘버원이다.

집에서 사용하는 에어컨, TV, 세탁기, 핸드폰까지 오정 제품이 아닌 걸 찾기가 드물었다.

“해, 핸드폰 부품 회사 경영하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둘째 작은 아버지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반말이 사라졌다.

“네~. 오정전자에서 핸드폰 부품 만들잖아요.”

깜찍이가 웃으며 끔찍하게 답했다.

틀린 소리는 아니다.

핸드폰도 제조하지만 핵심 부품도 오정에서 생산 중이다.

“그럼 엄마가 소소하게 운영한다는 갤러리가……. 오정 갤러리?”

엄마도 뒤늦게 놀라며 물었다.

대한민국 국립 박물관보다 더 값나가는 물건이 널렸다는 소문이 자자한 오정 갤러리였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셔서 엄마가 취미 생활로 관장을 맡고 계세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친목 도모 단체 모임 장소로 더 많이 사용하시는 것 같아요. 엄마가 그림 보는 눈이 없으시거든요~.”

임윤아는 대놓고 본인 엄마 디스를 저질렀다.

“저기 아가, 아니 윤아 양……. 집에서…… 이 사실을…….”

영농회장 아버지가 당황하셨다.

회장도 급이 달랐다.

아가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하던 말투가 조심스럽게 바뀌었다.

“아빠도 아세요. 아빠가 태산 씨를 소개시켜줬어요~.”

임윤아가 또 대답은 똑 부러지게 했다.

“응? 회장님이?”

“오빠를요? 왜요?”

뭐지. 다들 이 황당해하는 표정은?

오정 임성철 회장님 진짜 장사꾼이다.

나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뭔가 수상한 존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임 회장님은 아들과 달리 딸들에 있어서는 배우자 선택을 각자 스스로에게 맡겼다.

일반적인 가정도 딸이 외박하면 아버지의 눈이 돌아가는 게 당연한 반응일 텐데 오정은 달랐다.

아예 임윤아를 모셔다 나에게 맡겼다.

임윤아가 제 발로 장주시에 왔지만 알고도 말리지 않았다.

임 회장님 입장에서는 통 큰 투자였다.

“그럼 잘 부탁한다는 선물이…….”

어머니가 이제 눈치챘다.

오정뿐만 아니라 집으로 M.T.S를 비롯해 대학교, TS 그룹 등에서 선물이 한 아름 도착했다.

공짜니까 받았다.

이 맛에 대표하는 거다.

그 어느 해보다 풍족한 설날이었다.

회사에도 HSBC를 비롯해 여러 증권회사에서 상품권이 도착했다.

여직원들에게 인심 좋게 뿌려줬다.

씨큐리티 직원들에게도 설날 보너스를 넉넉하게 전했다.

이탈리아에 함께 다녀왔던 직원들 말고도 챙길 이들이 많았다.

“윤아 씨. 헬기 올 것 같은데.”

둘이만 있을 때는 반말이 자연스러웠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한 밖에서는 서로 예의를 지켰다.

“……더 있고 싶은데.”

임윤아가 얼굴을 귀엽게 찌푸렸다.

“…….”

다들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했다.

자신들이 편하게 아가라 부르며 반말을 주고받던 처자의 신분이 밝혀진 게 당혹스러운 것이다.

방금 전까지 언니라고 따르던 사람이 오정 그룹의 귀한 막내딸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든 듯했다.

오정은 대한민국의 대표 귀족 가문과 같았다.

오정에 밉보이면 하루아침에 생계가 위협받고 하던 일이 망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오로지 나만 오정이 무섭지 않았다.

오정 그룹 주식 총액을 다해 봐야 수백 조밖에 안 된다.

금융위기라 주식 값이 폭락 중이라 헐값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몇 달 이내로 모조리 내 밑으로 깔 수 있었다.

집안 식구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러니 저렇게 오정 딸이라는 말에 황족을 만난 평민처럼 구는 것이다.

“어머니~ 저 이 전들 좀 챙겨주시면 안 될까요? 아빠가 좋아하실 것 같아요. 엄마가 요리는 꽝이거든요~.”

살살 웃으며 임윤아가 꼬리를 흔들었다.

“그, 그럴까요?”

“어머니~ 아가야~ 그래야죠. 전 오정의 딸 임윤아가 아니라 태산 씨하고 썸 타는 여자 친구 임윤아라구요.”

그 말에 지그시 임윤아를 보는 어머니.

이내 푸근한 미소가 입가를 타고 얼굴로 퍼졌다.

“그래. 아가야. 회장님께 선물 답례로 모자랄 것 같지만 전을 챙겨줄게.”

“네! 어머니!”

우리 엄마도 보통은 넘었다.

그렇게 잠시 어색했던 분위기가 다소 부드러워졌다.

물론 엄마 말고 다른 사람들은 새색시처럼 조신하게 자리를 지켰다.

금방 짐이 꾸려졌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또 놀러와…… 오세요.”

“언니……. 진짜 고마워, 난 영원히 언니 팬이야~.”

“주아, 주희 둘 다 어려운 일 있으면 전화해. 번호 알지?”

“언니 진짜?”

“그럼~.”

쌍둥이들은 세상 든든한 권력을 얻은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인사가 끝났다.

전을 한 보따리 챙긴 임윤아는 고개를 숙이고 대문을 벗어났다.

내 오른손에는 전을 비롯해 각종 반찬들이 잔뜩 든 짐이 들렸다.

임윤아가 팔짱을 꼈다.

“이러니까 시댁 갔다가 친정 가는 아낙네 같아. 흐으.”

임윤아는 만족한 듯 입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설날 인사는 미리 드렸고 부모님이 용돈도 줬다.

어린 시절 말고 명절 때 용돈을 받아 본 적 없다는 임윤아는 진심으로 좋아라 했다.

우리 집과 달리 명절 때 주식 상속이나 명품을 받는다고 한다.

“박사 학위는?”

“그만 할까? 아빠 회사 일찍 상속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경영은 뭐하게?”

“오정에서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없어.”

“오! 대단한데~. 진짜 후회하지 않아? 나에게 장가오면 오정 지분 4분의 1이 태산 씨 거야.”

임윤아가 약을 쳤다.

반대로 나에게 시집오면 세상 지분 상당수가 자기 거라는 건 몰랐다.

“별로 안 땡겨. 돈은 먹고 살 만큼만 있으면 돼.”

“존경해~. 태산 씨 그런 소탈한 성격이 마음에 들어.”

소탈은 개뿔.

나 욕심 더럽게 많다.

다만 발톱을 감추고 살 뿐이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두.

헬기가 다가왔다.

동네 입구 공사 현장에 헬기 착륙지점이 설치됐었다.

그걸 이미 알고 있는 오정의 정보력.

씨큐리티 직원들이 야간봉으로 헬기 착륙을 도왔다.

다들 군필자들이라 이런 것쯤은 문제없이 해결했다.

“박사 들어가기 전에 한 달 정도 서울에 있을 거야. 서울에 오면……. 연락해.”

임윤아가 섭섭한 표정으로 날 봤다.

“설 잘 보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바람에 선물을 준비 못했어.”

“뭐야~ 난 준비했는데~”

임윤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응? 뭘?”

“이거~.”

쪽.

입술에 부드럽게 닿는 임윤아의 따듯하고 보드라운 입술.

“좋지? 다음에는 찐하게 눌러줄게~. 흐흐. 기대하고 있어.”

말하고 나서 장난스럽게 웃음으로 둘러댔지만 임윤아 얼굴은 그새 빨간 홍시가 됐다.

귀여웠다.

두두두두두두두두.

그사이 헬기가 착륙했다.

“연락할게.”

“응~,”

임윤아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헬기에 올랐고 곧바로 이륙했다.

갑자기 나타나 선물을 남기고 간 그녀.

“그래 집에 헬기 한 대 정도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띠리리리리리 띠리리리리리.

그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여보세요.”

- 대표님. 하관우입니다.

“네 회장님. 보내주신 선물 잘 받았습니다.”

- 약소할 뿐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설 인사는 서로 진작 끝냈다.

시골에 내려오기 전 대표들에게도 두툼하게 떡값을 돌렸다.

- 장만수 장관이 초대장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요?”

최상득과 최병박의 심복인 장만수.

지금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앉아 열나게 외화를 풀고 있을 타이밍이었다.

- 기획재정부 장관이지만 정권 실세입니다.

“떡값을 요구하는 건 아닐 테고…….”

- 그와 비슷할 걸 요구할 것 같습니다.

“선물이 필요한가요?”

- ……준비해도 나쁠 것 같지 않습니다. 공정위를 비롯해 세무서, 검찰까지 모두 점령했습니다.”

최병박 정권은 빠르게 행정권력 상부 층을 교체했다.

이제부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타이밍이다.

그 타깃이 TS 그룹이 됐다.

외국계 기업이라 한 번 찔러보려는 심산일 것이다.

돈독이 제대로 오른 도적떼였다.

“만나고 오십시오. 그러나 아무것도 가져갈 필요 없습니다.”

- 네?

“최병박 정권에 고개 숙이거나 인사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청문회나 검찰 포토라인에 설 수 있습니다.”

- 회사를 위해서는 언제든 준비됐습니다!

대웅맨들의 충성심은 어디 가지 않았다.

도운중 회장이 인복은 많았다.

그리고 그 인복은 나에게 그대로 연결 됐다.

꿈을 다 펴지 못하고 패장이 된 도운중 회장에게 새삼 고마웠다.

“제가 안 괜찮습니다.”

- 대표님……. 정권 초기 권력은 무섭습니다. 망나니 칼보다 더 예리하고 날카롭습니다. 다른 기업들은 모두 보호비를 지불한 상태입니다. 저희 TS 그룹만 인사를 못하고 있습니다. 당선 축하금을 내지 않으면…… 집권 내내 괴롭힘을 당할 것입니다. 대웅도 그렇게 날아갔습니다. 관할 세무서에서 이미 경고장이 날아왔습니다.

대웅 시절 집권 권력에 당해본 경험이 있는 하관우 회장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에서 정권에 밉보여 하루아침에 날아간 건실한 그룹들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더러운 똥물에 일조하고 싶지 않았다.

최병박은 사기 치기 위해 대통령이 된 자였다.

그 밑에 덜떨어진 국회의원들은 콩고물을 얻어먹기 위해 밤낮으로 아부하기 바빴다.

어렵게 세웠던 국가 기강이 무너져 내리던 시절이었다.

국민은 욕망에 눈멀어 사기 당한 사실을 한참 뒤에 알게 된다.

언론은 재갈이 물리고 법원과 국회도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그렇다고 나까지 편승해 떨 필요 없었다.

쥐새끼 하나쯤은 꼼짝 못할 보험을 들어 놨다.

오바마 대통령이 정식으로 취임했다.

그 밑에 장관 두 사람이 나의 라인이었다.

로버트 라이언이 추천한 인사 중에 인터넷 면접을 보고 임명했다.

자본주의 나라답게 오바마 대통령은 쿨하게 수락했다.

쥐새끼 정도는 마음대로 조질 수 있었다.

권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내용을 녹음해 두십시오.”

- 노, 녹음요?

“두렵습니까?”

- 알겠습니다! 확실히 녹음해 두겠습니다.

지금까지와 다른 내 방식에 하관우 회장이 당황했다.

무릇 성인은 허명과 공능(功能)을 세상에 떠벌리고 자랑하지 않는다 했지만 난 아니다.

있는 힘, 덤비면 왕창 쓸 용의가 있었다.

정권 초기라 기회도 좋았다.

최병박과 그 휘하 쥐 떼들을 잡기에 시기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하 회장님, 부탁이 있습니다.”

- 말씀하십시오. 대표님.

“최신형 헬기로 두 대 정도 그룹 명의로 구입하십시오.”

- 헬기요?

“돈은 아끼지 마십시오.”

- 설 연휴 지나면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대표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백수였던 그를 회장으로 만들어줬다.

지난 한 해 하관우 회장만큼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그룹 대표는 없었다.

“설 잘 보내십시오.”

- 명절 끝나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임윤아를 태운 헬기는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언제 눈이 내렸냐는 듯 하늘은 맑게 개이고 시린 별들이 총총 떴다.

“설날 선물 좀 풀러 가 볼까나~.”

우주 그 어느 구석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나의 인연들.

오늘은 설이다.

그들에게 선물하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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