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8화 (347/1,284)

 # 348

회귀의 전설

348장. 그녀의 무게 21그램

“태산아……. 나 좀 살려줘라…….”

“뭘 살려줘? 북한에 침투라도 하냐?”

“흐끅……. 그게 아니라……. 나…… 면회 좀 와줘…….”

“면회? 내가?”

“너 말고 서련이 좀 보내줘! 서련이! 흐끅.”

술을 너무 마셨는지 딸꾹질까지 하는 형철이 녀석.

뜬금없이 술주정을 하며 서련이 이름을 꺼냈다.

“서련이가 니 면회를 왜 가, 인마!”

“네가 군바리 세계를 알아?”

오늘따라 형철이 주사가 귀여웠다.

“너 선임들에게 뻥카 쳤지?”

“…….”

“여자 친구는 없고 아는 동생 대라고 해서 서련이 안다고 했지?”

“!!!”

형철이 눈동자가 화들짝 커지며 멍텅구리 눈에서 깨어났다.

군대를 모르기는 개뿔.

만기 병장 제대자 속을 이제 이병이 뭘 알겠나.

안 봐도 빤했다.

형철이 자식 살기 위해 서련이를 판 것이다.

막사에 갇혀버린 청춘들은 대부분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기형적으로 극에 달한다.

특히 신병의 여자 사람관계에 대단한 촉을 세운다.

여자 친구, 여동생, 하다못해 여자 동기나 동창들에까지 더듬이를 댄다.

무조건 전화번호를 많이 아는 놈이 사랑받고 예쁨을 받는 세계다.

털어서 없으면 갈구고 대놓고 선임들에게 구박을 받는다.

설날에 이렇게 휴가까지 나왔을 정도라면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형철이가 확실히 개뻥을 친 것이다.

이대로 수확 없이 복귀하면 최소 1년 갈굼각이다.

요즘 최고로 핫한 FOB였다.

그중에 센터이자 미모 담당인 서련이를 팔았으니 알 만했다.

장주시에 오자마자 날 찾은 형철이의 시커먼 속내가 이제 드러났다.

“태산아…….”

형철이가 정신이 든 눈빛으로 나를 보며 바짝 긴장을 탔다.

나의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행이 갈릴 것이다.

“형이라고 불러라. 생일도 11월인 놈이 어디서 형한테~.”

“……형.”

“뭐라고? 안 들려~.”

“태산이 형!”

군인 아니랄까 봐 3차에 이른 호프집이 떠나가라 크게 소리쳤다.

“뭐야? 태산이한테 형이라고 한 거야?”

“저 자식 미친 거 아냐?”

얼큰하게 취한 친구들이 나를 형이라 부르고 있는 형철이를 또라이 취급했다.

아직 군대를 안 간 녀석들.

나중에는 이런 형철이가 진짜 부러울 것이다.

“그래. 네가 군대를 가더니 사람이 됐구나. 흐흐.”

“그렇지요 형……. 우리 우정이 남다르지 않습니까~ 흐흐흐.”

나보다 더 음흉하게 웃는 형철이.

은근히 아닌 척하며 내 다리를 베고 쓰러져 있는 임윤아를 봤다.

미국에서 오자마자 나를 찾아왔다는 임윤아.

안면 있던 친구들과 허물없이 술을 마음껏 들이켜더니 금세 취해 쓰러져 버렸다.

“어쭈~ 협박도 배웠냐?”

“군대 스킬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형~.”

아름다운 우정의 증표들을 여차하면 불겠다고 협박도 할 줄 아는 형철이가 웃겼다.

녀석 덕분에 내 컴퓨터를 훔쳐간 놈들에게 빅 엿을 선물하긴 했다.

한 번쯤 원하는 걸 들어줘도 나쁠 게 없었다.

지난 생 역시 형철이 덕분에 길고 긴 밤들을 심심치 않게 보냈었다.

“다음 달에 자대로 공문 보내놓으면 되는 거지?”

“어! 그, 그게 네 마음대로 가능해? 정말 FOB 보내주는 거야?”

“뭐! FOB!”

“뭐야? 갑자기 FOB는 왜 나와!”

술에 취한 녀석들이 FOB라는 말에 승냥이 떼처럼 관심을 보였다.

“서련이에게 부탁해 볼게.”

“와아……. 너 아직도 서련이랑 연락해?”

“아니 그럼 우리 누나는 뭐야? 너 지금 양다리야?”

눈알이 뒤집혀 광분하는 녀석들.

고등학교 때도 그러더니 아직도 나에 대한 적개심은 달라지지가 않았다.

“내일 설인데 다들 일찍 가라. 난 먼저 간다~.”

새벽 3시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됐다.

내 외투를 이불삼아 덮고 잠들어 있는 임윤아를 안아 올렸다.

새털처럼 가벼웠다.

“어, 어디가?”

“집에.”

“집? 어디? 아파트?”

“응~.”

“와아아아……. 너 술 취한 누나 안고 아파트에 가겠다고?”

“처음도 아닌데 문제 있어?”

“…….”

애들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놀란 토끼눈들이 술에 취해 바들바들 떨렸다.

분노의 에너지가 날 잡아먹을 듯 쏟아져 나왔다.

“올 설에는 다들 엄마 젖 더 먹어라. 애들이랑 내가 무슨 얘기를 하겠냐~.”

언제나 승자는 나였다.

“계산 더 했다. 더 먹고 싶은 것 많이 먹고 가라.”

임윤아를 안고 등을 돌렸다.

“야! 장태산!”

“왜!”

“X발. 존경한다…….”

“그래 네가 인생 승자다! 아우!”

사방에서 한탄을 터트리며 맥주를 벌컥거리는 친구들.

좀 더 분발해서 청춘을 불사르라는 격력의 의미로 오늘 설날 선물은 제격이었다.

사박사박.

임윤아를 안고 아파트로 향했다.

제법 눈이 쌓였지만 내공을 사용해 무게 중심을 잡고 걸어서 미끄럽지 않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재미가 쏠쏠했다.

“추워…….”

임윤아가 한기를 느끼고 품에 파고들었다.

정말 하나도 무겁지가 않았다.

지난 생이었다면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 임윤아였다.

지금 느껴지는 그녀의 무게는 영혼의 무게 21그램뿐이었다.

그리고 은은하게 맡아지는 겨울 장미향.

갑자기 시 한 편이 절로 떠올랐다.

푸시킨의 영향인 듯 과거에 알지 못했던 시였다.

“십구 세기 봄꽃 핀 어느 밤……. 첼로 선율의 낮은 빗소리. 밤하늘을 수놓은 푸르른 별빛, 따사로움 머금은 감미로운 손길, 고독이 스미는 당신의 머리카락…….”

임윤아의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비단처럼 부드럽게 나풀거렸다.

“찬란한 사랑의 하룻밤, 선연한 핏빛 그리움으로, 긴 세월 낭자한 가슴앓이 먹먹함으로, 깊은 밤 꼬박 세워 짧은 젊음을 잠식했다.”

임윤아가 나를 만나기 전에 느꼈을 고통이 전해지는 듯했다.

이 밤, 이 시간 그녀와 무척 잘 어울렸다.

“세월은 투명한 유리잔 가득 채우고 넘쳐 어느 날 문득……. 작은 정원 담벼락 틈새 장미로 피어 향기로운 여인의 가슴으로 숨을 쉰다…….”

숨을 쉬는 임윤아의 작은 숨소리가 심장 박동에 맞춰 느껴졌다.

장미향과 섞인 그녀의 달콤한 숨 냄새.

“또다시…….”

<장미의 영혼>이라는 시가 입에 착착 감겼다.

그 사이 도착한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작은 참새처럼 여린 숨을 쉬는 임윤아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창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렸다.

잠든 임윤아 곁에 조용히 누워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봤다.

***

“아…….”

간밤에 달달한 꿈을 꾸고 눈을 뜬 임윤아.

태산의 친구들과 열심히 잔을 주고받으며 달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석사 코스가 마무리됐다.

장태산의 그림으로 쳉리 교수의 코를 납작하게 눌렀다.

교수들이 원더플을 외치며 패스 서류에 사인했다.

합격하자마자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장주시에 도착해 지난여름 만났던 태산의 친구들과 어울렀다.

나이는 어리지만 대학생활을 즐겨보지 못한 임윤아는 그 분위기가 유쾌했다.

누님 누님 하며 태산의 친구들이 자신을 여신처럼 받들었다.

가볍고 발랄한 분위기에 금세 취했다.

그리고 눈을 뜨니 지난여름에 봤던 천장 무늬가 보였다.

“깼어?”

부드러운 중저음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평생 들어도 좋을 음성이었다.

“응…….”

겨울이라는 계절이 좋았다.

침대 위에서 옆에 있던 장태산을 마음껏 껴안았다.

‘칫……. 이번에도 실패다!’

한국에 오는 동안 반드시 태산과 거사를 치르겠다고 마음먹었던 임윤아였지만 실패했다.

기분 좋아 마신 술이 그녀의 희망 계획을 삭제시켜 버렸다.

“집에 안 갈 거야?”

“어디?”

“어디긴 어디야. 서울 집 말이야.”

“흐흐~ 아버님 댁에 먼저 인사드리고 가야지.”

“뭐라고?”

임윤아의 당찬 대답에 도리어 장태산이 당황했다.

‘이럴 때 보면 귀엽단 말이야.’

미국 생활 중에 많은 남자들이 임윤아에게 대시했다.

하지만 한 번도 마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장태산에게는 활짝 열려버렸다.

“타고 온 차에 입고 갈 옷도 가져왔어. 나 잘했지?”

“…….”

임윤아는 나름대로 치밀하게 이번 일을 준비했다.

장태산은 그런 임윤아를 바라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띠띠띠디디딕.

그때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어머님이 오셨나~.”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칼을 정돈하며 문 밖으로 나가는 임윤아.

행동만 보면 10년 차 내공의 며느리 같았다.

장태산은 멍하니 그런 임윤아의 자연스러운 뒷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그래. 아버지가 핸드폰 부품 회사 운영한다고?”

임윤아 부친에 대한 정보를 들은 둘째 작은 아버지가 임윤아에게 넌지시 아는 체를 했다.

“네~ 작은 아버님. 요즘은 사업이 잘되셔서 쪼금 더 커졌어요.”

“그래? 다행이네. 요즘 경기가 어려운데 잘된다니…….”

오정이 쪼금 더 커져?

여자가 참 단수가 높은 존재라는 걸 오늘 또 한 번 확인했다.

임윤아 말대로 엄마가 집에 찾아왔다.

시내 장에 필요한 걸 사러왔다가 들렀다는 엄마.

화사하게 웃으며 현관 앞에서 당신을 맞은 임윤아를 보고 엄마는 놀라지 않았다.

두 여인은 서로 보고 싶었다며 진한 포옹까지 했다.

빼박의 2탄이었다.

천천히 씻고 집에 오라는 말에 임윤아는 새색시처럼 배시시 웃었다.

상황이 얽히고 얽혀 이제는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임윤아를 나의 여자 친구로 공식화했다.

“손이 야무지네. 학교는 졸업했어?”

아무것도 모르는 둘째 작은 어머니가 물었다.

“이번에 석사 학위 받았어요.”

전을 부치다말고 살포시 웃는 임윤아.

미국에서 공부만 했던 그녀가 저렇게 손이 빠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누가 보면 신부수업이라도 받은 줄 알 정도였다.

오정 그룹에서 손에 물도 안 묻히고 살았을 법한 그녀의 예상 밖의 행동은 의외였다.

“그래? 공부 잘하나 보네. 학교는 어디야?”

“예일 대학교요.”

“예일……. 응? 뭐라고?”

아무 정보도 없는 작은 어머니는 예일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작은 엄마. 언니 하버드 경영학과 졸업했어요. 유학파예요~.”

“그, 그랬구나…….”

둘째 작은 어머니가 입을 다물었다.

쌍둥이 주아가 임윤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쌍둥이들은 임윤아의 학벌에 뻑 갔다.

내 말보다 임윤아의 말을 더 신뢰했다.

임윤아가 미국에서 가져온 선물에 입이 돌아간 건 나중에 안 사실이다.

“윤아야. 쉬었다 해. 괜히 놀러와 고생이다.”

엄마가 임윤아를 챙겼다.

“아니에요. 어머니. 재밌어요~.”

평생 처음 전을 부친다는 임윤아는 진짜 행복해 보였다.

“태산이가 여자 보는 눈이 있네~.”

둘째 작은 어머니가 임윤아가 마음에 드는 듯 날 보며 웃는다.

“하, 하하하.”

피할 수 없어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엄청난 규모의 돈을 굴리는 나였지만 오늘은 집에서 산적꼬치를 만들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로버트나 기타 등등의 사람들은 알 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집에서 뭐라고 안 하셔? 본가가 서울이라고 안 했어?”

셋째 작은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서울 맞아요.”

“요즘 역귀성 행렬로 상행선도 막히는데……. 늦지 않겠어?”

“금방 가요.”

“아니야. 막혀서 늦어.”

“하나도 안 늦어요. 저녁도 먹고 갈 거예요~.”

임윤아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

올 게 왔다.

핸드폰 화면에 떡하니 뜨는 오정 회장님이라는 닉네임.

“장태산입니다.”

- 그래. 태산 군~ 날세.

“미리 전화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바쁜 친구가 전화는 무슨~. 이제 늙어서 할 일 없는 이 늙은이가 먼저 해야지~.“

뼈가 담긴 임성철 회장의 농담 같지 않은 농담.

“죄송합니다. 회장님.”

- 죄송한 건 알고?

“넵…….”

- 그건 그렇고 이제 우리 딸 좀 보내주면 안 될까? 나도 보고 싶어서 말이야. 이 녀석이 핸드폰도 꺼놨어.

“……죄송합니다.”

- 날 닮아서 엉뚱한 매력이 넘친단 말이야. 크크크.

임윤아 배짱이 아버지 임성철 회장을 닮은 게 확실했다.

- 헬기 보냈어. 30분 정도면 도착할 거야.

“알겠습니다.”

- 설 인사 한번 와. 술 한잔하게.

“곧 찾아뵙겠습니다.”

- 그래. 수고해.

“보내주신 선물 감사히 받았습니다.”

- 뭘 그 정도 가지고~ 설 잘 보내게.

“들어가십시오.”

핸드폰을 잡고 정중하게 통화를 마쳤다.

“오빠 누구야? 왜 바짝 쫄고 그래?”

쌍둥이 막내 주희가 나의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다 물었다.

전을 부치다 말고 다들 그대로 멈춘 채 날 쳐다봤다.

궁금한 것이다.

“……오정 임성철 회장님.”

“뭐? 오정 회장님???”

다들 화들짝 놀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태산아……. 농담도 가려서 해야지. 바쁜 오정 회장님이 너한테 왜…….”

셋째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와 안방에서 술을 마시다 한 마디를 던졌다.

“오정 회장님이 선물 보내셨다. 대관령 한우 세트에 장뇌삼, 옥돔 등등~”

술을 한잔하신 아버지가 의기양양하게 자랑을 날렸다.

“진짜요?”

“그럼 내가 거짓말할까~.”

“그런데 오정 회장님이 태산이한테 왜???”

모두가 날 보며 답을 구했다.

“저…… 윤아 씨.”

“네~ 태산 씨~.”

“집에서 헬기 보냈다고 잠시 후면 도착한답니다.”

“벌써요? 히잉……. 더 놀다 가고 싶은데……. 아빠는 참…….”

바로 울상이 된 임윤아.

“…….”

그 말에 넓은 거실에 정적이 휘돌았다.

다들 몸통 위에 올려놓은 머리가 장식품은 아니었다.

방금 전 내가 오정 회장님과 통화를 한 건 다 봐서 안다.

그런 오정 회장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여성은 많지 않다.

“언니……. 임…… 윤아가 설마……. 오정 회장님이…….”

주아가 주먹을 쥔 채 심장 쪽을 누르며 겨우 새어나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응……. 임성철 회장님이 우리 아빠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