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7화 (346/1,284)

 # 347

회귀의 전설

347장. 설날에 찾아온 그 누나 (2)

“태산이는?”

“시내 아파트에 도착했다고 전화 왔었어요.”

“녀석, 고향에 왔으면 집부터 찾아와야지.”

“친구들 한참 만날 나이잖아요.”

“나도 보고 싶은데…….”

“당신 갱년기 왔어요? 어떡해 우리 신랑 이제 아재가 됐네~.”

“아재? 끄응…….”

장대국은 아내 주설란의 농담에 앓은 소리를 냈다.

하나뿐인 장남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뿐만 아니라 사업도 엄청 크게 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에게 미술관뿐만 아니라 대학교 법인도 선물한 통 큰 아들.

장대국은 진심으로 보고 싶었다.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된 아들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3년 전 고2 때부터 아들은 많이 변했다.

위축되고 왜소했던 내성적인 녀석이 하룻밤 사이에 확 바뀌었다.

몸이 건강해진 것뿐만 아니라 말투까지 낯설었다.

고등학생이 아니라 몇 년 사회생활을 한 성인 같았다.

집안 빚부터 시작해 기반이 불안했던 재정 문제 모두를 아들이 감당했다.

그런 아들 앞에 무능한 아버지 같아 미안했다.

그때마다 부모님이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게 행복이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아들이었다.

애써 감추고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런 아들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제수씨들은?”

“내일 아침에 온대요. 다들 바쁘잖아요.”

“그래봤자 당신보다 바쁠까~.”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설거지 당첨입니다.”

“그럴까?”

일주일에 하루는 서울로 출장을 가야 하는 아내는 늘 바빴다.

처음 만날 때처럼 미모가 꽃을 피웠다.

완숙한 중년 미부인이 따로 없었다.

자신감도 넘치고 건강도 되찾았다.

그럼에도 결코 도도하거나 거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본래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했다.

집에서 꼬박꼬박 밥도 하고 쌍둥이들 뒷바라지도 해냈다.

촤아아아앗.

설거지를 시작하는 장대국.

“고마워요~.”

듬직한 남편의 등을 바라보며 주설란이 활짝 웃었다.

잘난 아들도 남편이 있기에 의미가 있었다.

남편 역시 능력은 충분히 있지만 사람이 너무 좋은 게 탈이었다.

그 인간미에 반해 결혼을 감행했으니 할 말은 없었다.

오빠가 주선했던 정략결혼을 따랐다면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이 행복의 척도가 아니라는 걸 어릴 적부터 알아버린 주설란이었다.

성실하고 사람 좋은 남편은 그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그걸 악용하는 친구라는 탈을 쓴 지인들이 문제였다.

힘들 시절을 보냈지만 커가는 아이들 덕에 시름을 잊었다.

빚이 늘기는 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시골집도 감사했다.

‘그때 그 할머니 말이 사실이었어…….’

사실 주설란에게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아들 고2 여름방학 때 갑자기 이상한 꿈을 꿨다.

호랑이를 타고 나타난 할머니는 그동안 수고했다고 말하며 앞으로는 잘 될 거라고 주설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할머니였지만 푸근함에 주설란은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그 할머니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깨고 보니 꿈이었다.

그날 이후 거짓말처럼 아들이 변했다.

엄마는 자식들에게서 눈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주설란이 볼 때 확실히 뭔가 바뀐 아들.

변해도 너무 변했었다.

눈빛이 깊어졌고 행동도 신중해졌다.

공부뿐만 아니라 운동도 열심이었고, 농사일도 도왔다.

아들의 긍정적 변화에 흐뭇해하던 주설란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악했다.

주설란도 감당할 수 없는 부를 얻기 시작한 것이다.

순수하게 그 모든 부는 미성년자 아들의 능력이었다.

그런가 싶더니 급기야 서울 명문대학교 이사장에 갤러리 관장까지 도맡게 해주었다.

통장에는 죽을 때까지 써도 다 쓰지 못할 돈이 들어 있었다.

그 돈을 주설란은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아들이 벌어준 피 같은 돈을 의롭고 올바른 곳에만 사용했다.

“와아~ 우리 아빠 이제 설거지가 자연스럽네?”

“아빠. 멋있어요~.”

동네 친구를 만나고 들어온 쌍둥이들이 아빠에게 달려가 칭찬을 날렸다.

“너희들도 나중에 시집가면 아빠 같은 남자 만나야 해~. 알았지?”

주설란이 눈을 찡긋하며 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럼요. 아빠가 제 이상형이에요!”

“아빠 같은 남자가 세상에 있을라나 몰라? 우리 엄마 진짜 땡잡았다니까~.”

고3이 된 쌍둥이들도 넉살이 늘었다.

설거지하던 아빠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삐이이이.

그때 현관 인터폰이 울렸다.

아들이 보낸 경호원에 의해 방문자들이 걸러졌다.

“무슨 일인가요?”

주설란이 인터폰을 통해 물었다.

[사모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요?”

[오정 그룹 비서실에서 설날 선물을 들고 온 것 같습니다.]

“네? 오정 그룹 비서실요???”

주설란의 말을 듣고 모두 다 놀랐다.

“일단 들어오라고 해. 손님이래잖아.”

오정의 이름이 가볍지 않았다.

장대국이 손님을 집 안에 들이라고 허락했다.

“들여보내세요.”

[알겠습니다.]

“오! 우리 집에 오정에서 선물이?”

“오빠가 아는 분들이겠지~.”

“그래도 오정은 좀 센데?”

오빠가 뭔지 몰라도 대단한 사업을 한다는 것 정도는 쌍둥이들도 눈치챘다.

잠시 후 경호원들의 2차 검문을 받으며 대문이 열렸다.

마당으로 들어오는 오정의 비서실 직원들.

그 수가 무려 열 명.

정장을 차려입고 손에 각종 선물 꾸러미를 들고 줄줄이 들어섰다.

그들은 주설란이 현관문을 열자 일제히 도열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오정 비서실 안익수 과장입니다.”

비서실 직원을 이끌고 나타난 안익수 과장이 명함을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주설란은 고개를 속여 인사를 받았다.

오정과 딱히 이런 관계에 놓일 만한 일이 없었고 또 토요일 저녁 방문이 의아스러웠다.

“일찍 찾아봬야 했지만 설날 귀성객으로 인해 좀 늦었습니다.”

안익수 과장은 최대한의 예를 보였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먼 길을 오셨는데 차라도 한 잔하십시오.”

사람 좋은 장대국이 손님을 안으로 안내하려 했다.

“아닙니다.”

안익수 과장은 살짝 웃기만 했다.

“그런데 오정에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주설란이 의아스럽게 물었다.

“회장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셨습니다.”

“네? 회장님요?”

가족들 모두 깜짝 놀랐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부족한 점이 많지만 부디 넓은 아량으로 부탁드린다는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주설란을 비롯해 장대국, 그리고 쌍둥이들은 이 갑작스런 방문과 전하는 말을 해석하기 위해 서로를 번갈아 바라봤다.

하지만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했다.

말하는 투로 보아 누군가를 부탁하는 것 같았지만 장 씨 집안 가족들 누구도 오정 사람들과 맺은 인맥이 없었다.

***

“이병 김형철은 휴가를 명받았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피이이일승!”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형철이가 장난스럽게 군례를 올렸다.

“이병 수고했다. 쉬어~.”

전직 병장의 자연스런 손짓으로 경례를 받았다.

“오! 군대도 안 간 자식이 우리 꼰대 병장님 같은 제스처? 뭐야?”

형철이 살짝 놀라워했다.

“이병이 빠져가지고. 김형철 이병!”

“넵! 이병 김형철!”

“앉아서 친구에게 술 일발 장전한다. 실시!”

“실시!”

2009년도까지는 아직 군기가 살아 있었다.

과거 먹었던 병장 짬밥으로 명령을 내리자 몸에 밴 형철이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잔에 소주를 채웠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

“야! 그만 좀 웃겨라. 너희들 개그 하냐?”

“장태산. 너 진짜 예비역 같다~.”

오랜만에 친구들이 모였다.

작년 여름에 봤던 녀석들 얼굴은 그새 성숙해졌다.

2학년에 올라가거나 이제 군대를 갈 녀석들이라 벌써 사회의 때가 묻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청춘의 시간들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난 알고 녀석들은 모르는 시간의 비밀이었다.

“도중아. 넌 언제 입대냐?”

“……다음 달. 아우! 죽것다!”

“2월 군번이면 꿀이네.”

“뭐가 꿀이야! 나는 심장 떨리는데!”

“형철아 이 자식 엄살떤다. 이번 겨울에 맛봤던 하얀 똥가루와의 전쟁에 대해 좀 읊어 봐라.”

“윽…….”

하얀 똥가루라는 말에 형철이 얼굴이 썩어갔다.

최전방에 떨어진 형철이에게 눈은 악마가 싸지른 똥 같았을 것이다.

“도중아……. 행복한 줄 알아 새꺄! 2월에 훈련 받고 3월에 자대배치 받으면 쫄따구 때 똥 치울 일은 없잖아. 거기에다가 겨울 되면 최소 일병 말호봉 각인데……. 부러운 새끼! 저 자식을 내가 끌고 갔어야 했는데!”

술병을 기울이다 말고 그대로 원샷을 때리는 형철.

군대를 안 가 본 녀석들은 공감하지 못할 얘기였다.

이병이 맞이했을 기나긴 겨울.

그냥 죽을 수 없는 지옥이었을 것이다.

“친구야. 힘내라. 네가 쌓은 복이 지금까지 그것밖에 없는 걸 어떡하냐~.”

“뭐라고? 에라이. 나쁜 놈아!”

귀여운 형철이 투정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태산아 오늘은 혼자냐?”

“어?”

“그때 그 누나 안 왔어?”

“누구?”

“술 잘 사주는 그 누나!”

사방으로 눈알을 굴리며 다들 누나를 찾았다.

자식들 겁도 없이 오정 그룹 막내딸을 그리워했던 모양이었다.

이래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는 것이다.

“그 누나 미국 유학 중이다. 바빠.”

“정말?”

“아우……. 아쉽다. 진짜 이상형인데…….”

“동생이나 후배는 없대? 미인은 미인들과 어울린다는데…….”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시커먼 늑대 같은 놈들 심보가 다 보였다.

임윤아의 등장은 그 당시 파격적이었다.

재벌 집 막내딸이라고 해도 누구도 믿지 않았다.

사실 나도 임윤아가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

그녀만 만나면 이상한 그림이나 왕창 그리다 시간이 다 가버렸다.

만남은 늘 그렇게 끝나 버렸다.

드르르릇.

그때 낡은 식당 문이 열렸다.

“어!”

“누나다!!!”

“누나아아아아아!”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던 녀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누나?

누나라는 말에 나도 고개를 돌렸다.

“어머~ 얘들아. 나 보고 싶었어~.”

귓가에 들려오는 통통 튀는 밝은 목소리.

“!!!”

그녀였다.

미국에서 석사 코스를 밟고 있어야 할 임윤아였다.

그녀가 코트 위에 앉은 눈을 털어내며 날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믿기지 않았다.

눈가에 어린 피로가 한국에 오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온 것 같았다.

“윤아 씨…….”

“태산 씨~.”

환하게 웃는 임윤아의 얼굴과 따뜻한 눈동자.

내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와아아! 장태산 누나 불렀어?”

“저 자식 누나 혼자 만나려고 쌩깐 거야!”

“학교 때부터 그랬어! 나쁜 새끼 장태산!”

“타도하자. 장태산!!!”

친구들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를 몹쓸 놈으로 몰았다.

분위기가 요상해지더니 녀석들이 일제히 으르렁거렸다.

“얘들아~.”

다시 한 번 식당에 울리는 맑은 목소리.

“…….”

순식간에 잦아든 소란, 그리고 찾아온 침묵.

“오늘 이 누나가 다 쏠게~ 콜?”

“와아아아아! 누나! 누나! 누나!”

“코오오오올!”

조삼모사 원숭이들을 다룰 줄 아는 임윤아.

한 마디로 장주시 원숭이들을 순한 양으로 만들어 버리고 여왕 중의 여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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