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6화 (345/1,284)

 # 346

회귀의 전설

346장. 설날에 찾아온 그 누나 (1)

“오원 장승업은 폭이 좁고 긴 화폭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중국 명과 청 시대의 영향을 받았음은 확실합니다. 교수님들도 알고 계시는 남종화와 북종화 화풍을 모두 흡수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예일 대학 9월 가을 학기의 마지막 시간.

임윤아는 미술사 석사 과정 논문 심사를 받았다.

몇 달 동안 준비한 오원 장승업에 대한 논문.

교수들은 흥미롭게 19세기 한국 화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동양화는 중국이 중심이라 생각했던 그들에게 변방인 한국 화풍은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오늘 석사과정 논문 심사를 받는 대상도 흥미로웠다.

미국 재계에서도 회자되는 한국 그룹 오정의 딸이었다.

미국이 아무리 차별이 없다지만 거짓말이었다.

합리적 차별이라는 명분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명문대학교는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명문가 자제들을 뒷문으로 입학시켰다.

동문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명문가 자녀들 중에서도 정정당당하게 정문을 통해 들어온 실력자들이 엄연히 존재했다.

눈앞의 임윤아처럼 말이다.

“장승업의 예술적 업적은 중국화의 모방이 아니라 자신의 특별한 화필로 민족적 정서를 마음껏 담아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이 조선 말기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 화단의 문예 부흥을 이끌고 있기도 합니다.”

자신감 넘치는 임윤아의 설명에 심사 교수들 상당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방이 아니라는 말에 동의할 수가 없군요. 자료로 제출한 장승업이라는 한국인의 화풍은 원나라 사대가의 화풍과 미법산수의 화풍이 남아 있어요. 대상의 중심은 먹을 번지게 만들고 그 위에 점을 찍어 내었군요. ‘방황자구법산수도’라는 그림에서도 명확하게 남종화 화풍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학생의 논문은 객관적 사실보다는 민족적 주관이 많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계 교수인 쳉리가 안경을 만지며 은근히 반박했다.

동양사를 담당하고 있는 쳉리 교수의 반박에 교수들 시선이 임윤아에게 향했다.

보이지 않는 민족 간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분명히 서두에 중국 화풍 영향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수님이 다시 한 번 짚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임윤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석사 과정 수업에서도 태클을 걸던 중국인 교수였다.

파바밧.

쳉리와 임윤아의 눈빛이 마주치며 불꽃을 튀겼다.

임윤아의 석사 과정 패스는 여기서 결정이 될 거라는 걸 모두 알았다.

미술사에서 동양사는 쳉리 교수의 담당이었다.

지도 교수가 달랐지만 영향력은 무시하지 못했다.

교수들도 흥미롭게 두 사람을 지켜봤다.

논문 수준은 괜찮았지만 자료가 살짝 아쉬웠다.

획기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논문 자료는 이게 단가요?”

쳉리가 살짝 비웃으며 물었다.

‘어디서 감히 조선족 따위가!’

쳉리는 대학에서도 중국계라 은근히 무시를 당했다.

중국에서 유학 오는 학생들은 집안이 부자일지 모르나 선진문화에는 이질적이었다.

미국인 저변에 갈린 차이니스에 대한 저급 의식도 작용했다.

갑작스럽게 돈을 번 졸부 취급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에 반해 한국인들은 부지런한 노력파로 알려졌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부를 축적했다.

미국 시민들은 열심히 사는 자들을 존경했다.

그에 반해 중국은 한탕으로 부자가 된 자들 천지였다.

눈앞에 있는 임윤아는 특히 한국 재벌의 딸.

여러 가지 민족적 자존심이 결합된 상황에서 쳉리는 임윤아의 석사 학위를 훼방 놓고 싶었다.

얼마 전 넌지시 심사 내용을 말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한 것에 대한 앙심도 작용했다.

대충 중국 화가 작품 몇 개 끼워 넣으면 통과 시켜주겠다고 말했었다.

중국 화풍에 대단히 영향을 받은 조선 시대 화가 정도로 소제목 수정을 요구했던 것이다.

물론 심사비를 따로 요구하기도 했다.

임윤아는 당당히 실력으로 통과하겠다고 통보했다.

“아닙니다. 여기 계시는 교수님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래요? 그게 뭔가요?”

지도 교수인 제임스 브라운도 모르는 내용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촤라라랏.

임윤아는 심사실 한쪽에 천으로 가려져 있는 화폭들의 천을 힘차게 걷어냈다.

그 순간 드러나는 처음 보는 동양화 몇 점.

“오! 마이 갓!”

“세상에…… 이 동양화는 뭔가요?”

“원더풀! 아름다워요…… 정말 매혹적입니다!”

미술사를 전공하는 교수들답게 그림이 엄청난 대가의 손에 의해 탄생했음을 직감했다.

살아 있는 듯 생생한 매화도를 비롯해, 장엄하고 진중한 신선도까지 한눈에 보는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담겨 있는 작품의 기운이 영혼을 끌어당겼다.

보는 순간 빨려 들어갈 듯한 마성의 동양화였다.

“지금 보시는 작품들은 오원 장승업의 중기와 말기로 넘어가는 화풍을 대변하는 작품들입니다. 보시다시피…….”

놀란 교수들 앞에서 설명을 이어가는 임윤아.

굳이 진품이거나 가품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먼저 제출한 화풍과 똑같다는 걸 미술사를 전공한 교수들이 모를 리 없었다.

‘당신의 패배야! 양심도 없는 중국인!’

임윤아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는 쳉리 교수를 보고 이번 심사가 쉽게 끝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바로 오늘 귀국할 거야!’

임윤아는 힘을 냈다.

설날이 멀지 않았다.

이번 설에는 반드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

고향은 언제나 정겨웠다.

세상 모두가 날 버려도 다시 품어 줄 어머니 같았다.

과거 생에도 마지막에는 고향을 찾아가려 했었다.

하늘의 안배로 자동차 사고를 당해 다시 살고 있는 이번 삶.

장주시 아파트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변함없이 날 반겼다.

장주강의 도도한 강물도 여전했다.

눈이 내렸다.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강예서를 탐하려던 두 짐승들 옥수수를 상당수 털어냈다.

팔도 하나 아작 내고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었다.

스태프들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그놈들도 한통속이었다.

한 공간에서 일을 하는데 범죄 행위를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됐다.

먹고 살기 위해 모른 척했다는 것 자체가 공범이라는 소리다.

3억 원의 카르마 포인트는 생각보다 많았다.

악신에게 제대로 포섭당한 장기동 감독이 피떡이 되어 모래사장에 쓰러졌다.

발정난 개새끼 주재국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털고 강예서와 함께 헬리콥터에 올랐다.

아직 부족한 씨큐리티 직원은 그 다음 날 미국 특별 캠프에 보냈다.

몇 달 구르고 나면 세상 보는 눈이 다시 밝아질 것이다.

장기동은 날 고소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도 있었지만 돈에 넘어갔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치과에서 금니로 갈아 꼈다고 했다.

영화 촬영 중에 사고를 당했다고 뉴스 한 자락이 났다.

스태프들도 입을 다물었다.

주재국도 떠들지 않았다.

작은 악마 새끼들이 겁도 많았다.

강예서는 잠깐 쉬기로 결정이 났다.

설립된 영화와 드라마 투자업체를 본격적으로 가동시킬 생각이었다.

“<진성여왕>에 주연급 조연으로 투입한다.”

과거 생에는 출현하지 않았지만 강예서와 맞는 배역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직 계획 단계인 2009년 대박 드라마 진성여왕.

외주업체 제작이기에 투자자를 환영했다.

남는 게 돈밖에 없는 나에게 완벽하게 어울렸다.

“뜨고 나면 개수작 못하겠지.”

어느 바닥이나 같은 룰이 적용된다.

뜨기 전에는 무시당하지만 스타가 되면 모두 조심하게 된다.

대중의 힘이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황 대표 군기도 잡고……”

씨큐리티 직원들뿐만 아니라 감독 성향을 파악 못 한 황 대표에게도 경고했다.

황 대표도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했다.

연예계에서 구르고 구른 황 대표도 모를 정도로 쓰레기들의 행동은 은밀하고 치밀했다.

그래서 앞으로 소속 연예인들의 활동은 빠뜨리지 않고 보고 받기로 결정했다.

내가 바쁘더라도 악평이 넘치는 놈들은 고를 생각이었다.

여차하면 영화사나 외주사도 매입해도 됐다.

“돈으로 안 되는 건…… 세상에 없어.”

돈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유세라 씨 커피가 그리웠지만 참았다.

세 명의 여직원들은 자기들끼리 해외여행을 떠났다.

로버트 라이언이 보내준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했다.

볼부 본사가 있는 스웨덴 견학은 덤이었다.

일과 여행을 즐길 줄 알았다.

볼부는 곧 내 것이 될 것이다.

아직 미끼를 물지 않았지만 포드는 내 제안이 계속 생각날 것이다.

“짱개들에게 들어가기 전에 내가 먹는다.”

안전과 환경이 장점이자 남다른 볼부는 짱개에게 주기 아까웠다.

연대가 똑똑했다면 쓸데없는 강남땅을 10조 주고 구입할 게 아니라 볼부를 품에 안았어야 했다.

“3월 달에는 환율이 1,570원에 이른다. 이것도 먹는다!”

어차피 나 아니어도 누군가 먹을 돈이다.

바깥에 퍼주는 것보다 내가 먹는 게 민족과 국가, 나에게도 이득이었다.

“많이 벌어서 좋은 곳에 쓰겠습니다.”

창문 너머 하늘을 보며 다짐했다.

- 카르마 포인트가 지급됐습니다.

“아이고~뭘 이런 것까지 챙겨주십니까. 설날 보너스입니까?”

하늘을 보고 웃었다.

발정난 개새끼들 패고도 카르마 포인트를 상당히 얻었다.

2009년도 1월이 빠르게 흘러갔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설 연휴가 시작됐다.

본가에는 내일 갈 생각이었다.

미국 환율 시장의 변동성을 확인하기 위해 저녁에는 바빴다.

로버트와 투자 문제로 수시로 통화도 나눴다.

못다 흡수한 중급 마력석 문제도 남았다.

연구소 설계도도 수시로 비밀 메일로 업데이트 됐다.

철저하게 프로젝트를 감췄다.

애플의 스티븐 매튜가 성격상 빼갈 수도 있었다.

남들보다 창의적이고 완벽하고픈 스티븐 매튜의 욕망은 상상을 불허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성인이다!”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만 19세로 성년 나이가 변하기 전이었기에 만 20세에 완벽한 법률행위자가 될 수 있었다.

뭘 하려고 해도 부모님 동의서가 필요한 시절이 지나갔다.

생일이 빠른 나였기에 가능했지 동기들은 아직 미성년자가 태반이었다.

돈이 넘쳐도 미성년자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대한민국.

다른 무엇보다 성년이 됐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리.

요란하게 핸드폰이 울렸다.

“너도 곧 바꿔주마.”

2009년에는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출시 된다.

입맛을 다시며 번호를 봤다.

못 보던 번호였다.

“누구십니까?”

- 야! 장태산! 나다 나!

“나? 누구?”

- 이 새끼야 내 목소리 벌써 잊은 거야? 우리 우정이 이것밖에 안 돼!

우정이라는 말에 퍼뜩 떠오르는 얼굴.

녀석이 준 수많은 야동이 반짝 떴다가 사라졌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정은 맞았다.

“형철아~”

- 친구야! 어디야? 장주시에 왔지?

“응. 장주시야. 넌?”

- 움하하하하. 이 형님이 X뺑이 치고 휴가를 따왔다! 동계 훈련 모범 장병으로 선정됐다! 존경하라! 친구야!

신병 위로 휴가 때는 바빠서 볼 수 없었던 형철이.

지난여름에 군대를 갔던 녀석이 포상 휴가를 받았다고 전화를 했다.

좋을 때였다.

군대에서 휴가는 천국으로 가는 티켓과 동일했다.

그것도 동계 훈련 모범장병이라면 상당한 성과였다.

들떠 있는 형철이.

지난 생에 말기 병장 제대한 내가 그 마음을 잘 알았다.

“술 마시자.”

- 콜! 태산아. 벌써 애들 다 불렀다. 그냥 몸만 오면 돼!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콜을 외치는 녀석.

아직 군대에 안간 녀석들이 더 많은 때였다.

설날이라 다들 고향에 모였을 것이다.

“몸이 아니라 돈 아니야?”

- 크크. 그게 그거지~ 친구 사이에~.

고향과 친구는 뗄 수 없는 단짝 같은 관계였다.

“어디야?”

- 유정식당 방 잡았다.

“그래. 바로 갈게.”

세상에서는 나를 세계적 투자자인 로버트 라이언의 친구이자 마피아의 친구, 홍콩상행은행을 협박하는 겁을 상실한 투자자로 알려졌지만 고향에서는 달랐다.

부모가 돈 많은 그냥 잘나가는 한국대 법대생에 불과했다.

그래서 편했다.

사라라라락.

창밖으로 내리는 탐스러운 눈.

멀리서 귀한 손님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문뜩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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