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2
회귀의 전설
342장. 또 다른 선물
“대표님이 방문을 허락하셨습니다. 사무실로 들어가십시오.”
유세라가 친절하게 러시아 미녀를 안내했다.
“고마워요~.”
영어가 익숙한 러시아 여인.
“별말씀을.”
러시아 미녀는 활짝 웃으며 대표실로 들어갔다.
“뭐야? 우리 대표님……. 러시아 여우는 또 언제 만난 거야?”
유세라는 고개를 저었다.
홍콩과 미국, 유럽에까지 대표님의 흔적이 남았다.
그런데 이제는 러시아 미녀까지 나타났다.
러시아 특유의 몸매가 대단한 미녀는 유세라가 보기에도 은근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라인이 쩔었다.
어디 가도 몸매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던 유세라조차 큰 키에 허리가 잘록한 러시아 미녀 앞에서는 입을 다물었다.
풍부한 갈색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는 무척 아름다웠다.
눈을 사로잡는 붉은 입술은 한 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위험한 가시로 무장한 품격 있는 장미 같았다.
“뭔가 냄새가 나는데…….”
시베리아의 청량한 들꽃 향수를 사용하는 러시아 미녀가 대표실로 들어갔다.
뒤태도 죽였다.
유세라는 본능적으로 위험 신호를 느꼈다.
평범한 여성은 절대 아니었다.
웃는 얼굴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눠봤는데 눈빛 깊숙한 곳은 냉정하고 차가웠다.
겉모습만 봐서는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휴우……. 우리 대표님……. 참 위험하게 사시네.”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씨큐리티 직원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이탈리아에서 마피아와 시원하게 한 판 떴다는 내용이었다.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유세라는 확신했다.
운이 좋아 대표의 연인이 된다 해도 심장 쫄려서 명대로 살 수 없을 거라는 걸.
삐이이이이.
“네! 대표님.”
[세라 씨. 커피 부탁합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커피를 주문하는 대표.
유세라는 입맛을 다시며 커피를 내리기 위해 탕비실로 향했다.
***
“세라 씨. 커피 부탁합니다.”
남자가 커피를 주문했다.
“다니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된 웃음 짓고 있는 한국 남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봄날 햇살 같은 따뜻함을 눈빛에 담고 있었다.
이곳에 오는 동안 그가 자신을 모른 척하면 어쩌나 걱정도 했다.
남자들의 하룻밤은 보드카 한 병 값만 못하다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스파이 훈련을 통해 정신적으로 단련된 타샤는 남자가 자신을 진심으로 반기는 걸 알았다.
타샤는 남자에게 달려가 살짝 품에 안겼다.
계획에 없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갑자기 눌러놓았던 그리움이 확 솟구쳤다.
하룻밤 인연이 가볍지 않았다.
가벼운 입맞춤을 아끼지 않았다.
스파이로 살아온 타샤는 그 날 밤을 잊을 수 없었다.
러시아 대문호의 시를 주고받다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돌발사고(?).
그는 일격을 가할 때는 호랑이 같았고 돌격할 때는 무서움을 모르는 불곰이었다.
어떤 순간에는 부드러운 가면을 쓴 영악한 여우처럼 그녀를 침몰시켰다.
그렇게 밤새도록 거칠고 뜨겁게 몰아붙였다.
이른 새벽 눈을 뜬 타샤는 진실로 당혹스러웠다.
감시가 되고 있는 안가에서 그런 일을 벌일 줄 자신도 미처 예상 못했다.
그리고 잊었다.
스파이 세계에서 감정을 품게 되면 죽음을 자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정에 휩싸여 있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죽는 일이 허다했다.
한 순간의 방심과 실수가 죽음으로 연결되는 직업이었다.
그런데 다니엘을 보자마자 사라졌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토닥토닥.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는 다니엘 장.
“하아…….”
이러려고 찾아온 게 아니었는데 타샤는 다니엘의 품에서 아늑한 휴식을 맛봤다.
러시아 남자보다 품이 크지 않았지만 안기는 순간 느껴지는 편안함은 차원이 달랐다.
부드럽게 쓸어주는 손길에 스파이 생활 동안 받았던 고단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돈 때문에 인연이 됐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남자의 목소리가 따뜻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몇 달밖에 안 됐지만 스파이의 하루는 한 달처럼 길었다.
그 동안 죽음의 위기를 맞기도 했었던 타샤는 남자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으니 더 보고 싶다는 말 이해할 수 있죠?”
타샤는 진심을 말했다.
빙긋 남자가 웃었다.
“대표님……. 어!”
커피를 들고 들어오던 직원이 달달한 두 사람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타샤는 아쉬움을 달래며 남자의 품에서 떨어졌다.
“정말 반가웠어요. 다니엘~ 당신 품은 예상했던 대로 아늑하군요.”
능청도 떨었다.
장태산과 휘하 여직원들과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정보는 러시아 첩보국을 통해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스파이와는 다른 사람들이었고 삶이었다.
다니엘이 조용히 살아주길 타샤는 진심으로 원했다.
“다니엘이 자랑하던 그 커핀가요?”
러시아 안가에서 다니엘은 여직원의 커피 타는 솜씨가 대단하다고 했었다.
“고마워요……. 타샤 레비에프라고 해요.”
타샤가 커피잔을 받아들며 유세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무실에서는 길게 말을 섞지 않았었다.
“유세라입니다.”
언제 놀랐냐는 듯 유세라는 고개를 짧게 숙여 인사를 나눴다.
“고마워요. 유 팀장님.”
“아닙니다. 그럼…….”
유세라가 빠르게 등을 보이며 사라졌다.
“저 여자…… 당신을 좋아하는군요.”
타샤는 여자의 마음을 기가 막히게 읽었다.
스파이 과목 중에 독심술은 기본이었다.
“타샤, 그런데 한국까지 무슨 일입니까?”
커피를 들고 두 사람은 창밖으로 내다보며 대화를 나눴다.
창밖에는 눈이 날리고 서서히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왜 왔겠어요~”
타샤가 배시시 웃었다.
“당신들 보스가 몸이 달았군요.”
“빙고!”
‘생각보다 세상 꿰뚫어 보는 안목이 대단해!’
상부의 긴급 명령으로 한국에 오게 된 타샤였다.
장태산과 인연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파견이었다.
상부에서는 장태산에 대해 지고지순한 관심을 표했다.
본인의 신변 안전 확보에 10억 달러를 현찰로 제공하는 갑부는 세상에 없었다.
그것도 드러나지 않은 자산이었다.
한국에 있는 장태산의 보유 자금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미국 금융위기 여파가 러시아를 쓰나미처럼 덮쳤다.
러시아를 지탱하던 석유 값이 폭락했다.
주 수출품인 원자재 값도 곤두박질 쳤다.
아시아 IMF 시절 경험했던 공포가 러시아를 긴장시켰다.
미국이 달러를 찍어냈지만 자국의 위기 타계를 위한 수단이었다.
러시아 주식 시장이 마비됐다.
폭락하는 주식으로 인해 주식시장 폐쇄가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루블화가 약세를 면치 못했다.
뱅크런 기미가 보였다.
급하게 외환보유고를 풀었다.
원자재를 가공하는 공장이 부족하고 대부분 자원을 수출하는 러시아의 타격은 상상을 불허했다.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그만큼 푸틴에 대한 반발이 강해졌다.
총리 신분인 푸틴은 다음 대 대통령직을 노리고 있었다.
대통령을 조종하는 푸틴이었지만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은 잘 알았다.
10% 성장률이 마이너스가 됐다.
국내 자본시장이 위축되고 실업률이 높아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전혀 짐작도 못했던 러시아 정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오일과 원자재 값이 몇 달 사이에 반에 반 토막이 났다.
당장 빵을 구울 밀가루가 부족해졌다.
오일과 원자재를 헐값에 팔아봐야 답이 없었다.
곳곳에서 소규모 소요가 일어났다.
더 커지기 전에 손을 보고 싶었지만 자본이 딸렸다.
“세상이 아비규환인 건 알죠?”
“잘 알아요~ 제 월급도 두 달 치나 밀렸다니까요~”
타샤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다니엘을 만나지 못했다면 스파이들은 돈이 없어 굶었을 판이다.
10억 달러는 요긴하게 잘 사용됐다.
다니엘 때문에 스파이 조직이 겨우 유지된 셈이다.
“그냥 오지는 않았을 테고……. 미인계는 충분히 통할 것 같은데 다른 조건이 궁금하군요.”
어리지만 사업 수단이 노련한 다니엘이 웃으며 물어왔다.
타샤보다 더 스파이 같았다.
“그럼요……. 보스가 그냥 보냈을 리가 있을까요~ 우리 친구에게~.”
타샤가 방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타샤를 파견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의를 표한 것이었다.
다니엘과 하룻밤을 함께 보낸 사실을 조직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 진지한 대화를 나눠볼까요?”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다니엘.
타샤도 풍미가 깊은 커피를 즐기며 다니엘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
- 신들이 계약 이행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 신들이 카르마 포인트를 들고 대기 중입니다.
- 신들이 요즘 노력하지 않는 당신에게 실망을 표하고 있습니다.
타샤에게 정신을 집중하기도 바빴지만 자꾸 알림이 울렸다.
그런데 이번엔 신도 아니고 신들은 또 뭐야?
푸시킨이 뿌린 사랑의 묘약으로 타샤와 엮이고 난 직후 강제 조약이 발동됐다.
원하지도 않았지만 사랑의 묘약을 뿌리고 흐뭇하게 구경하던 음란변태 대마왕 푸시킨.
그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신들’이란 건 납득하기 힘들었다.
노바 형님은 이계에 있으니 신들 명단에 들어갔을 리 없을 테고, 푸시킨이 여기저기서 손님들을 모셔온 게 확실했다.
관음병은 신이 되어서도 고치지 못한 것 같다.
입술이 탔다.
들고 있던 커피를 한 번에 털어 마셨다.
“보스 쪽에서 원자재의 확실한 판매처를 원합니다.”
“???”
“적정 시장가로 장기 계약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지금 원자재 값이 바닥을 치고 있는 건 아시죠?”
“물론입니다. 원유는 시베리아 기준으로 베럴당 50달러가 조건입니다. 조건만 맞는다면 10년간 장기 계약도 가능합니다.”
이거 복이 넝쿨째 굴러왔다.
국제 유가는 바닥 찍고 2014년 초반까지 100달러를 유지한다.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바닥을 기게 된다.
하지만 지금 당장 러시아는 속이 타들어갔다.
이 기회를 이용한다면 당분간 석유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미국 세일가스와 세일오일은 지금 덤핑 세일 중이었다.
원유 값이 폭락하고 있는 이때 세일오일 생산업체들이 급매물로 나왔다.
몇 년 뒤 진짜 위기가 찾아오지만 그때는 그때만의 공략법이 있었다.
이런 날을 위해 몇 년 동안 돈을 모았다.
사방에 매입할 것들이 널려있었다.
“타샤. 난 당신을 믿고 싶지만…….”
러시아가 어떤 자들인데 함부로 돈질 하겠나.
담보가 없다면 계약은 진행될 수 없었다.
“구미는 당기나요?”
“물론입니다.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러 동원 능력은 믿어도 되죠?”
스파이 아니랄까봐 조국 일에는 온 힘을 다했다.
직업 정신이 투철했다.
“얼마를 원합니까?”
“최소 100억 달러…….”
“1000억 달러 정도는 쏠 수 있습니다.”
“아!”
1000억 달러라는 말에 타샤는 감탄을 터트리며 진심으로 놀랐다.
한화로 100조가 훌쩍 넘는 자금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눈들이 많습니다. 1년에 300억 달러로 충분할 것 같군요.”
“좋아요. 그런 조건이라면 상부에서도 만족할 겁니다.”
“담보는 어떤 조건입니까?”
“뭘 원하나요? 불곰 사업에 필요한 전투기 기술? 아니면 핵폭탄이나 핵잠수함은 어때요?”
구미가 팍 당겼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애국자가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저도 아니거든요~.”
말이 통하는 타샤.
“그럼…….”
“보스가 친필 편지를 써줄 거예요. 그리고 다니엘은 계약 기간 동안 언제든 우리 조직의 보호를 받게 될 거고 위급 시 도움을 청할 수도 있어요.”
“!!!”
생각보다 엄청나게 좋은 조건이었다.
러시아가 한물갔다 표현했지만 첩보나 여러 은밀한 조직체계 면에서는 미국에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
미국이나 다른 국가와 달리 대단한 충성심을 자랑하는 러시아 정보국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러시아 보스의 친필 확약 편지가 전달된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좋은 조건이군요.”
“마음에 들어요?”
“베럴당 55달러. 앞으로 5년간 장기 계약. 일 년에 300억 달러 규모로 매입하겠습니다. 그리고 1년 치는 선불로 입금하겠습니다.”
“다니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타샤가 덥석 또 안겨왔다.
손에 들고 있던 빈 커피잔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타샤가 이번 일을 얼마나 고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계약 체결이 아닌 의견교환만 이루어졌는데도 조직에서 무한한 칭찬을 받게 될 것 같았다.
“다니엘……. 선물이 하나 더 있어요.”
“???”
날 뜨겁게 바라보는 타샤.
그녀의 달콤한 향기가 오감을 자극했다.
설마…….
“오늘 밤…… 러시아에서 가져 온 보드카…… 같이 마실래요?”
- 신들이 어서 OK를 날리라고 성화입니다!
- 두 배의 카르마 포인트를 5년 장기 계약으로 준비 중이라고 신들이 뜨겁게 조건을 제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