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
회귀의 전설
340장. 미끼
“누가 와?”
“장태산이 찾아왔습니다.”
“오! 그래!”
HSBC 홍콩상행은행의 서울 지점장인 스티븐 벤슨은 비서 강윤무 대리의 보고에 화색을 띠었다.
본사에서도 눈여겨보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던 장태산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찾아와 겁 없이 1억 달러를 빌려갔던 그 장본인이 찾아왔다.
“데려올까요?”
“강 대리. 데려오는 게 아니라 모셔와야지! 앞으로 장태산이 방문하면 무조건 내 방으로 모셔와!”
스티븐 벤슨이 강윤무 대리를 꾸짖었다.
“죄송합니다.”
강윤무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어서 가서 모셔오게!”
“알겠습니다.”
강윤무가 집무실에서 빠르게 나갔다.
“눈치가 저렇게 없어서…….”
강윤무는 아직 장태산이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한 달에 몇 번씩 본사에서 체크가 들어오는 VVIP였다.
스티븐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과거에는 어린 소년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큰 고객이었다.
장태산이 한국에서 벌였던 사업 규모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월가의 태양 로버트 라이언의 한국 파트너이기도 했다.
안아 그룹이 어떻게 요리 됐는지 상부 정보를 통해 알게 된 스티븐이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본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전에 실적을 남긴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똑똑.
잠시 후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스르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보인 장태산.
“!!!”
입구까지 가서 대기하고 있다가 장태산과 마주한 스티븐은 움찔 놀랐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난 게 아니었지만 과거에 봤던 장태산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나이가 워낙 어렸었던 터라 얼굴과 체격은 그때와 비슷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 정제계의 거물들을 많이 만나봤다.
그런 거물들보다 장태산이 풍기는 포스가 더 강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티븐 벤슨 지점장님.”
장태산이 먼저 악수를 청해왔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장 대표님.”
스티븐의 말투가 한없이 정중했다.
스티븐은 과거 기억을 모조리 지웠다.
애송이 시절부터 1억 달러를 대차게 대출 받았던 괴물이었다.
이제는 아무리 스티븐이어도 어렵게 봐야 할 상대였다.
“다니엘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빙긋 웃는 다니엘.
“자리에 앉으십시오. 차는 홍차로 할까요?”
“그때 마셨던 홍차 향기가 아직도 그립습니다.”
“다행입니다.”
스티븐은 긴장하며 홍차를 탔다.
지켜보던 강윤무 대리는 이 상황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과거에 말도 안 되는 투자 자금을 받아낸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하의 지점장이 저렇게 어렵게 대할 만한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장태산이란 인물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게다가 비서 강윤무는 고위 정보를 받지 못해 장태산의 느긋함과 여유가 더 낯설었다.
이제 겨우 한국 나이로 스물한 살이었다.
세계적 은행 HSBC 서울 지점장 앞에서 저렇게 당당한 사람은 오랜만에 봤다.
아니 거의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재경부 장관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위치가 바로 모시고 있는 스티븐 벤슨이었다.
“새로운 홍차입니다. 한 번 마셔보십시오.”
“향기가 남다르군요.”
“!!!”
강윤무는 깜짝 놀랐다.
지점장이 아끼는 최고급 홍차를 서슴없이 내놨다.
구하기 어렵다는 영국 왕실 전용 차였다.
평소에 아주 기분 좋을 때 가끔 한잔씩 내려 마셨던 홍차를 아낌없이 대접했다.
옆에 있던 강윤무에게는 권하지 않았다.
지점장 스티븐의 정성은 오로지 장태산에게만 향했다.
“흐음~ 좋습니다. 입안에 살짝 감도는 쌉싸름한 향이 달콤한 맛을 중화시키는군요. 일품입니다.”
“오! 그 맛을 아시는군요? 하하하.”
스티븐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렇게 잠시 티타임이 무르익어갔다.
“지점장님 부탁이 있어 왔습니다.”
“부탁요? 말씀하십시오.”
“…….”
장태산이 대기 중인 강윤무를 돌아봤다.
“강 대리는 나가 있게.”
“……알겠습니다.”
듣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는 자리.
강윤무는 다시 한 번 장태산의 위상을 눈으로 확인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
“대출을 받고 싶습니다.”
“대출요?”
그동안 나도 참 많이 컸다.
과거에는 어려웠던 HSBC 서울 지점장이 이제는 동네 은행 지점장 정도로 보였다.
금발의 곱슬머리가 멋있던 스티븐 벤슨은 그사이 더 늙어 있었다.
고풍스럽고 위화감까지 느껴졌던 사무실도 이제 눈에 고만고만해 보였다.
2년 동안 워낙 좋은 것들을 많이 봐서인지 비교가 됐다.
그냥 평범한 영국 아저씨 집무실 정도 수준이었다.
“불가능합니까?”
“아니 그게…….”
갑자기 찾아와 대출을 받겠다고 하자 당황하는 스티븐.
다리를 가볍게 꼬았다.
돈 많은 갑부들이나 자연스럽게 시전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스티븐은 그런 내 자세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갑자기 나타나 가벼운 대화나 나눌 줄 알았던 것 같다.
“갑자기 대출은 왜…….”
“주식투자를 했는데 요즘 미국 금융위기로 손해가 막심합니다. 오를 것 같은데……. 주식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2년 전만 해도 착착 맞아 떨어졌는데…….”
스티븐의 눈이 반짝였다.
나에 대한 최신 정보가 업그레이드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물타기 좀 하려고 합니다.”
“물타기요?”
황당한 표정을 짓는 스티븐.
홍콩상행은행 지점장인 자신 앞에서 물타기 용도로 당당히 대출을 요구하는 이 구역 미친놈은 처음 볼 것이다.
“물타기 모르세요?”
“아닙니다……. 잘 압니다.”
“어머니에게 학교도 하나 사줬더니 돈이 빠듯합니다. 미술관도 구입했습니다. 언젠 한 번 오십시오. 괜찮은 작품들이 많습니다.”
잘난 체는 덤이었다.
누가 봐도 졸부 돈질하다 망조 드는 모양새였다.
“대출금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영국 남자는 정중했다.
“10억 달러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1, 10억 달러요?”
“왜요? 은행에 돈 없어요?”
“…….”
약속도 없이 찾아와 물타기용 자금 10억 달러를 말하는 날 천천히 뜯어보는 스티븐.
“푸하하하하하하하하.”
그가 갑자기 폭소를 터트렸다.
“미친놈 같죠?”
“하하……. 아닙니다.”
환율이 팍팍 치솟고 있는 이때 달러는 그 무엇보다 귀했다.
그런 달러를 10억 달러를 요구했으니 웃음이 터질 만했다.
원래 당황하면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이런 황당한 경우는 스티븐 인생에 처음일 것이다.
“담보는 있습니까?”
웃음을 정리하고 스티븐이 정색하며 물었다.
은행가로서 기본기는 탄탄했다.
“이것저것 로버트 라이언이 추천한 회사들과 공동 매입한 물건들, 주식들이 있는데 받아줍니까?”
“평가를 받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죠? 이거 참……. 돈 빌리기가 쉽지 않네요. 그깟 10억 달러가 뭐라고……. 쯧쯧.”
혀를 찼다.
모자란 듯 행동하면서도 눈빛은 스티븐을 보며 웃었다.
스티븐 내색은 안 해도 해골이 복잡할 것이다.
그걸 노리고 찾아왔다.
여기 홍콩상행은행은 기사단장과 홍콩 리장창 휘하 집단의 보이지 않는 연결점이었다.
스티븐은 나에 대해 많은 걸 모르는 눈치였다.
수뇌부가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 그에게 난잡한 정보를 흘렸다.
한국 공권력과 은행 정보들은 개판이었기에 나에 대해 쉽게 파악할 것이다.
추락할 줄 알고 구입했던 주식들은 모두 다 수직낙하 중이었다.
내 계좌나 투자금은 누가 봐도 마이너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망해가는 수익구조였다.
미래를 모르는 다른 자들이 본다면 망조 필이 확실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면 주식은 튀어 오른다.
그건 나만 알았다.
“담보를 제공해 주시면 평가해서 최대한 대출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스티븐이 교과서적으로 나왔다.
지점장으로는 저렇게 나오는 게 정상이었다.
“그래요? 이거 아쉽네요. 그래도 아는 사이라 쉽게 될 줄 알았는데…….”
아쉬움을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다른 은행도 알아봐야죠. 물타기 하면 1년 뒤에 대박인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네요.”
“그럴까요?”
“그럼요. 1년 뒤에 보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겁니다. 미국이 어떤 자들인데 망해요? 그거 다 수작입니다.”
뭔가 아는 척하며 답해줬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식사 한 번 대접하고 싶습니다.”
“회사로 연락해서 날 잡으십시오. 지점장님 모르는 맛집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악수를 건넸다.
그리고…….
“아! 중요한 말을 잊을 뻔했습니다.”
“어떤…….”
“제 친구 라이언이 HSBC 주식이 저렴하다고 구매의사를 물어왔는데……. 이거 참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
순간 놀라는 스티븐.
병 주고 약 주고, 놀리고 희롱하는 내가 제정신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로버트가 통이 좀 커요. 요즘 많이 벌어서 100억 달러 정도는 그냥 쓰더군요. 친구 사이에 돈 빌리는 게 쪽팔려서 말을 못했는데……. 큼.”
큼지막한 월척 미끼를 투척했다.
“빠른 시간 안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미끼를 물고 파닥거리는 스티븐 벤슨 지점장.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악수하고 손까지 흔들며 고개 숙인 스티븐과 헤어졌다.
등을 보인 상태에서 입가에 살짝 맺히는 미소.
리장창과 유럽 조직은 오늘 방문 목적을 파악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질 것이다.
**
“휴우…….”
어둠이 내리는 신림동 골목에서 유학필은 한숨을 내쉬었다.
놀고먹었던 건 아니지만 공부가 쉽지 않았다.
집안 사정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살았던 지난 몇 년.
동기나 후배들 중에 합격한 녀석들이 한두 명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유학필은 사법시험 공부에 매진할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모두 다 내 잘못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다!”
유학필은 힘을 냈다.
후배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고 본격적으로 사법시험에 뛰어 들었다.
2009년부터 로스쿨이 본격화되면서 법대가 사라진다.
이제부터는 전쟁이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판사나 검사로 임용받지 못한다면 로스쿨 졸업생들과 변호사 시장을 놓고 박 터지게 싸워야 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전쟁터였다.
한국대 법학과 출신이라 군대에서도 선임들에게 갈굼을 당했다.
그리고 학교에 돌아와서는 공부도 못하는 복학생 취급 받았다.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세상은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더욱 더 강해지려고 노력했다.
“고맙다……. 장태산.”
장학금으로 집안과 자신의 근심을 덜어내 준 장태산.
한때 수재 소리 듣던 유학필은 진심으로 장태산에게 고마워하며 공부에 매진했다.
미래에 어떤 대가를 요구해 올지 모르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장태산은 구세주였다.
“그렇게 고마우면 오늘 소주 한 잔 사주시죠?”
“어! 태산아!”
언제 나타났는지 옆에서 웃고 있는 후배의 듬직한 모습.
“콜?”
“코올!”
유학필은 스스럼없이 장태산과 어깨동무를 했다.
사업하는 바쁜 와중에도 자신에게 고기를 사겠다고 가끔 찾아와 주는 고마운 후배.
‘반드시……. 합격하겠어! 태산이를 위해!’
길을 걸으며 유학필은 다짐했다.
이 멋진 후배를 위해 일생을 던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후배가 던지 인생의 미끼가 공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자신감을 찾아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장태산.
유학필에게 그는 누구보다 든든한 후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