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
회귀의 전설
338. 파파 (2)
“이제 다 온 건가요?”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에두아르. 좀 더 빨리 가면 안 되나요?”
“갑작스런 폭설로 길이 미끄럽습니다.”
프랑스에서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 공항에 내렸다.
차를 몰고 다니엘이 머물고 있는 와이너리로 가는 중에도 비비안은 재촉을 멈추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쌓았던 추억은 생각보다 더 진하고 강렬했다.
만남, 여행, 그리고 위기와 주고받은 애틋한 감정.
비비안의 인생은 다니엘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어 버렸다.
쉽게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어 더 그리웠다.
특히 아사신의 괴물들을 죽음을 불사하고 막아내던 다니엘의 모습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좋습니까?”
“어젯밤도 잠을 통 잘 수 없었답니다. 에두아르는 이 기분 모르죠?”
“…….”
비비안의 질문에 에두아르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사랑을 한다.
면역력 없는 열병은 증상도 다양했고 후유증이 엄청난 경우도 있었다.
에두아르의 아픔과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적으로 마주했던 한 여인을 만났다.
이교도였지만 아름답고 강했던 그녀.
몇 번 서로 총질하며 스쳤던 인연이었다.
적으로 맞선 두 사람의 총구가 서로의 심장을 노렸다.
그리고 어쩌다 고립된 상황에서 나눴던 며칠간의 사랑.
끝내 동료의 총에 사살되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
어디에서도 전혀 내색하지 못한 아픈 상처였다.
그녀가 쏜 총에 에두아르의 동료들 역시 죽었다.
필연의 짝을 잃은 남자는 평생 그렇게 심장으로 눈물을 흘릴 뿐이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비비안의 사랑을 돕고 싶었다.
차라리 뜨겁게 불탔었다면 지금의 여한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재가 되었다면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져 버리고 흔적도 남지 않았을 그리움.
사랑을 지켜내지 못한 자에게 두 번의 사랑은 허락되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힘내십시오. 아가씨…….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에두아르는 비비안의 사랑이 쉽지만은 않을 걸 알았다.
자신의 사랑과 비견될 만했다.
기사 가문과 중국 비밀단체는 동맹을 맺었다.
중국 단체의 적으로 선포된 인물 다니엘은 위험했다.
조만간 기사 가문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럴 거예요……. 다른 건 잘 모르지만 내 마음을 스스로 속이는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그냥……. 그리워할래요.”
자신보다 현명한 비비안의 대답에 에두아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따라 더 아름답게 보이는 설경.
에두아르의 마음에 후회가 찾아들었다.
진짜 사랑인 줄 알았다면 그녀의 심장에 총알이 박하기 전 먼저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조직, 미래를 계산하다 기회를 놓쳐 버린 어리석은 자신.
이를 악물며 밀려오는 진한 후회를 감당할 뿐이다.
***
세상에 남자에게 키스를 당하다니!
이탈리아 뚱땡이 아재 피에트로는 자신보다 키가 큰 내 볼을 잡고 키스를 날렸다.
딸내미 살려줬다지만 이렇게 격한 반응을 할 줄이야.
모두 암중 습격자들을 내가 처리한 줄 몰랐다.
하지만 카리나만은 묘한 웃음으로 날 쳐다봤다.
그녀만이 내가 검과 창으로 수련하며 붕붕 날아다니는 걸 봤었다.
그걸 아는 카리나가 마피아 보스에게 자신을 구해준 이가 나라고 말한 것이다.
“다니엘! 넌 이제 나와 형제다!”
키스가 끝난 뒤 짧은 팔로 내 어깨를 껴안은 피에트로가 형제라 선포했다.
장인어른도 아니고 형제라니…….
카리나를 이제부터 조카라고 불러야 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다니엘~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이제부터 다니엘은 우리 코사 노스트라와 피를 나눈 형제가 됐다는 의미야.”
“!!!”
그렇다면 문제는 더 심각했다.
성격 급하고 화끈한 정통 마피아의 형제.
말이 좋아 형제지 강제로 이탈리아 깡패 집단에 입문하게 됐다는 소리다.
“피에트로 아저씨~ 보고 싶었어요.”
센 언니 베르타가 그제야 인사를 건넸다.
잠옷 위에 패딩 하나 걸치고 있는 깡다구 넘치는 베르타.
피에트로와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눴다.
“오~ 베르타. 못 보던 사이에 숙녀가 다 됐구나.”
“아저씨도 더 멋진 신사가 되셨어요~.”
누가 봐도 거짓말이다.
베르타는 요물이다.
카리나에 비해 사회생활 능력이 뛰어났다.
“그런데 아저씨 조금 전 그 선포는 취소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다니엘은…….”
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두두.
그때 구릉 너머에서 갑자기 헬기 한 대가 빠르게 날아왔다.
“헛! 마, 망구스타!”
“보스 위험합니다!”
씨큐리티 직원들이 기겁을 했다.
나도 군대를 다녀와서 알고 있는 이탈리아 공격헬기 망구스타.
특유의 툭 튀어나온 주둥이와 양옆에 달린 로켓은 보는 이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파파~!!!”
베르타가 다가오는 공격헬기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급기야 좋아라 했다.
씨큐리티 직원들과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청해져 버렸다.
마피아들의 차원이 다른 무기 보유에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지렸다.
군대도 아닌 범죄 집단이 멀쩡한 국가 안에서 공격헬기를 자가용처럼 몰았다.
피에트로와 카리나는 이미 알고 있는 듯 별 반응이 없었다.
잠시 후 공격헬기는 특유의 기동성을 발휘하며 호텔 주차장에 안정적으로 내려앉았다.
헬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등장한 한 남자.
키가 큰 이탈리아 훈남 중년 아재였다.
“파파아아아아!”
베르타가 뛰어가 그 남자에게 덥석 안겼다.
“오~ 나의 사랑 베르타! 괜찮느냐? 다친 곳은?”
보스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딸에 대한 애정이 꿀 떨어지듯 뚝뚝 떨어졌다.
마약 팔고 각종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장본인들도 가족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베르타의 아빠가 딸의 안녕을 확인하고 피에트로에게 다가왔다.
“까를로~ 오! 나의 형제여!”
피에트로 아재는 형제라는 말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아주 남발했다.
“내 형제! 피에트로!!!”
까를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주차장 한복판에서 서로를 얼싸안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서로의 볼에 대한 폭풍 뽀뽀.
마피아 보스들이 아니라 시골 동네 오래된 친구 두 사람이 만난 것 같았다.
하지만 웃고 있는 얼굴에 부드러운 포옹과 달리 두 사람의 눈빛은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음이 보였다.
본의 아니게 이탈리아를 나눠먹고 있는 마피아 보스들의 갑작스런 회동 자리가 됐다.
어느새 어둠을 물리치고 온전히 태양이 떠올랐다.
밤을 샌 모든 이들의 얼굴에는 피로함과 긴장감이 뒤섞여 묻어 있었다.
헬기를 타고 와 대동한 부하들은 몇 명 없지만 소수 정예 인원 자체의 무게감이 남달랐다.
무슨 일이 터지면 당장 전화 한 통으로 이탈리아 전역에 마피아들이 총질을 시작할 판이었다.
“파파. 내가 말했죠. 여기 그 남자예요.”
베르타가 눈웃음을 치며 카모라 마피아 보스 까를로에게 나를 소개시켰다.
“자네가 다니엘? 하하하하. 고맙네. 형제여! 자네는 이제부터 우리 카모라의 형제네!”
“까를로 포기하게. 다니엘은 이미 우리 코사 노스트라의 형제가 되었네.”
“무슨 소린가! 다른 건 다 양보해도 형제는 양보 못해!”
“피에트로!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 딸을 구해 준 은인을 형제로 맞이하지 못한다면 난 이탈리아에서 조롱거리가 될 것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두 보스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언제부터 알았다고 날 형제로 두겠다고 싸우는지 이해가 안 갔다.
전혀 나의 의사 따위는 상관없었다.
자존심을 두고 언쟁을 벌이는 두 보스의 모습에 다들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일단 들어가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하시죠.”
집에 찾아온 손님 대하듯 두 보스를 안내했다.
“그 전에……. 처리할 일이 있지.”
따뜻하게 웃고 있던 피에트로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변했다.
“온드란게타의 쓰레기들은 어디 있나?”
“지하 감옥에 있습니다.”
성 지하에 과거 감옥으로 사용되던 와인창고가 있었다.
그곳에 온드란게타 조직원들을 수감했다.
무릎 뼈가 박살난 사코는 피가 나지 않도록 적절하게 응급처치를 해줬다.
목숨은 붙어 있지만 평생 똑바로 걷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보다 마피아들이 그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 같았다.
“난 발목.”
피에트로가 말했다.
“그럼 난 손목을 자르겠네.”
까를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 한 번 쿨했다.
그들 단체 소속 마피아 조직원들 상당수가 죽어나갔다.
이 정도로 끝내는 건 약과였다.
마피아들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라 입을 다물었다.
“알프레도에게는 따로 청구서를 보내야겠지?”
“당연하지. 이번에 칼라브리아 촌놈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겠어!”
“나도 돕지.”
마피아 보스 두 사람은 피의 복수를 다짐했다.
이탈리아에 퍼질 피바람에 미리 애도를 보냈다.
“그건 그렇고……. 사랑하는 형제를 만났는데 술이 빠질 수 없지!”
“오랜만에 한 번 달려볼까?”
현실은 사방이 피바다였다.
어젯밤 수십 명이 주검이 된 현장 와이너리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술타령을 하는 보스들은 역시 강심장이었다.
“가세나, 형제!”
“다니엘 형제. 오늘 달리는 거야! 하하하하.”
내 양쪽에서 척척 어깨를 올리는 두 보스와 함께 호텔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진짜 짜릿했어. 그치 카리나?”
“응! 스트레스가 쫙 풀렸어~.”
보스의 딸들도 파파들을 그대로 닮았다.
한바탕 전쟁으로 날밤 까고 해장으로 술 마시러 가는 이탈리아 마피아들의 라이프 스타일.
다음부터 이탈리아 합숙 훈련은 절대 꿈도 꾸지 않을 것이다.
***
“일 처리 한 번 깔끔하네.”
마피아 보스와 딸, 조직원들이 물러갔다.
이른 시간부터 제대로 술판이 벌어졌다.
와인을 물처럼 마셔댔다.
딸들도 아빠를 닮았다.
어젯밤의 진한 흥을 되살려 아침부터 와인을 퍼부었다.
취하자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다.
그 사이 바깥은 분주해졌다.
뒤늦게 차를 타고 합류한 마피아 조직원들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시체부터 모든 걸 깔끔하게 치워버렸다.
감금되어 있던 온드란게타 조직원들도 사이좋게 나눠갔다.
건설업자들이 나타나 깨진 유리창을 갈아 끼웠다.
피에 물들었던 눈은 뜨거운 햇빛에 녹아 사라졌다.
전문 청소업자들이 모든 흔적들을 깨끗하게 지웠다.
정오가 지나갈 때쯤 모든 게 완벽하게 끝났다.
온드란게타와의 전쟁을 앞두고 두 여인은 자신들의 파파와 함께 떠났다.
시칠리아로 반드시 찾아오라고 카리나는 눈물까지 보였다.
못다 한 얘기를 다시 나누자고 뜨겁게 유혹하던 베르타.
하룻밤 꿈처럼 나타났다 또 그렇게 사라졌다.
“사업 하고 싶으면 말하라고? 싸게 뭘 줘!”
한국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뭔가를 원가에 제공하겠다고 보스들이 말했다.
내가 가진 통장 하나만 털어도 자신들의 부(富)보다 많다는 걸 모르고 한 소리들이었다.
사실 나에게 마약 필요하면 말만 하라고 했다.
한국 지부를 내준다나 뭐라나.
“총은 고맙게 쓰겠습니다~.”
자신들이 떠나고 혹시 모를 위험해 대비하라며 온갖 총을 선물했다.
권총이며 총알, 자동소총 같은 이것저것 많았다.
씨큐리티 직원들은 입이 찢어졌다.
제대 후 제대로 만져본 적도 없는 총기류에 정신이 팔렸다.
짱개 히트맨들이 남겨 놓은 총과 RPG7은 덤이었다.
야간 투시경까지 아주 제대로였다.
총알도 수천 발이나 확보했다.
“이 동네 사람들 참 성격 좋아…….”
지난 밤 마피아들이 난리 아닌 난리를 쳤지만 호텔리어들은 거짓말처럼 출근하고 평소처럼 일을 처리했다.
우리 일행을 제외한 다른 투숙객은 전혀 없었다.
부서진 곳을 수리하고 청소를 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냈다.
마피아와 그들의 폭력을 일상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슬슬 짐을 싸볼까~.”
이곳에서 더 이상의 수련은 무의미했다.
죽음을 경험했던 씨큐리티 직원들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눈빛이 변했다.
특전사 출신들이지만 이런 실전은 쉽게 경험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경호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나도 집에 가고 싶었다.
다른 마피아 조직이나 짱개들이 복수하러 오면 사건은 일파만파 커질 게 빤했다.
부우우우우웅.
그때 일단의 검은색 대형 SUV와 고급차 몇 대가 와이너리로 다가왔다.
선팅을 진하게 해 실내를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경비를 서던 직원들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마피아들에게 받은 저격총으로 대기 중인 직원들도 있었다.
용담호혈의 와이너리.
성 창문을 통해 다가오는 움직임을 지켜봤다.
“응?”
그런데 저 차들.
눈에 익은 차량들이었다.
그리고…….
고급 자가용에서 내리는 한 여인.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