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9
회귀의 전설
329장. 복수하기 좋은 날 (2)
타닥 타다다닥.
경쾌한 자판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사방이 밀폐된 공간.
암호화가 걸린 하드디스크를 풀기 위해 왜소한 체격의 안경 쓴 남자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직도 멀었나?”
옆에 서 있던 40대 초반의 남자가 초조하게 물었다.
이 물건 하나 빼내기 위해 특수 요원이 파견됐다.
그리고 하드디스크는 외교행낭을 통해 본국으로 전달됐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하드 디스크 주인이 암호를 걸어놔 어쩔 수 없었다.
한국 대사관에서 처리할 수 없어 일본까지 넘어왔다.
기어코 내각 정보부 최고 해커 실력자가 동원됐다.
“지독한 놈입니다.”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해커가 답답한 듯 한마디를 토했다.
“반드시 자료가 필요하다! 최선을 다하라!”
“넵!”
‘상부에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독촉하는 거야?’
내각 비밀 정보부 소속 요원인 사이토 다까시는 등에 진땀이 나고 입안이 썼다.
재촉이 계속 됐다.
며칠 동안 잠도 못자고 하드 디스크 암호 해독에 매달렸다.
일개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컴퓨터에 불과했지만 보안이 워낙 셌다.
암호를 푸는 일이 난관에 부딪혔다.
하드디스크 암호를 기존 방식과 달리 마스터파일테이블(MFT)을 암호화했다.
미국 국방성도 뚫던 해커는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암호를 하나씩 해체해 나갔다.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만큼 끝이 멀지 않았다.
타다다닥 타다다다다닥.
다까시가 알 수 없는 컴퓨터 용어들이 모니터에 생성됐다.
그리고…….
“됐습니다! 암호가 뚫렸습니다!”
해커가 눌렸던 부담감을 털어내며 환호성을 질렀다.
몸을 쫙 펴자 그간 제대로 씻지 못해 퀴퀴하고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오오! 정말인가?”
다까시는 기쁨의 탄성을 터트렸다.
“다행히 개별적으로는 암호가 결려 있지 않습니다.”
해킹된 하드 디스크에 담겨 있던 자료들이 속속 모니터에 보였다.
‘역시!’
특별한 분류로 보이는 S1, S2, S3 등으로 분류되어 있는 자료 폴더들.
“어서 열어보게!”
“넵!”
신이 난 해커가 첫 번째 폴더를 클릭했다.
“동영상입니다?”
“동영상?”
“영상 재생합니다.”
“……그래.”
다카시와 해커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몰입했다.
[하아……. 하아~ 하~♪.]
그때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야릇한 여성의 비음이 울렸다.
그리고 화면에 재생되는 익숙한 얼굴.
“헛!”
다까시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소라 상~.”
하지만 다까시와 달리 소라의 오타쿠인 해커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봐도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되는 소라 양.
그에게는 해킹으로 얻게 될 그 어떤 정보보다 소중한 자료 화면이었다.
***
“경치 참 좋다~.”
말로만 듣던 이탈리아 토스카나 와이너리.
그리 높지 않은 키안티 산맥의 둥근 구릉들 사이에 위치한 숙소는 환상이었다.
겨울이지만 영상을 유지하는 날씨가 안개 숲을 만들어 냈다.
구릉 지대였기에 사방이 한눈에 보였다.
숙소는 최근에 건축한 호텔 영업장과 그 뒤에 자그마한 중세 성으로 구분 됐다.
또한 소량의 와인을 최상의 맛으로 유지하는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지방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성을 빙 두르고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앞은 계단 형식으로 펼쳐진 포도밭이 조성돼 있었다.
그 풍경이 그제야 이곳이 이국임을 실감 나게 만들었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이계와 거의 비슷한 자연환경과 풍경이었다.
여름에 사용할 풀장도 있었고 거대한 나무들이 있는 산책로도 아름다웠다.
고즈넉한 풍광이 여유로운 휴가를 즐기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다.
로버트가 날 위해 눈치 빠른 호텔리어들을 배치했다.
호텔과 내가 거주하고 있는 본채는 분리돼 있었다.
작은 중세 성을 온전히 나 혼자 사용하는 셈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성 안에는 대장간이 딸려 있었다.
화로를 이용한 옛 방식의 중세 대장간.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 딱 알맞은 크기였다.
관리를 잘해놓아 바로 사용이 가능할 정도였다.
“정령들이 아쉬워…….”
정령들의 도움이 없으면 마력 무구는 제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무료하거나 심심하면 이것저것 물건들을 만들 수는 있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장점 중 하나는 이곳 공기가 정말 맑다는 것이다.
화산이 발아래에서 끓고 있어서 그런지 화기 또한 남달랐다.
내공을 흡수하기에 이만한 장소가 없었다.
포도밭과 천연 자연 환경이 다여서 공장의 매연이나 오염된 기가 전혀 없었다.
하루하루 몸의 기운이 달라졌다.
제대로 힐링이 됐다.
이계가 아님에도 이계가 함께 공존하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하긴 루벡 남작가 창고를 털긴 했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놈 뒤에 버티고 있는 후작이 또 남았다.
그 후작도 끝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안다.
짧다면 짧은 인생 살면서 많이 배웠다.
스윽.
대장간에 들러 어제 제조해 놓은 검을 들었다.
대충 만들었는데 대장장이 실력이 업그레이드 돼서 그런지 쓸 만했다.
하지만 실력배양이 더 필요했다.
한국에서는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 많은 눈들을 피해 수련할 수 있는 곳으로 이만한 곳이 없었다.
마음 놓고 검무를 추었다.
나에게 한계가 있다면 그건 내가 한계를 뛰어넘기를 포기하는 순간뿐일 것이다.
휘리링.
마음이 흐르는 대로 검이 춤을 췄다.
마음이 유연하게 흐르면 검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춤췄다.
그러다 마음이 경직되면 검 또한 무겁고 다루기가 힘들었다.
아직도 한참 부족한 내외의 조화, 그리고 나의 실력.
오늘 하루도 나는 이 낯선 곳에서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
“대표님.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세상에 연말에 휴가를 빙자한 훈련이라니요!”
“흐흑. 한국이 그립습니다. 우리 연정이랑 새해 휴가 계획 다 세워놨는데…….”
“숙이가 끓여주는 자취방 라면이 먹고 싶습니다!”
한진웅 대표는 불만을 터트리는 부하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보냈다.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억울한 건 자신이었다.
강릉에 가서 연말 잘 보내라고 덕담까지 보탰던 보스였다.
그래놓고 갑자기 비상 호출 명령을 내렸다.
호텔까지 예약하고 이번에는 끝까지 가보려고 마음먹고 있던 한진웅이었다.
그런 그가 눈물을 삼키며 서울로 돌아왔다.
보스 거주지가 털린 사건이 자신의 무능한 능력 같아 두말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정신에 올라왔는지 모르지만 도착한 회사.
보스는 명단을 건네며 함께 출국할 사람들이니 준비시키라고 통보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부랴부랴 직원들에게 비상 연락을 가동했다.
해외 출국 시에는 허락을 맡아야 했기에 모두 국내에서 휴가를 보내며 대기 중이었다.
제주도부터 시작해 강릉, 부산, 목포에 흩어져 있던 직원들이 빠르게 호출에 응했다.
겨우 보스 스케줄에 맞춰 김포 공항에 집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타게 된 자가용 비행기.
그 엄청난 위용에 한진웅과 씨큐리티 직원들은 바짝 쫄았다.
자신의 개인 비행기를 사용하듯 행동하는 보스의 태도에 눌렸다.
군용 비행기 외에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직원도 많았다.
그것도 대형 자가용 비행기의 1등석.
특별 요리와 술까지 제공 됐다.
목적지인 이탈리아에 도착할 때까지 모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휴가 기간에 해외 근무 호출을 한 보스에 대한 불만이 거짓말처럼 녹아 사라졌다.
그렇게 도착한 이탈리아의 어느 와이너리.
주변 풍경과 묵게 된 숙소 또한 처음 보는 신세계였다.
보스가 아니면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해 볼 수 없을 그런 환경이었다.
여자 친구들과 연말과 연초를 함께 보낼 수 없었지만 전혀 후회되지 않았다.
이런 럭셔리 해외여행은 난생 처음이라 모두 불만을 품을 만한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이틀 동안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사흘째가 되자 보스가 명을 내렸다.
실력 향상을 위해 필요한 훈련 스케줄을 직접 짜줬다.
새벽에 일어나 가볍게 뒷산 구보 2시간.
식사 후 보스가 가르쳐 준 이상한 무술 동작 3시간 반복 수련.
점심 먹고 더 가볍게 검이나 창 같은 무기를 들고 4시간 반복 수련.
저녁 먹고 심심하거나 무료할까 봐 호흡법 3시간 집중.
먹고 자는 시간 빼고 무려 12시간 이상을 훈련에 매진했다.
다들 천리 행군 몇 번을 경험했던 베테랑들이라 보스의 훈련 스케줄을 묵묵히 소화해 냈다.
물론 휴대폰은 압수당했다.
야간 경계까지 서야 했기에 어지간한 특수 훈련보다 힘들었다.
한진웅 대표는 보스 경호를 몇 번이나 실패했던 터라 이를 악물고 참았다.
보스가 자신들의 실력 배양을 위해 큰돈 들여 해외 전지훈련을 준비한 거라 믿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 문뜩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비롯해 이곳 해외 연수에 참가한 남자 직원들에게 공통점이 한 가지 있었던 것이다.
그건 현재 모두가 뜨거운 연애 중이라는 사실이다.
유부남이나 솔로들은 열외였다.
한진웅은 소름 돋는 상상에 사실 확인에 나섰다.
예상대로 맞아 떨어졌다.
차출된 이탈리아 연수생 20명은 회사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현재진행형 연애 당사자들이었다.
직원 근황 보고서를 틈틈이 올렸던 터라 보스도 직원들의 웬만한 사생활을 알고 있었다.
한진웅은 보스가 이렇게 한 의도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나이는 어리지만 누구나 감동할 만한 능력자에 마음도 넓었다.
거지꼴이었던 자신을 비롯해 끈 떨어진 군대 후배들까지 거둬줬다.
업계 최고 대우는 기본이었다.
목숨을 던져도 전혀 아깝지 않은 은인이었다.
그런 보스가 많이 변했다.
“대표님! 보스께 물어 봅시다. 왜 우리를 이곳까지 대동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여기 말고 차라리 한국에서 빡세게 훈련하겠습니다!”
갑작스럽게 연인들과 강제로 떨어진 부하들이 집단 반발했다.
“그래……. 가보자!”
한진웅도 그 이유가 궁금해 결단을 내렸다.
눈만 감았다 하면 생각나는 임혜린.
늦사랑이 더 치열하고 뜨거웠다.
연말을 단 하루라도 함께 보냈다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진웅과 직원들이 우르르 보스가 머물고 있는 본채 성으로 몰려갔다.
“타앗!”
그때 들려오는 날카로운 기합 소리.
“???”
“뭐지?”
의아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보이는 보스의 모습.
휘리리리릭.
묵직한 철검을 들고 성 중앙 바닥에서 펄펄 뛰고 날았다.
“!!!”
놀라서 턱이 저절로 벌어지는 한진웅과 직원들.
보스가 어느 정도 무술 실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철검을 목검처럼 가볍게 다루며 휘둘렀다.
휘링 휘리리리링.
얼마나 빨리 검이 공간을 가르는지 검풍이 장난 아니었다.
그런 검을 들고 보수의 몸은 새처럼 가볍게 붕붕 바닥을 박차고 날았다.
무협 영화에서나 보던 초고난도 액션 장면이 따로 없었다.
“어~”
보스가 몸을 돌리다 들어서는 한진웅과 직원들을 발견했다.
“다들 뭐죠?”
싱긋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묻는 보스.
“저……. 보스. 할 말이…….”
한진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요? 연애도 못하게 이 먼 곳까지 끌고 온 이유가 궁금합니까?”
보스의 웃음이 사악하게 변했다.
“그럼 그게 사실…….”
한진웅 대표는 보스에게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며칠 전 보스 집에서 나눴던 대화가 퍼뜩 떠올랐다.
진짜 걱정도 되고 우쭐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뱉었던 진심어린(?) 말들.
“저는 관두고 여자 친구는 위기에서 구할 실력들은 됩니까?”
“무, 물론입니다!”
부하 한 명이 나섰다.
“그래요? 그럼 한 판 붙죠.”
“네???”
“여기 있는 모두가 덤벼 저를 쓰러뜨리면 보너스까지 더해 앞으로 한 달간 장기 휴가를 지급하죠. 그것도 여자 친구와 함께하는 유럽 여행 쏘겠습니다~.”
은근히 한진웅과 부하들을 자극하는 보스.
“그 말씀……. 진심이라 믿겠습니다!”
보스의 유치한 복수에 한진웅은 내심 심정이 상했다.
한진웅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봐도 자신에 비해 어리고 연약해 보이는 보스.
반드시 보스를 꺾어 넘어뜨린 뒤 임혜린과 이곳 와이너리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이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