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8화 (327/1,284)

 # 328

회귀의 전설

328장. 복수하기 좋은 날 (1)

나와 어깨를 부딪친 여인.

“죄송하니다.”

우리말로 다시 사과를 해 왔지만 발음이 부정확했다.

일본 여자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사소한 부딪힘에 정말 죄송한 표정을 짓는 과한 액션이 자연스러웠다.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쓰미마생은 으레 습관인 것 같았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국적을 떠나 눈에 띌 만한 미녀가 사과하는데 얼굴을 붉힐 수는 없는 법이다.

눈이 동그란 접촉녀(?).

일본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여주처럼 귀여웠다.

은은하게 갈색으로 염색한 단발머리와 새하얀 피부, 도톰한 입술.

복스럽게 보이는 콧날은 그녀의 동그랗고 순수한 눈망울과 어울렸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꽤 상당한 미인이었다.

“태산 씨……. 친절하시네요.”

“???”

느닷없이 여자가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불렀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절 아십니까?”

경계심이 바짝 들었다.

일본 쪽과 아직 정면으로 부딪힌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뒷공작이 있을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국정원까지 이용해 뒤를 캤다.

“한국대 경영학부 교환학생입니다. 음대 교양강좌 수업 시간에 태산 씨 봤습니다. 팬입니다…….”

팬이라 말하며 수줍게 얼굴에 복사꽃을 피우는 교환학생.

말투가 독특했다.

일본어를 사용해도 무방했지만 나는 한국어로 대꾸했다.

“부끄러운 실력입니다.”

“아니에요. 아빠가 바이올린 연주자입니다. 태산 씨 실력은…… 엄청납니다.”

엄지 척 치켜세우는 그녀.

“이름이…….”

“앗! 미안합니다. 코하네라고 불러주십시오. 도쿄대에 재학 중입니다.”

작은 날개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다.

그녀의 분위기나 외모와 잘 어울렸다.

“그럼 다음에 뵙죠. 코하네 양.”

“학교에서 다시 뵙기를 청합니다. 감사합니다. 태산 씨.”

화장실 앞에서 길게 노닥거리는 모양도 우스웠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그녀와 헤어졌다.

손을 흔들며 몇 차례 고개를 주억거리는 코하네.

행동이나 말투가 인상에 남았다.

한국대에 교환학생으로 재학중이라면 다시 만날 수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기억에 담았다.

앞으로 일을 알 수는 없지만 다시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스윽.

아무 인기척이 없는 대형 빌라.

대상이 사용하는 5층 창문이 조용히 열렸다.

밖에 자체 경비시스템이 돌아가고 CCTV가 가동되고 있는 건물이다.

그곳을 검은 추리닝에 같은 색 복면을 착용한 침입자가 능숙하게 침입했다.

발걸음은 고양이 발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번뜩이는 안광이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실내는 깔끔했다.

혼자 살고 있지만 흐트러짐이 없었다.

집안에 흐르는 착 가라앉은 공기.

거실에 세워진 그림들은 모두 다 고가의 대작 같았다.

그러나 그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침입자는 방 하나를 노렸다.

이미 구조를 모두 파악하고 침입한 듯 거침이 없었다.

끼릭.

집 주인이 사용하는 서재 문이 열렸다.

안에 설치된 컴퓨터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타다다닥.

전원 스위치를 넣고 빠르게 자판을 두들겼다.

비밀번호가 설정되어 있었다.

USB를 꽂고 특수 암호해독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하지만 전혀 반응하지 않는 컴퓨터.

계속 비밀번호 오류가 떴다.

“빠가야로!”

욕을 조용히 뱉는 침입자.

도저히 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컴퓨터 본체를 분리했다.

가볍게 하드 장치를 꺼내드는 침입자.

다른 것들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미련 없이 들어왔던 대로 창문을 열고 사라졌다.

창밖으로 2008년 마지막 날을 기념하듯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금세 눈은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

“전문가 소행입니다.”

한진웅 대표가 창을 살피며 결론을 내렸다.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한진웅 대표가 알고 있는 전문가와 내가 아는 전문가는 좀 달랐다.

천장이 높은 대형 빌라에 5층이었지만 다른 아파트 7층 정도 높이였다.

이곳을 맨손으로 올라왔다.

다른 날도 아니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 이 높이까지 창을 통해 올라왔다.

그냥 전문가라고만 말하기에 부족했다.

컴퓨터를 들고 다시 침입했던 창문으로 도주했다.

그렇다면 내공을 사용하는 자가 확실하다.

“정말 대단한 놈 같습니다. CCTV에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대기 중인 직원들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지붕을 이용한 것도 아니고……. 이곳을 맨손으로 올라왔다니……. 저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정도 솜씨면…… 특수 전문가입니다.”

“아쉽네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데…….”

종무식은 1차로 끝나지 않았다.

중국집에서 거하게 마시고 호프집에서 2차, 3차는 노래방.

순차적으로 아주 평범하게 진행됐다.

분위기는 좋았다.

여직원들 셋이 하관우 회장을 비롯해 각 대표들을 들었다 놨다 했다.

노래에 애교에 춤까지 끝내주자 모두 손을 들었다.

해장국까지 마시고 끝났다.

도중에 손발을 든 조 변호사님과 하관우 회장을 비롯해 모두 다 틈을 봐 도망을 갔다.

세 명의 여성과 나, 한진웅 대표만 끝까지 달렸다.

아침 7시가 돼서야 돌아온 집.

미세하게 기가 흐트러져 있었다.

나름 철저하게 대비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고수가 침입했다.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사라졌다.

비밀번호를 걸어놓았더니 풀 수 없자 들고 간 것이다.

그리고 씨큐리티 한진웅 대표가 찾아왔다.

“보스……. 괜찮겠습니까?”

한진웅 대표가 얼굴이 굳은 채 물어왔다.

아쉬워하는 내 표정을 보고 귀중한 걸 잃어버렸다 판단한 것 같았다.

“어쩔 수 있습니까. 이것도 하늘의 뜻이겠죠~.”

문제는 양산군자가 아니라 집안의 경비였다.

더 이상 지금의 경비 수준으로는 안 됐다.

이곳 빌라 단지 전체를 모두 매수해서 개인 아지트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가족들 안전에 박차를 가해주십시오.”

한 손으로 여러 사람의 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야 상관없지만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 여동생들이 문제였다.

“직원들을 더 파견했습니다.”

아직까지 가족에게 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컴퓨터는 가져가 봐야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본래부터 하드 디스크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휘발성 램 디스크만 사용했다.

중요한 자료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

필요한 것들은 슈퍼컴퓨터가 존재하는 미국 업체 서버에 남겼다.

블라드미르가 남긴 암호로 몇 겹이나 보안이 설정되어 있어 뚫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허허실실의 책략을 사용했다.

뛰어난 실력자가 시간을 투자하면 뚫을 수 있게 허점을 만들었다.

적을 향한 배려이자 음모였다.

뚫어봐야 별것 없다는 걸 스스로 확인해야 더 이상 건들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하드 디스크에 남아 있는 우정의 흔적이 좀 아쉬웠다.

친구들이 뇌물과 동료애로 조공을 바쳤던 1테라바이트의 그것, 올빼미 폴더.

시골집과 장주시 아파트에 있던 것들을 모두 모아 서울 집에 모셔놨건만 그것을 훔쳐갔다.

애석한 마음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뼈 삭는다고 하더니 알아서 하늘이 빼앗아간 것 같았다.

“한 대표만 믿겠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할 뿐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한진웅 대표.

한진웅 대표는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적들을 몰랐다.

마법을 사용하는 아사신과 살수를 파견한 짱개, 그리고 암중의 일본 쪽 무리들.

모두 일반인의 상식을 초월한 놈들이었다.

한진웅 대표에게 내공이나 마법을 전수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이 아쉬웠다.

좀 더 뭔가 주변인들의 안전에 도움이 될 만한 상위 마법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강릉 드워프 공장에도 직원들을 더 파견하십시오. 믿을 만한 후배들을 더 충원해도 됩니다.”

“바로 충원하겠습니다!”

A.T 씨큐리티 직원 수가 200명을 넘기고 있었다.

이제는 중대 규모를 훌쩍 넘었다.

그러나 아직 여러 모로 부족했다.

“오늘 데이트 없습니까?”

“……그게.”

연말이다.

사랑하는 이들은 당연히 오늘 만나야 앞으로 1년이 온전할 수 있는 날이다.

“당분간은 별일 없을 겁니다. 강릉 겨울 바다가 그렇게 멋지다고 하더군요. 새해 일출은 여친과 함께 보내셔야죠.”

“죄송합니다.”

“뭐가요?”

“보스는 언제나 홀로 바쁘신데…….”

설마 지금 내 걱정?

“아니 한 대표님…….”

“보스는 좋은 남자인데……. 여성들이 눈이 삔 것 같습니다. 저 같은 노총각도 미인을 만나는 세상인데…….”

“!!!”

한진웅 대표가 해머로 내 머리통을 갈겼다.

겉으로 보이는 난 모태 솔로급.

하지만 주변에 넘치는 게 미녀들이었다.

드워프 공장 누님을 얻더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 빵빵하게 부풀어 눈이 먼 한진웅 대표.

“하하……. 하.”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치솟는 알 수 없는 진한 배신감.

“그럼. 편히 쉬십시오.”

꾸벅 고개를 숙이며 미련 없이 사라지는 한진웅 대표.

“저…… 저…….”

입술이 파르르 떨리면서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세상 살다 이런 오해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급 반성하게 됐다.

좀 더 열심히 청춘을 불태우리라 다짐도 했다.

띠릭.

핸드폰 직통 번호를 눌렀다.

- 보스. 좋은 아침입니다.

지금 시각은 아침 9시.

미국 뉴욕은 13시간 시차를 두고 있으니 저녁 8시였다.

연말이라 쉬고 있었을 로버트였지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로버트. 집안에 쥐가 들끓습니다.”

- 미국 국무부를 통해 한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하겠습니다!

요즘 파워가 달라진 로버트의 답은 언제나 시원하고 강력했다.

그렇다고 관계가 달라질 건 없었다.

“더 큰 쥐를 불러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 ……그렇군요.

내가 한국 정부를 믿지 않다는 걸 로버트가 기억해 냈다.

“조용히 쉴 곳이 필요합니다.”

- 바로 비행기를 보내겠습니다. 구입한 미국 별장들은 안전과 보안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미국에 못 불러 안달이 난 로버트.

그러나 미국은 마음이 땡기지 않았다.

“유럽 쪽에 조용한 곳으로 부탁합니다. 프랑스 빼고 말입니다.”

- 유럽이라……. 아! 괜찮은 곳이 있습니다!

로버트 목소리에 힘이 담겼다.

“어딥니까?”

- 토스카나 지방에 괜찮은 와이너리를 구매했습니다. 그중 한 곳이 중세 성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요?”

이탈리아 토스카나 와인은 이탈리아 와인의 주산지였다.

척박한 대지와 가파른 골짜기가 머리에 그려졌다.

조용하게 수련에 집중하기에는 그곳이 좋을 것 같았다.

- 특이하게 중세 대장간도 있습니다. 로마 시대 건축물인데 유서가 깊다고 합니다.

“흐음…….”

뭔가 느낌이 강렬하게 전해져 왔다.

시골집이나 강원도 산골짜기는 수련 장소로 적당하지 않았다.

실력 배양이 절실히 필요 했다.

중급 마력석을 흡수하고 마음 편하게 수련할 장소.

대장간도 듣던 중 반갑게 안성맞춤이었다.

“안전합니까?”

- 와이너리는 키안티 산맥 부근에 위치해 있어 주변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경호원들이 파견되면 쉬시기에 완벽할 겁니다. 특급 경호원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아니요 됐습니다.”

- 네?

“이쪽 경호원들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머리에 스치는 사악한 생각.

조금 전 나를 위로하던 한진웅 대표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에게 폭탄을 던지고 황급히 사라지던 얄미운 곰의 넓은 등짝.

복수의 시간이 참 빨리도 찾아왔다.

“로버트. 비행기 큰 놈으로 보내주십시오.”

- 지, 지금 바로 말입니까?

“네~ 휴가 보내기 딱 좋은 날 아닙니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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