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
회귀의 전설
320장. 땅뺏기 (2)
“총각. 어디서 왔어? 험한 일 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곱고 잘 생겼누~.”
“하하……. 잘 먹겠습니다.”
마을에 하나뿐이라는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오는 내내 꼬맹이들의 우상 숭배를 받으며 도착했다.
내일 또 사탕을 준다는 말에 아이들은 영혼까지 털어 환호성을 질렀다.
심심한 일상에 찾아온 달콤한 유혹이 오늘 밤 아이들을 잠 못 들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맥주도 한 잔 할 테야? 어째 독한 놈으로 줄까? 용병들은 독한 놈을 선호하지~.”
“그럴까요?”
“클클. 내가 제조한 수제 맥주는 베르샤 성에서도 제일 끝내줬어~.”
여관 주인 할머니가 날 향해 앞니 빠진 웃음을 지었다.
찾아오는 이가 드문 동네답게 여관 투숙객은 나 혼자뿐이었다.
중세 시대 시설의 여관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나무와 벽돌로 만든 투박한 외관이었지만 안쪽은 정갈했다.
단일 식사 메뉴인 저녁을 주문했다.
사람을 오랜만에 받는 주인이자 주방장 겸 서빙을 하는 할머니가 나에게 유난히 관심을 보였다.
자주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용병이란다.
말문이 트였는지 베르샤 백작성에서 술장사 하던 시절의 썰을 풀었다.
반면 나는 차려진 식사 메뉴에 놀랐다.
감자가 들어간 생선 수프에 굵직한 생선 튀김, 고기 대신 빵에 들어간 생선 등등.
온갖 생선들이 날 반겼다.
“생선이 많이 잡히나 봅니다?”
“생선? 많이 잡혀~. 고기는 없어도 생선은 옛날부터 넉넉했어. 호수에서 잡히는 고기들이 아주 많아. 길가에 개들도 생선 물고 가는 거 못 봤어?”
할머니 농담이 찰졌다.
“오! 이거 진짜 맛있습니다!”
잘 튀겨진 생선 한쪽을 베어 물고 탄성을 터트렸다.
짭짤하게 구워진 생선은 살이 탱탱하고 쫄깃했다.
거기에 더해 불맛은 기본이고 생선기름의 고소한 맛까지 더해지자 입맛을 강하게 자극했다.
“맛있지?”
“환상입니다~”
“내가 요리 좀 했지~. 자 이것도 마셔봐. 대충 만든 덜떨어진 맥주보다 훨씬 좋을 거야.”
주인 할머니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잔을 내밀었다.
“보리맥주지만 예전에는 없어서 못 팔았어.”
나무잔을 들고 맥주를 살폈다.
딱 봐도 현대 맥주처럼 깔끔하지는 않았다.
덜 걸러진 맥주에는 부유물들이 간간이 보였다.
하지만 건강한 맛이 느껴졌다.
꿀꺽.
마침 생선기름 냄새를 씻고 싶었던 터라 맥주를 시원하게 마셨다.
“!!!”
맥주가 입안 가득 들어차자 눈이 확 하고 떠졌다.
겨울이라 그런지 더할 나위 없이 더 시원한 맥주.
눈알이 돌아갈 정도로 꿀맛이었다.
입안에 감도는 맥주 특유의 쌉싸름한 향과 곡물 특유의 여러 감칠맛이 혀를 희롱했다.
동시에 톡 쏘는 느낌과 함께 부드럽게 목을 넘어갔다.
대한민국에서 맛보던 싸구려 공장 맥주보다 딱 100배 더 맛났다.
이게 바로 손맛이 더해진 수제 맥주 본연의 맛인 것 같았다.
진정한 수제 맥주 맛에 깊은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오크나 귀족 따위의 협박질만 없다면 이곳 세상은 돈 벌어가며 여행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공기 맑고, 사람들 인심이 생각보다 후했다.
“맛있다고 막 마시면 안 돼. 이거 은근히 도수가 높아 뱃사람들도 몇 잔 마시면 푹푹 쓰러져.”
주인 할머니의 맥주부심이 대단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안의 생선기름 맛이 순식간에 개운하게 사라졌다.
“이곳은 누가 다스립니까? 영주님이 안 계신가요?”
술을 마시며 정보를 취합했다.
“영주는 없어. 몇 년 전에 마물이 나타났을 때 도망쳤지.”
“영주가 도망을 쳐요?”
“독하게 세금만 받아 처먹더니 마물에 놀라 지 자식과 기사들만 끌고 도망쳤어. 아주 나쁜 놈이야. 마물들 때문에 영지민들이 얼마나 놀랐는데…… 아무런 대책도 없었어.”
전 베르샤 백작령 영주에 대해 주인 할머니는 이를 갈았다.
듣는 귀족 없다고 반말에 욕까지 덤으로 얻어 비난했다.
내가 들어도 영주는 X새끼였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추임새를 넣었다.
“그때 놀란 영지민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 이곳 마을에 계시던 카르스 기사님이 우리를 받아줬지. 비겁하게 다른 기사들처럼 도망치지도 않으셨지. 다른 곳으로 도망친 영지민들 대다수가 거지가 되거나 노예로 팔려갔는데 우리는 운이 좋았어.”
카르스 기사에 대해서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 기사님이 영주님인가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그게 뭣이 중하겠어. 기사님은 영주가 아니라 극구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영주님으로 생각하고 있지.”
신망이 대단한 기사 카르스였다.
영주에는 욕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여관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나니 다소 마음이 편해졌다.
“오다가 들었는데 버려진 베르샤 성에 새로운 영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살짝 정보를 흘렸다.
“……알고 있어.”
“네? 알고 계셨어요?”
“동네를 찾아오는 상인들이 알려줬어. 새로운 영주가 빈 성을 차지했다고 하더구만.”
소문은 이곳에서도 인터넷 속도만큼이나 빨리 퍼졌다.
“나중에 영주가 이곳을 영지로 편입하려 할 텐데 괜찮겠어요?”
“뭐 하고 싶으면 하라고 그래. 가져갈 거라고는 생선밖에 없는데 두려울 게 뭐 있어.”
할머니 배짱이 갑이었다.
“성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으세요?”
향수를 자극하며 넌지시 물었다.
“……가고 싶지. 그런데 나 같은 늙은이를 영주가 받아주지는 않을 게야. 성안에 거주하려면 능력이 있어야 해. 가게도 다시 꾸며야 하는데……. 돈도 없고.”
새로운 영주에 대해서는 다른 반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영주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도 귀환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 맥주 맛보면 반드시 영주가 성에 초대할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진심이었다.
이런 기막힌 맥주집이 동네에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
어느새 맥주를 다 마셨다.
입에 침이 돌았다.
대한민국에서 맛보던 흐리멍덩한 맥주와는 차원이 달랐다.
“말만이라도 고마워. 젊은 사람이 아주 싹싹해~. 맥주 한 잔 더해. 이번 잔은 공짜야~.”
할머니가 장사할 줄 알았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
나도 덕담을 마음껏 던졌다.
영주 신분으로 살고 있지만 어느 세상에서든 공짜는 언제나 기분 좋았다.
그렇게 나는 이것저것 물으며 맥주를 기분 좋게 홀짝였다.
생선 안주와 맥주가 생각 이상으로 궁합이 잘 맞았다.
땡~! 땡~! 땡~! 땡~! 땡~!
갑작스럽게 울리는 종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분위기 참 나무랄 게 없었다.
“???”
종에 대한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이 동네에서는 종만 울렸다 하면 대형 사건이 터졌다.
“카르스 님이 돌아오신다!”
우렁차게 울리는 병사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이곳을 다스리는 기사의 귀가였다.
“순찰을 나갔다 오시는구만.”
주인 할머니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눈동자에 따스한 빛이 흘렀다.
카르스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게 느껴졌다.
“순찰요? 주변에 뭐가 있어요? 동네 조용해 보이던데?”
“그게…….”
할머니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으아아아아아아!”
갑자기 소름끼치는 커다란 비명이 들렸다.
땡땡땡땡땡땡땡!
종소리가 급박하게 변했다.
“마, 마수가 쳐들어온다!”
“마수다! 마수!”
마수라는 소리에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하며 자리를 차고 튕기듯 일어났다.
“비상! 비상 비사아아아아앙!”
땡땡땡땡땡!
비상이라는 외침과 격한 종소리가 고요한 마을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쩝.”
이웃집 영주의 침공 예정에 골머리가 썩을 지경인데 사정 보지 않고 마수까지 등장했다.
밥을 다 먹기 전에 벌어진 사태.
조용하게 동네 정보 수집이나 하고 맛있는 맥주나 마시려던 평화가 깨졌다.
아무래도 이곳 세상에서도 안식과 평화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벌컥벌컥 남아 있던 맥주를 원 샷으로 들이켰다.
불끈 알코올 기운이 돌았다.
철컥!
방패와 무기들을 챙겼다.
마음이 급했다.
마수는 처음이었다.
이마가 다리미로 펴도 펴지지 않을 정도로 험상궂게 찌그러졌다.
오크들이 수백 마리 떼거리도 덤벼도 상대하기 벅찬 놈이 바로 마수라 들었다.
“마, 마수라니! 아이고 아이고! 이제 어쩌나……. 아이고.”
할머니들의 반응은 지구나 이곳이나 똑같았다.
주인 할머니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이고’ 소리만 연신 내뱉었다.
“할머니 계산은 다녀와서 하겠습니다.”
정신없는 주인 할머니를 뒤로하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우아아아아아앙!”
길가에 놀란 아이들이 곳곳에 웅크리고 앉아 울었다.
“케이트, 어서 안으로 들어와!”
“다란! 다란!!!”
엄마들이 정신없이 아이들을 찾아 헤맸다.
평화롭던 마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여자들과 애들을 성으로 대비시켜!!!”
“느, 늦었어! 마수가 너무 빨라!”
“성문을 닫아!!!”
“카르스님과 병사들이 아직 들어오지 못했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빗발쳤다.
혼란이 극에 달했다.
애들은 울고 여자들은 패닉에 빠졌으며 남자들은 각자 무기를 들고 성벽으로 내달렸다.
비현실적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정신없이 상황이 돌아갔다.
이들이 맞닥뜨린 현실이의 공포가 하늘을 찔렀다.
거짓이 아닌 사실, 꿈이 아닌 현실.
타다다닥.
빠른 발걸음으로 방책 위에 올랐다.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헛!”
성 밖을 내다보고 경악했다.
두두두두 두두두 두두두.
열 마리의 말이 필사적으로 마을 방책을 향해 내달려 오고 있었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미친 듯 달려오는 기마병들이었다.
그 광경의 긴박함은 제대로 위급상황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급박한 것을 넘어 심장이 쫄렸다.
케라라 케라라라라라라라라!
마수 떼로 보이는 놈들이 기마병 무리를 뒤쫓았다.
마수들의 흉포한 울음은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쳤다.
추격거리는 약 100미터.
눈에 띌 만큼 빠르게 말과 마수의 거리가 좁혀졌다.
“라, 라쿠라다!”
“라쿠라???”
처음 보는 놈이지만 눈에 익었다.
변종 개새끼였다.
진회색 개털을 휘날리는 시베리아 호랑이만 한 놈들이었다.
여섯 개의 다리를 교차로 움직여 기마병들을 뒤쫓고 있었다.
뛰는 폼이 집단 무리 생활을 하는 놈들로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협동 공격력이 장난 아니었다.
기마병 무리를 양몰이 하듯 포위하며 쫓았다.
다구리 맛을 제일 잘 아는 놈들이었다.
어지간한 병기는 놈들의 질긴 가죽을 뚫지 못했고 가벼운 상처도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저 정도 추격이라면 기사단이 나서야 방어가 될 판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라쿠라의 상대가 안됐다.
날카로운 이빨에 물리면 쇠 갑옷이 뚫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수들은 성질도 더럽다고 했다.
“궁수들 준비해!”
방책뿐만 아니라 성에서도 병사들이 방어태세를 갖췄다.
활시위에 화살을 메겼지만 공포로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병사들도 알고 있었다.
화살을 날리는 일이 부질없다는 것을 말이다.
“바보들이네.”
경장갑 갑옷을 착용한 기마병들이 온 힘을 다해 죽어라 성으로 다가왔다.
아마 복귀하는 도중 습격을 당한 듯했다.
하지만 말머리를 잘못 잡았다.
목적지가 틀렸다.
저들로 인해 이곳 마을 주민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흐음…….”
안타까움에 신음이 절로 터졌다.
선택지는 단 하나.
“이번엔 네놈들이구나!”
오크 대전사와도 목숨 내놓고 싸웠다.
레벨이 높지 않았지만 뒤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더욱이 손에 들린 무기들은 정령왕들의 가호가 서려 있는 물건.
마력을 끓어 올렸다.
목표물은 단 하나.
활을 들고 시위를 천천히 메겼다.
휘리리링.
앞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 한 줄기가 손등을 스쳤다.
찬바람 부는 오늘, 마수파티 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