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0화 (309/1,284)

 # 310

회귀의 전설

310장. TS건설 설계팀 (1)

“네?”

윤소진은 순간 당황했다.

장태산이라는 남자의 질문에 멈칫 말문이 막혔다.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굴러온 돌이 박힌 돌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전혀 무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입가에 카푸치노 거품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남자 앞에서 윤소진은 무장해제가 돼버렸다.

이런 느낌, 이런 경험 참 오랜만이었다.

멋진 남자 앞에 서면 심쿵한다는 말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남자를 불렀던 목적은 상실했지만 윤소진은 바보가 아니었다.

“저기요……. 그건 제가 할 말인 것 같은데요? 이곳은 제가 지난 10년 동안 뼈와 살을 바쳐 충성한 사무실인데요…….”

아주 조심스럽고 품위 있게 말을 잇는 윤소진.

“아~ 그렇군요.”

남자가 한 번 더 활짝 웃었다.

‘어머머! 이 미친 심장 어쩔 거야!’

윤소진은 공대를 나왔다.

마초가 쩌는 공대에서 웬만한 상남자 및 상또라이들을 섭렵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 부류에는 전혀 면역력이 없었다.

훈남에 한없이 부드러운 인상을 갖고 있으면서도 진한 수컷 냄새가 물씬 났다.

방금 야생의 밀림에서 맨몸으로 생존해 돌아온 전사 같았다.

해병대나 공수부대 복학생들에게서 맡았던 그런 남자의 냄새가 분명 났다.

그와 더불어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순수하고 여린 소년의 향기까지 덩달아 풍겼다.

‘군대는 갔다 온 거야?’

언뜻 티비에 흔하게 나오는 남자 아이돌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하지만 무시하기에는 뭔지 모를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함부로 하대하기가 힘들었다.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며칠 동안 파견 나온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파견요?”

“발주업체 직원입니다.”

“아! 발주업체요…….”

알고 있기로 공사비가 1,000억 단위를 훌쩍 넘었다.

가끔 대형 발주업체에서 직원들이 파견 나오는 경우가 있긴 했다.

“발주업체 직원이었어?”

“난 어디 낙하산 타고 내려온 줄 알았네…….”

“태산 씨……. 나이가 꽤 어려 보여. 몇 살이야?”

포스에 눌려 가까이 가지도 못하던 남자 직원들이 그제야 입을 열며 다가왔다.

클라이언트 소속이지만 나이가 어린 것을 확신하고 편하게 말을 텄다.

“비밀입니다.”

장태산은 빙긋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꽃미남 소리 듣던 곽 대리가 오징어 됐네…….’

팀원 남자들 중 가장 잘생겼다는 곽준원 대리가 오늘따라 참 초라해 보였다.

다른 남자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키와 몸매, 얼굴과 분위기부터 시작해 모든 게 비교됐다.

‘저 손목시계……. 명품인 거야? 옷도 그렇고……. 왜 내가 다 모르는 메이커들이야!’

윤소진은 장태산의 액세서리에 골치가 아파왔다.

발주업체 직원이라는데 옷과 구두, 시계를 비롯해 치장한 모든 게 한 눈에 봐도 명품들이었다.

그것도 시중에 도는 평범한 명품이 아닌 수제 명품들.

직원이 아니라 사장이라 해도 믿을 판이었다.

“정말 멋있어요~.”

젊음이 무기라고 회사에서 미모로 탑3에 들어가는 공혜진이 진심을 까발렸다.

눈에는 하트 뿅뿅을 가득 담았다.

공혜진 나이는 이제 이십대 중반.

‘아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윤소진은 무심한 세월을 한탄했다.

한때 도도함의 대명사였던 윤소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름지고 푸석한 피부에 자신감은 지하를 팠고 상실감마저 느꼈다.

화장품을 아무리 좋은 걸로 바꾸고 덧칠해도 되살릴 수 없는 젊음이었다.

“감사합니다.”

공혜진의 멋있다는 말에 담담하게 반응하는 장태산.

“설계팀 모두 다 출근했습니까?”

“???”

갑자기 출근 체크에 들어갔다.

“그, 그건 왜요?”

윤소진이 순간 당황해서 물었다.

다들 윤소진과 같은 마음이었다.

아무리 발주업체 쪽 직원이지만 이렇게 팀원 출근까지 체크하는 건 의외였다.

“회의해야죠.”

“회의요?”

“장주시 연구소 건 이달 안에 마무리할 겁니다.”

‘하도록 하죠’나 ‘해야 합니다’도 아니고 ‘할 겁니다’라고 확정 발언을 내뱉는 장태산.

직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이 사태가 뭔지 파악하느라 바빴다.

아직 위에서 하달된 지시는 없었다.

과거 설계를 폐기하고 전면 재수정하라는 말만 들었다.

결정적으로 아직 팀장이 출근 전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장태산의 말에 태클을 걸거나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묘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굴러온 돌 장태산.

그를 따라 귀신에 홀린 듯 직원들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

“도대체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설계 방향이 뭡니까? 큰 그림을 얘기해 줘야 소품들을 챙길 거 아닙니까. 어떤 스타일의 설계를 원하는지 먼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윤소진 대리라는 명찰을 단 30대 중반 정도의 여성이 대차게 나왔다.

20대 시절에는 미모 좀 날렸을 듯한 외모였다.

그녀가 다소 화가 난 듯 물어왔다.

풍기는 기세가 남달랐다.

딱 봐도 회사에 필요한 인재상이었다.

잘만 키우면 건설업계에 이름을 날릴 만한 관상이었다.

“우리 것을 살릴 예정입니다.”

“우리…… 것요?”

황당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직원들.

이계에서 돌아와 곧바로 이곳 회사를 찾아왔다.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설계 도면이 날 잠들지 못하게 괴롭혔다.

최신형 CAD를 비롯해 설계 프로그램과 작업 도구가 갖춰진 TS 건설 본사 설계팀.

하관우 회장에게 부탁해 출입증을 받아냈다.

주말임에도 그룹 본사의 위력으로 바로 처리 됐다.

망치를 잡고 마력 무구들을 만들다 보니 연구소 디자인까지 연결됐다.

창의적 발상과 행동은 또 다른 창조를 낳는 법.

스티븐 매튜에게 뒤질 수 없었다.

자존심이 걸렸다.

가장 미국적이며 실리콘 밸리의 특징을 살린 스티븐 매튜의 애플 본사 디자인에 꿀리고 싶지 않았다.

돈은 내가 더 많았다.

스티븐 매튜는 자신이 상상한 걸 주문했지만 난 내 손으로 완성하고 싶었다.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 곧 내 정서와 맞았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창작 욕구에 이틀 동안 설계팀 사무실에 눌러앉게 만들었다.

그리고 밝아온 오늘 아침.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했다.

연구소 전부를 책임질 수는 없었다.

중요 스케치만 내가 담당하고 세부적 디자인은 직원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건설 설계팀 능력이 꽤 괜찮았다.

앞으로 TS 그룹 전반에 걸친 설계 작업자를 육성할 곳이었다.

“얼마 전 애플 본사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스티븐 매튜를 만났습니다. 그의 철학이 가미된 애플 신사옥은…….”

“스, 스티븐 매튜요?”

“태, 태산 씨~ 거짓말 그렇게 사실처럼 하는 거 아냐.”

“지금 우리 도깨비에 홀린 건 아니죠?”

“스티븐 매튜? 하하하. 그 사람이 얼마나 바쁜데~”

다들 믿지 못했다.

내 말이 끊겼다.

기를 꺾을 필요가 있었다.

발주처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나이가 어려 보이면 일단 우습게 보는 경향이 사회 이곳저곳에 만연해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법인 사업장은 오너도 직원이나 마찬가지였다.

“확인시켜 드리죠.”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스티븐 매튜 주소록을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물론 스피커폰은 켜 놨다.

띠이이이이이이 띠이이이이이이.

신호가 몇 번 울렸다.

- 오우~ 다니엘, 무슨 일이야? 이 야심한 시각에 내가 보고 싶은 건 아닐 테고…….

한국은 아침이지만 미국 동부는 늦은 저녁이었다.

스티븐 매튜의 반가운 목소리가 스피커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

“지, 진짜 스티븐 매튜???”

직원들 표정과 머리 위에 물음표가 연속 떠올랐다.

애플이 어떤 회사인지 모른다고 하고 싶어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그곳의 CEO와 직접 통화하는 날 경악에 찬 시선으로 바라봤다.

“매튜. 제가 한 가지 선전포고할 일이 생겼습니다.”

- 선전포고……. 설마 우리 주식을 팔아먹겠다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은 아니지?

“설마요~.”

- 흐흐. 그럼 뭐야. 아주 흥미가 바짝 생기는데~.

호기심 많은 천재는 던진 미끼에 군침을 흘렸다.

“제가 애플 본사 디자인보다 더 근사한 녀석을 뽑아낼 생각입니다.”

- 뭐라고? 우리 본사보다?

“네~ 아주 멋진 놈입니다. 그걸 보고 나면 매튜는 저를 디자인팀에 초대하고 싶을 겁니다.”

-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다니엘~ 요즘 들었던 가장 심한 농담보다 더 재밌는 말이야.

“1억 달러 걸죠.”

- ……진짜야?

“10억 달러로 할까요?”

- 끙……. 농담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서로에게 공정하도록 하죠. 무슨 말인지 알죠?”

스티븐 매튜를 은근 자극했다.

자존심이 강한 그가 거부할 리 없었다.

“가슴이 승복하는 대로…….”

부언을 첨부했다.

- 콜!

스티븐 매튜는 승부를 즐길 줄 알았다.

- 다니엘……. 뭔지 모르지만 날 감동시키기 어려울 거야. 내 우주선에 타보면…… 뻑 갈 거야~. 흐흐흐.

자신만만한 매튜의 음성이 끊이지 않고 스피커폰을 통해 울렸다.

미래에 사진으로 많이 봤던, 우주선을 닮은 애플 신사옥.

멋지지만 날 감동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녀석은 달랐다.

“그건 까보면 알겠죠.”

- 그래……. 그건 까보면 알겠지.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

고요한 침묵에 빠진 회의실.

“지, 진짜 애플의 스티븐 매튜 맞아요?”

“허얼~ 나 꿈꾸는 거 아니지?”

“세상에…….”

설계팀 직원들이 정신을 챙길 시간은 줬다.

가끔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지금처럼.

“윤소진 대리님.”

“네?”

공격을 퍼붓다 멈추면 말을 꺼내지 아니한 만 못한 법이다.

설계팀에서 내공이 가장 쌔 보이는 윤소진 대리를 상대로 골랐다.

“고객이 원하는 설계 주제를 물으셨죠?”

“네…….”

“제가 말한 ‘우리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윤소진을 비롯해 직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제부터 경력은 물론 나이와 직위도 상관없었다.

스티븐 매튜가 내 후광이 됐다.

“토속적인 한국적 디자인을 말하는 거 아닌가요?”

사원 공혜진이 대답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정답입니다. 고객은 장주시 연구소를 가장 한국적 디자인으로 건설하기를 원합니다.”

이계 방문 횟수가 잦아질수록 다녀와서 생각하면 성이 참 불편했다.

또 서울 아파트보다 부모님이 살고 있는 고택이 정서에 맞았다.

스티븐 매튜도 자신들의 문화와 정서에 어울리는 우주선을 디자인했다.

‘우리 것’이 소중하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다.

주식인 쌀밥과 빵이 다른 것처럼 문화도 그랬다.

“너무 예쁠 것 같아요! 미래를 상징하는 한국적 건물이라……. 파격적이면서도 신선해요!”

가끔 살다보면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게 마련이다.

공혜진의 눈동자가 확신에 찬 듯 더 반짝였다.

“그래서 첨단을 달리는 연구소를 군주남면(君主南面)의 이치를 따져 방향을 잡고 동쪽 양택을 낮추고 서쪽을 높이고,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의 서열이라도 정하겠다는 말인가요? 풍수전문가라도 불러서 터 잡아요? 대목장도 필요하겠네요~ 말만 하세요. 우리 아버지가 대목장이니까……. 참나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가끔 이렇게 적재적소에서 대박이 터져줄 때도 있다.

툴툴 대며 속사포처럼 내뱉는 윤소진 대리.

놀랍게도 그녀의 아버지가 대목장인 듯했다.

짝짝짝.

진심으로 박수를 쳤다.

나는 참으로 운복이 터진 사람임이 분명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도움이 될 인연자를 만났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윤소진 과장님.”

“과, 과장요?”

갑작스레 달리 부른 직함에 눈을 껌뻑이는 그녀.

설계팀 직원들 역시 상황을 알 수 없는 아사리판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국 건축에 대해서 아십니까?”

“대학원 시절 잠깐…….”

“훌륭합니다. 마음에 듭니다. 과장님!”

“아니 제가 그쪽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인데…… 저는 대리라고요. 과장이라는 호칭은…….”

“뭐야~ 월요일 아침부터 팀장 허락도 없이 다들 회의실에 모여 수다 떨어? 그러다 니들 짤린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피곤에 쩐 남자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오. 어제 상무님하고 라운딩 진하게 한판 했더니 삭신이 쑤시네~”

9시 30분을 넘기고도 여유만만하게 나타난 남자.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팀장의 권위를 은근히 과시했다.

“티, 팀장님 오셨습니까.”

직원들이 억지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한눈에 봐도 엉망진창으로 굴러왔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설계팀의 개군기.

은근히 핑계를 대며 상무를 팔아먹는 팀장의 하는 짓을 조용히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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