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
회귀의 전설
306장. 환영받지 못한 자들 (2)
“무, 무슨 일이야?”
“기병들이다!”
베커 성의 병사가 된 용병들은 무기를 들고 있으면서도 당황했다.
용병들에게 기사 급이 포함된 기병들은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두두두 두두두두두.
수십 기의 기병들 말발굽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화려한 기마병들의 갑옷이 햇빛에 반짝였다.
목표를 정한 듯 거침없이 다가왔다.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젠장…….”
용병들은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다.
한눈에 봐도 기병들 풍기는 분위기가 엄중했다.
성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려 오는 말들은 힘이 넘쳤다.
힘차게 앞발을 든 백마가 새겨진 영지기를 들고 기병들이 거침없이 성을 향해 가까워졌다.
무거운 체인메일을 착용한 기병들을 태운 군마도 하나같이 갑주 차림이었다.
허접 가죽갑옷으로 무장한 베커 성의 병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말등 옆에 달린 방패, 장창, 기마용 중검까지 무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파괴적이었다.
놀란 영지민들도 성벽 위에서 다가오는 기마병들을 보고 얼어붙었다.
“루, 루벡 남작가의 깃발이다!”
“잔혹한 폭군 루벡 남작가다!”
소리 없는 비명이 영지민들을 휩쓸었다.
베르샤 백작령과 맞닿아 있는 영지의 깃발이었다.
과거 영지민들 다수가 그곳에 갔다가 농노나 노예로 팔려 나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영주 루벡 남작.
사람을 하찮은 짐승처럼 취급하기로 유명했다.
그 가문의 깃발임을 확인한 영지민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히이이이잉.”
말들이 요란한 울음을 토하며 성벽 앞에 멈췄다.
“…….”
허접한 용병의 습관이 남아 있는 병사들이 서로의 얼굴만 번갈아 보며 대처를 못했다.
누구 하나 감히 나서지 못했다.
땜빵한 성문은 절대 기사를 막지 못했다.
기마병들 중 앞에 선 세 명의 기사들의 은빛 갑옷은 유난히 반짝였다.
미스릴이 함유된 마력 갑옷이 분명했다.
기사들은 투구도 벗지 않고 고개를 들어 성벽을 지긋이 바라봤다.
“훗……. 거지 떼가 빈 성을 차지한 건가?”
느긋하게 흘러나오는 선두에 선 기사 게라드의 목소리가 성벽 위까지 들렸다.
비웃음이 담겼다.
“크크크크크.”
뒤에 선 기병들이 함께 비웃음을 토했다.
‘마물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기사 게라드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물이 존재한다면 저렇게 거지 떼의 기운이 편안할 리 없었다.
헐벗고 굶주린 놈들의 표정은 마물 걱정보다 자신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상단 놈들이 들락거린다면 짐작이 맞겠지. 흐흐흐.’
마물이 없는 빈성으로 물품을 가득 싣고 상단이 드나든다는 소문이 쫙 돌았다.
떠돌던 거지 떼도 수시로 그 뒤를 따라 들어간다는 말도 있었다.
루벡 남작이 기사들을 보냈다.
그리고 남작가의 기사 게라드가 성에 마물이 없는 걸 확신했다.
‘기회다……. 엄청난!’
버려진 영지는 주워가는 자가 임자였다.
과거 이곳 영주였던 자는 다른 귀족파에 속했다.
주군인 루벡 남작이 자작이나 백작으로 승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일단 보고를 올리고 빠르게 빼앗아야 한다.’
게라드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당장 공격해도 거지 떼를 성에서 몰아낼 자신은 있었다.
성벽 위에 허수아비 같은 용병들과 거지 떼는 아무 문제가 안 됐다.
하지만 주군의 명을 받아야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네놈들은 어찌 감히 이 땅의 주인이신 루벡 남작님의 명도 없이 성을 점유하느냐! 죽고 싶지 않으면 썩 물러가라!”
게라드가 거칠고 큰 목소리로 선전포고를 했다.
마력이 담긴 음성이라 성벽을 따라 웅웅 울렸다.
“…….”
성에서는 아무도 대꾸하는 자가 없었다.
미리 겁을 준 것인데 먹힌 것 같았다.
‘네놈들은 다 노예로 팔아주마~. 크크.’
게라드는 음흉한 눈빛으로 성벽의 미래 노예들을 훑었다.
다음에 올 때 노예상인을 대동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노예 값이 싸도 수가 많으면 돈이 됐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네놈은 누군가?”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마력 담긴 음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기사 게라드는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
진짜 죽여줬다.
개간지라는 비속어가 튀어나올 뻔했다.
성벽 위에서 쳐다본 은빛 찬란한 플레이트 갑옷.
지구 중세 기사들이 착용하던 갑옷보다 훨씬 광택빨이 죽였다.
광택제라도 바른 듯 은빛 물광이 눈부시게 빛났다.
활동에 둔해 보이지도 않았다.
팔꿈치나 관절 부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투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바람에 펄럭이는 백마 깃발을 든 기마부대.
저런 기사단 하나쯤 소유하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기사단을 이끌고 평야를 휩쓰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영화 ‘반지의 영광’에 나오는 엘프족 기사단도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기사에게 분노 유발 떡밥을 던지고 녀석을 지켜봤다.
남작가의 기사임에도 전혀 격이 떨어지지 않았다.
갑옷에 자꾸 눈이 돌아갔다.
뻥 안 치고 내숭 안 까고 갑옷을 빼앗고 싶었다.
내가 입으면 좀 더 멋이 살 것 같았다.
기사들 갑옷은 공격력과 방어력이 특히 높다고 했다.
미스릴 가루가 들어가 마법도 어느 정도 막아주는 효능이 있다고 들었다.
기사가 들고 있는 검도 탐났다.
내가 만든 가죽 갑옷보다 딱 열 배 정도 멋있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 내 몰골은 초라했다.
이건 백작 영주가 아니라 하급 용병들 대장 꼴이다.
꿀꺽.
욕망에 침이 꿀떡 넘어갔다.
빼앗으면 무죄고 여기서 못 뺏으면 두고두고 후회가 될 것 같았다.
미국 금융위기에 쓸어 담는 돈보다 더 욕망을 자극했다.
오크들 무기와는 공격력 자체가 틀렸다.
투박한 오크 무기와 비교할 수 없는 정교함과 예기가 마력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저걸 빼앗아 분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행복 총량의 법칙에 따라 나는 저 녀석의 행복을 빼앗고 싶었다.
어차피 저 자식 나쁜 놈 같았다.
주변에 떠다니는 음울한 기 덩어리들.
수없는 살인을 저지른 놈이다.
머릿속에서 대장장이 바쿨라의 지식들이 굴러다녔다.
아직 진화가 없는 대장장이 기술이 업그레이드 될 것 같았다.
마력 무기를 다룰 수 있는 마력 장인만이 마력석을 무기나 방어구에 제대로 장착시킬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마력 장인이 된다면…….
입맛이 절로 땡겼다.
지금은 마력을 무기에 미약하게 불어넣는 수준이다.
하지만 공식 장인 호칭은 받지 못했다.
좀 더 노력하면 뭔가 답이 보일 것 같았다.
그런데 저 새끼……. 감히 날 야려?
나를 흘기는 눈으로 바라보는 기사를 찜했다.
이쪽 세상에서는 승자가 패자 것을 모두 착복(?) 가능했다.
강자독식의 도박판.
언제나 뭔가 아쉬운 나에게는 딱 좋았다.
물론 긴장도 됐다.
기사가 셋에 정규 기마병들이 수십 명이다.
계산이 복잡해졌다.
무식이 삼촌 같은 오크 상대할 때와는 대결 방식이 틀렸다.
기병들의 무력은 영지 유일 기사인 탈만과 비슷한 것 같았다.
기사급과 다르게 기병들의 무기와 방어 수치는 용병들보다 훨씬 높았다.
마력을 조금이라도 다룰 줄 아는 자들이었다.
당장 붙으면 우리 측의 완패였다.
“난 루벡 남작가의 자랑스러운 검 게라드 드 바르사 경이다.”
스스로 경이라 칭하는 기사 게라드.
마력을 담아서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녀석의 그런 태도를 비웃으며 지켜봤다.
파파밧.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스침은 짧았지만 오가는 투기는 강렬했다.
당장 달려가 서로의 심장에 칼을 꽂을 분위기였다.
“난 이 성의 영주 베커 장 백작이다~!”
느릿하면서 마력 가득 담아 외쳤다.
기사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백작이라는 셀프 칭호.
“!!!”
게라드는 나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입술이 달라붙는 모습이 보였다.
“귀족이 언제…….”
“게라드 경. 떠돌이 귀족이 성을 점령한 것 같습니다.”
게라드 옆에 있던 기사들이 날 노려보며 의견을 전했다.
저놈들도 2순위 대기자로 올렸다.
“당신 말을 믿을 수 없소이다! 증명하시오!”
게라드가 강하게 나왔다.
하긴 바로 나를 백작으로 인정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게라드 목소리 톤이 변했다.
내가 귀족이라고 밝힌 이상 기본 예의는 갖추어야 할 입장일 것이다.
해골 복잡한 게라드의 얼굴 표정이 다 읽혔다.
한껏 이 순간을 즐겼다.
“난 정당한 이 성의 주인이다. 오크 대전사가 포함된 오크들을 학살하고 성을 차지했다. 누가 있어 그런 나를 부정하겠는가!”
파앗!
오크에게서 빼앗은 마력도끼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
기마병들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찬란하게 뿜어내는 마력의 황홀한 빛깔.
내가 기사 급에 이른 자임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왜 못 믿겠나? 지금 내 영지를 침범한 네놈들이 밟고 있는 땅 밑에 묻혀 있는 오크 뼈라도 꺼내 보여줘?”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도발이라 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대가리 숙이고 기어들어 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
내 말에 성 안의 영지민들 역시 모두 놀라는 표정이 됐다.
자칫 충돌이 발생하면 어느 쪽이 불리할지 모두 알았다.
어느새 사비나를 따라온 용병들도 성벽 위로 올라와 구경 중이었다.
“역시 영주님이야…….”
“우리 주군 배짱 한 번 끝장난다!”
병사가 된 용병들의 평가는 후했다.
아니 속이 다 시원한 표정이었다.
기사들 앞에서 가진 게 없어도 강하게 나가는 내가 달라 보일 것이다.
- 용병 병사들이 영주에 대한 호감과 존경심이 상승했습니다.
- 마나 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내뱉은 말과 달리 긴장의 끈은 늦추지 않았다.
다행히 성벽 위에 속속 올라오는 용병들의 숫자에 기마병들이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기사와 기마병이라도 해도 다구리에는 쫄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사비나가 나를 쳐다봤다.
복잡한 시선이다.
그녀가 보기에도 이 도박판은 위험할 것이다.
기사들만 잡으면 끝나는 게 아니다.
그 뒤에 있는 남작이라는 귀족을 상대해야 했다.
전투가 시작되면 좋든 싫든 본격적으로 영지전을 치러야 한다.
기업 경영과 다르지만 또 비슷했다.
기로에 섰다.
남작가에 투신할 기회와 공격적 M&A를 결단할 시점이었다.
순간의 선택이 이계의 평생을 좌우하는 법.
맛있는 먹이를 본 이상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다.
영지전이 벌어지면 나뿐만 아니라 이 성에 있는 모두의 목숨이 아작 날 것이리라.
나 역시 복잡한 마음으로 기사 게라드를 응시했다.
영지민들이 남작가의 깃발만 보고도 이를 갈았다.
게라드라는 자식도 호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
‘이놈들이 감히 나를……. 모욕해!’
기사 게라드는 서서히 분노가 들끓었다.
성벽의 거지 떼들과 용병들이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던지고 있다고 착각에 빠졌다.
‘어디서 오크 무기 따위를 들고!’
영주라 주장하는 놈을 보며 게라드는 확신했다.
어떻게 오크와 싸워 승리했는지 몰라도 정식 기사 출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갈등했다.
오늘 끌고 온 기사들의 수가 너무 적었다.
성벽 위에 용병들은 어림잡아 봐도 수백이 넘었다.
기마병이라는 약점도 작용했다.
성문은 허술해 보였지만 적 소굴 내부에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몰랐다.
‘오늘은……. 참는다. 그러나 곧 네놈들을 모조리 처단하러 다시 올 것이다!’
게라드는 악독한 눈빛을 빛내며 결심했다.
분노했지만 눈치가 빠른 게라드였다.
“오늘은 이만 물러간다.”
게라드가 기사와 기마병들에게 조용히 명을 내렸다.
“그게 좋겠습니다.”
“토벌대를 조직해 다시 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사들도 동의했다.
말고삐를 잡고 그렇게 등을 돌리려던 게라드와 기마병들.
“왜 그냥 가려고? 쪽팔리게?”
갑자기 영주라는 작자의 야유와 시비 가득 찬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뭣이!”
게라드의 눈썹이 구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 나쁘고 찜찜한 영주라는 작자였는데 조용히 돌아서는 자신에게 다시 시비를 걸었다.
“경에게 묻겠다.”
영주가 준엄한 심판관처럼 목소리를 쫙 깔았다.
‘경? 이런 쳐 죽일 놈이!’
대답 없이 씩씩대는 게라드.
“영주인 내 허락 없이 내 영지를 침범한 죄……. 어떻게 죗값을 치를 것인가!”
마력을 가득 담은 영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에 반해 게라드의 얼굴은 투구 속에서 심하게 일그러졌다.
휘익.
그때 영주가 성벽에 있던 창 하나를 게라드 앞에 던졌다.
푸욱!
소음과 함께 창이 땅에 박혔다.
“이 땅의 수호자이자 주인인 나 베커 장 백작의 이름으로 루벡 남작가의 자랑스러운 검 게라드 드 바르사 경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바이다!”
빼도 박도 못할 도발.
“허엇!”
“결투!!!”
사방에서 신음 섞인 비명이 터졌다.
기사 이상의 귀족들이 펼치는 목숨 걸고 펼치는 처절한 싸움.
처음 보는 미친 영주놈이 게라드를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