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
회귀의 전설
302장. 장주시의 적폐 (4)
“어서 오십시오! 차장검사님!”
“아이고~ 시장님, 퇴직한 지 몇 년 지났습니다. 이제는 밥값 걱정하는 월급쟁이 변호사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대형 로펌 이사가 되시지 않았습니까. 늦게나마 감축드립니다.”
“감축은 시장님이 받으셔야죠~ 저 같은 월급쟁이가 아니라 이제는 수십만 시민을 책임지는 시장이시지 않습니까~.”
조윤태 변호사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안효근 시장은 거만 떨지 않고 두 손을 맞잡고 바짝 허리를 숙였다.
‘왜 찾아온 거야? 무슨 냄새를 맡았나?’
웃는 얼굴과 달리 내심 안효근 시장은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전직 지역 차장검사 빽은 시간이 지나도 장난이 아니었다.
검사들은 퇴직 후에도 그 존재감의 무게가 남달랐다.
거기에 더해 대형 로펌 이사가 될 정도라면 어지간한 법조계 인사들은 그 앞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
“하하. 그게 제 힘이 아니라 조 검사님 같은 좋은 인연들 덕분입니다. 앉으십시오.”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공손히 자리를 권했다.
삐이이이이.
[네! 시장님.]
“몸에 좋은 6년근 홍삼차 두 잔 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평소 대접하는 차로 상대방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는 안효근 시장은 가장 비싼 홍삼차를 주문했다.
밑에 직원들에게 알아서 긴장하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6년근 홍삼차는 바로 최고 등급으로 대우해야 하는 손님이라는 소리였다.
“장주시 발전이 예사롭지 않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국가 기관도 이전을 해 오고 대규모 개발 사업도 진행 중이더군요.”
조윤태 변호사는 한껏 여유를 부리며 요즘 지역 소식으로 말문을 텄다.
‘설마 용돈 달라고 온 건 아니겠지?’
중앙지 기자들이나 중요 인물들에게는 금일봉이 하사 된다.
한국 자유당 의원 보좌관 시절 제대로 배워둔 게 있다면 그거 하나다.
돈 아끼는 놈치고 정치판에서 정치 생명 오래 유지하는 놈이 없었다.
“뭐 쪼잔하게 용돈 달라고 찾아온 것 아니니까 긴장 푸세요. 그깟 공무원 월급 얼마나 된다고~.”
조윤태 변호사가 속을 읽은 듯 본격적으로 입을 털었다.
‘이 자식 뭔가 있다!’
전직 지역 차장검사의 정보력이라면 정치인들 약점 한두 가지씩은 잡고 있었다.
안효근은 절대 깨끗한 인간이 아니었다.
지저분한 여자 문제부터 시작해 자금 횡령과 정치법 위반까지 잡자고 보면 걸릴 게 수두룩했다.
“아이고~ 저 같은 보잘 것 없는 지역 시장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뭔지 몰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정치인으로 살다보면 때를 안 묻힐 수가 없다는 거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 안 해도 시에서 법률 담당 로펌을 변경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조 이사님 잘 부탁드립니다.”
안효근은 강한 자에게 절대 송곳니를 드러내지 않았다.
밑바닥부터 시작한 정치인의 최고 덕목이 고개를 잘 숙이는 거라는 것쯤은 잘 알았다.
대신 못난 놈들 앞에서 빳빳하게 어깨 펴는 재미로 살았다.
중앙 정치에 입문해도 가늘고 길게 그 바닥에서 오래 버티고 싶었다.
적과 아군이 될 자를 냉철하게 구분할 줄 아는 안효근 시장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X만한 로펌으로 보입니까?”
“네?”
“우리 삼우가 그렇게 만만하냐고~ 안효근이!”
느닷없이 버럭 호통을 치는 조윤태 변호사.
“…….”
안효근은 갑작스럽게 얼어붙은 분위기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과거 선거철에 선거사범으로 잠깐 조우했던 조윤태 검사였다.
그 당시는 부장검사였던 조윤태 사무실에 끌려가 무서움을 단단히 맛봤다.
그때가 다시 떠올라 안효근은 식은땀이 났다.
뭔지 모르지만 뭔가 제대로 사단이 났다는 걸 눈치챘다.
“이, 이사님……. 노여움을 푸시고 대화로 하시죠. 혹시 제가 미진하고 실수했던 일이 있다면…….”
“어이~ 안효근이 너 많이 컸다. 시장이 검찰총장 정도 벼슬이나 되냐?”
조윤태가 점잖던 모습을 벗어던지고 다리를 꼬고 앉았다.
죄인을 취조하는 검사의 자세였다.
“……이사님. 제가 뭘 잘못했는지 말씀을 해주시면…… 즉각 고치겠습니다.”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안효근은 미칠 지경이었다.
뭐가 맥이라도 잡혀야 말머리를 끄집어낼 텐데 조윤태는 예리하고 비릿한 눈빛만 뿌렸다.
삐이이이.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무슨 일이야! 귀한 손님 오신 거 몰라!”
안효근이 애꿎은 비서에게 화를 냈다.
[시장님……. 양우석 의원님이 오셨습니다.]
“뭐? 양우석 의원이?”
‘오늘 일진이 왜 이렇게 꼬이고 지랄이야!’
조윤태에 이어 합동민주당의 양우석 장주시 국회의원의 방문이 이어졌다.
장주시 국회의원이었지만 예산 따낼 때나 한두 번 보는 형식적인 사이였다.
당이 다른 국회의원과 시장은 친분 관계가 깊지 않을 경우 앙숙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불렀어.”
“???”
“들여보내. 같이 오신 분도 함께.”
도리어 시장에게 명령을 내리는 조윤태였다.
“저, 정중히 안으로 모셔.”
[네.]
아직까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있는 안효근 시장이었다.
문이 열리고 전혀 반갑지 않은 양우석 국회의원과 새파랗게 젊은 놈이 함께 들어왔다.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시장님.”
“양 의원님 잘 지내셨습니까. 의정 활동에 바쁘신데 시정까지 챙기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워낙 시장님 일처리가 훌륭해 제가 할 일이 없습니다. 예산 많이 따주고 싶어도 초선이라 힘이 부족합니다. 여당 시장님이 힘 좀 써주십시오~.”
의례적인 대화가 짧게 오고 갔다.
파바바밧.
하지만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기 싸움은 시작됐다.
‘이 새끼들이 서로 짜고 치는 거야? 도대체 뭘 노리는 거야!’
안효근 시장의 머리가 터질 듯 복잡하게 굴러갔다.
아무리 연결을 지어보려고 해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의원과 로펌 이사였다.
초선 국회의원은 대형 로펌 이사보다 힘이 한참 모자랐다.
그렇다고 여의도에서 서로 어울릴 것 같지도 않았다.
어부지리로 당선된 양우석 의원은 내세울 게 청렴밖에 없는 생 거지다.
‘때깔이 달라진 것도 같은데…….’
그러나 얼마 전 만날 때와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스폰이 붙은 듯 슈트 때깔이 훤해져 있었다.
안경도 제법 고가의 것처럼 보였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여유가 흘렀다.
전 재산이 1억도 안되는 국회의원이 풍길 만한 기세는 아니었다.
“저도 6년근 홍차 한 잔 주십시오. 시장실에서 마시는 홍차가 그렇게 맛이 좋다고 하더군요~. 얼마 전 마셨던 인삼차는 솔직히 맛이 구렸습니다.”
“…….”
대놓고 차 대접을 타박하는 양우석 의원에 말에 안효근은 인상이 굳어졌다.
시장실에 들어온 세 명은 작당을 하고 뭔가 건수를 잡은 놈들이 분명했다.
안효근에 대한 배려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죠? 그만 뜸들이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하시죠. 저 바쁜 사람입니다.”
안효근도 더는 뒤로 물러설 수 없음을 알고 배수의 진을 쳤다.
여차하면 얼마 전 새로 뚫었던 중앙 권력의 도움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대통령과 연결되어 있어 어지간한 일은 다 무마가 될 수 있었다.
강하게 나가지 않으면 계속 코너로 몰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바쁘겠지~ 비자금 삥쳐서 여기저기 상납하느라 정신없으니까~.”
조윤태 변호사가 대놓고 이죽거렸다.
“조 이사님! 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상납이라니! 증거 있습니까!”
“아니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 상납이라니~ 허어. 큰일 날 일이군요.”
양우석 의원이 맞장구를 쳤다.
“다, 당신들 뭐야!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큰소리치는 와중에도 좌우로 눈알을 굴리는 안효근.
“협박이 아니라 팩트 폭력이라는 거다.”
그때 양우석과 함께 따라온 젊은 놈이 비웃음을 날리며 안효근을 자극했다.
“넌 또 뭐야!”
“뭐긴 뭐야~ 나 몰라? 장주시 쓰레기 청소 팀장이다.”
“뭐, 뭐라고!”
***
악당놈들은 항상 놀라는 표정이 비슷비슷하다.
불리하다 싶으면 놈들 표정은 딱딱하게 굳고 눈빛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눈치는 또 엄청 빨랐다.
“당신들 협박범이야? 경찰 부르겠어! 내 방에서 당장 나가!!!”
저런 말은 하도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경찰? 불러~ 그럼 나야 좋지~.”
털썩 가죽 소파에 앉았다.
장주시에서 6년이나 재선 시장질을 해먹더니 집무실 때깔이 고급졌다.
새로 건축된 시청도 돈을 처바른 티가 팍팍 났다.
“효근아. 빨리 불러라. 이왕이면 말깨나 하는 기자들도 모아라. 한 방에 가자.”
이제는 눈빛만 봐도 서로의 의중을 아는 조윤태 변호사님이 바람을 잡았다.
“제가 불러도 되겠습니까? 여의도 쪽에 아는 기자들이 제법 있습니다.”
새로 합류한 양우석 의원이 협력자가 됐다.
“…….”
셋이 모이니 사람 하나 바보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안효근 시장 표정은 지금 죽을 맛이다.
핸드폰에서 녹음 재생 기능을 켰다.
- 다섯 장만 내. 그럼 너 장주시 시장 만들어 줄게.
- 의원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 내 밑에서 수고했다. 시장 됐다고 어깨에 힘주지 마라. 넌 영원히 내 쫄다구야.
- 물론입니다! 저 안효근은 오주혁 의원님의 영원한 종입니다! 딸랑~ 딸랑~.
- 푸하하하하하하하하.
통화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고 완벽했다.
“허억!”
안효근의 얼굴이 일순간 푸르딩딩 썩은 돼지고기처럼 변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마비를 일으키고도 남을 표정이었다.
분명 집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던 중요한 내용이 시장실에서 까발려졌으니 저 표정이 안 나오면 이상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안 튀어 나온 게 다행이었다.
보험용으로 보관되어 있는 치부가 드러날 때 정신 온전할 정치인은 없었다.
“다른 것도 들려줄까? 최상득하고 통화했던 내용도 있던데~”
안효근 시장은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아 버렸다.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이권 개입해서 처먹은 돈이 수십억이 넘더라. 시청 공사비에서도 수십억~ 도로 공사에서도 10억~ 인사청탁으로 수억~ 아주 억을 깔고 살았더만~”
좋은 말이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저런 개 쓰레기 같은 놈들이 시장을 해먹고 있었다.
그러나 한 방에 인터넷 같은 곳에 터트리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었다.
이런 빼도 박도 못한 증거도 조작질 전문 정권은 권력을 이용해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었다.
검사와 짜고 재판까지 가도 시장 재임기간 끝날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언론도 조종당해 흐지부지 다루다 끝내 아무 일 아니었던 것처럼 묻힐 것이다.
현재는 깨진 그릇 같은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쓰레기를 청소하기에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었다.
저런 인간들 하나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끝이 아니기에 참았다.
때로는 강한 것보다 협박이 통하는 때가 있었다.
조 변호사님과 양우석 의원을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쓰레기 같은 정부와 여당을 상대할 때 여당 시장을 이용하면 안성맞춤이었다.
“당신들…….”
파르르 떨면서 맥이 빠진 안효근 시장이 시뻘건 눈동자로 우리를 번갈아보며 노려봤다.
“눈깔아 새끼야. 당장 처넣기 전에!”
조윤태 변호사님 성격 아직 안 죽었다.
버럭 호랑이 같은 호통이 터졌다.
“와아~ 시장님 통 진짜 크네. 조그만 동네에서 그렇게 빼먹을 게 많아요? 나도 국회의원 말고 시장 했어야 했는데!”
양우석 의원이 놀라는 척하며 은근한 분노를 드러냈다.
“안효근 시장님~”
그를 조용히 불렀다.
“잔머리 굴려봐야 도망갈 곳 없습니다. 여자 문제도 많던데 그건 개인 프라이버시로 묻고 가겠습니다. 처조카들까지 시청 소속 공기업에 취직시켜준 것도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당신 아니어도 당분간은 누가 해먹어도 해먹을 짓들이니까요.”
하나씩 놈의 치부를 까발렸다.
툭.
그리고 시장 앞에 서류 한 뭉치를 던졌다.
놈의 컴퓨터를 블라드미르 기술로 해킹한 내용들이었다.
시장실 컴퓨터를 비롯해 집 컴퓨터까지 모두 탈탈 털었다.
부족한 건 정국종 차장을 통했다.
국정원은 예상대로 각종 비리들을 이미 상당수 알고 있었다.
시장들까지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 기관은 생각보다 더 치밀하고 무서웠다.
“당신이 지금까지 저지른 불법 행위들 목록입니다. 천천히 시간 날 때 훑어보세요. 날짜별로 조목조목 분리해 놨으니 보기 편할 겁니다. 아침 드라마보다 더 재밌더군요.”
반말을 거두고 사람대우 해줬다.
인터넷에 올려 여론을 이용해 밟을 수도 있지만 꾹 참았다.
시장이 물러나면 중앙 행정처에서 임명한 부시장이 권한 대행을 맡는다.
어떤 꼴통이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차라리 돈 밝히는 이런 악인이 더 편했다.
“뭘…… 원하십니까…….”
안효근이 날 보고 물었다.
조윤태 변호사나 양우석 의원을 조종한 게 나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눈치 빠르고 똑똑한 놈이다.
고영대 정치외교학과는 거저 졸업하는 게 아니었다.
“시장 임기를 보장해 드리죠.”
먼저 미끼부터 던졌다.
“!!!”
사퇴를 예상했던 듯 안효근 시장은 동요했다.
“이번 임기가 마지막입니다. 명예롭게 퇴직 시켜드리죠. 훈장 받으셔야죠~.”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주혁 의원에게 뱉었던 맹세처럼만 하면 됩니다. 쉽죠? 어차피 한두 번도 아닌데~.”
철저하게 자존심을 짓밟아주었다.
저런 인간들은 인간 대접 해주면 곧바로 다시 기어오른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든 걸 포기한 듯 안효근은 빠른 결단을 내리고 눈을 깔았다.
“양우석 의원과 모든 시정을 협의하면 됩니다. 간단하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안효근.
마지막 쐐기를 박을 때가 됐다.
“배신하지 마십시오. 죽을 때까지 입 다물면……. 역전파 박대출, 홍장혁 시의원……. 그리고 오주혁 의원처럼 한 방에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과거 내가 정리했던 쓰레기들 목록을 조목조목 짚어줬다.
“!!!”
더할 나위 없이 깜짝 놀라는 안효근 시장.
누구보다 장주시 쓰레기 적폐들 명단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의 계획자가 나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안효근 시장의 눈동자에 진한 공포가 제대로 각인되는 걸 확인했다.
-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를 획득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