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
회귀의 전설
294장. 스티븐 (1)
“칫……. 뭐야. 분위기는 다 잡더니…….”
임윤아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갑자기 말투가 바뀐 장태산.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에 임윤아는 바짝 쫄았다.
먼저 용감하게 유혹하려 했던 자신감은 이미 사라졌다.
대호 앞의 토끼처럼 숨 쉬기도 벅찼다.
포도주를 대접에 따라 몇 사발을(?) 벌컥거리며 마신 장태산.
갑자기 셔츠를 풀고 반나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임윤아는 다른 사람처럼 바뀌어 버린 장태산에게 말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이글거리는 에너지가 그의 온몸에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렇게 시작된 그림 작업.
“정말……. 누가 믿을 수 있겠어. 이 그림들이 하룻밤 사이에 다 그려졌다는 걸…….”
임윤아는 바닥에 깔린 각종 수묵화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명작들이었다.
동양화를 전혀 감상할 줄 모르는 이들이 마주해도 깊은 감동에 빠질 것 같았다.
나무 위 비둘기를 노리는 고양이는 당장이라도 튀어 올라 발톱을 휘두를 것 같은 생동감이 넘쳤다.
젊은 기운이 넘치다 못해 뻗쳤다.
임윤아의 시선은 다른 한 폭의 매화도로 옮겨졌다.
굵은 가지 위로 기이하게 뻗어나가는 매화가지는 눈이 수북이 쌓여 가지가 뚝 부러질 듯 휘어졌다.
그 와중에도 느껴지는 거칠고 강인한 생명력.
결코 쉽게 부러지지 않는 매화의 단단함이 그대로 시선을 통해 심장에 전해져 왔다.
“하아…….”
임윤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화폭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남자가 떠난 지 벌써 몇 시간이 지났다.
그 뒤로도 꼼짝할 수 없었다.
지난 밤 남자는 무려 열 폭의 그림을 남겼다.
“이 작품이 초기……. 매화도가 중기……. 그리고 마지막 신선도가 말기 화풍이라 이거지?”
초기 작품은 중국 화풍의 영향을 확실하게 받았다.
한번 본 그림은 바로 따라 그릴 수 있었다는 천재 오원 장승업.
역관의 집에서 스승 없이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던 그였다.
그런 그의 자유분방한 화풍 곳곳에서 중국 냄새가 짙게 느껴졌다.
하지만 중기를 넘어 말기 작품이라는 신선도에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득도의 경지가 엿보였다.
난해함 속에서도 장승업 특유의 강인한 화풍이 그대로 드러났다.
모시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흩날리는 멋들어진 한국 신선이 용을 타고 구름 위를 날아가는 장면은 파격적이었다.
도가적인 중국 화풍 신선도와는 완벽하게 차별됐다.
“화풍이 변했어……. 죽기 전 심득을 얻었던 거야…….”
취화선에 대해 정보를 수집했던 임윤아는 남자가 그려낸 장승업의 화풍이 시대별로 비슷하다는 걸 알았다.
진짜 오원 장승업이 나타나 그려놓고 간 것 같았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감정사들도 진품이라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런데! 왜……. 나를 멀리하는 거야! 처음에는 잠을 안 재울 것처럼 굴더니! 내가 매력이 없는 거야? 가슴이 작아서 그런 거 아니지?”
임윤아는 거울을 앞에 놓고 자아비판에 빠졌다.
와인을 대접으로 마시던 남자.
집안에 있던 와인 스무 병을 홀로 다 마셨다.
물론 임윤아도 몇 잔 마시긴 했지만 남자가 모두 원 샷으로 조졌다.
그러다 임윤아는 어느 순간 깜빡 잠이 들었다.
피곤한 상태에서 저녁도 많이 먹고 남자의 기에 눌려 심기를 많이 소모했다.
자신도 모르게 깊은 수마에 빠졌다.
이른 새벽이 돼서야 눈을 떴다.
그때……. 임윤아는 똑똑히 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따뜻한 눈빛.
남자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꿈결처럼 느껴졌던 남자의 미소를 보며 임윤아는 기분 좋게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한 폭의 미인도를 남겼다.
화려한 비단옷에 머리를 곱게 땋아 내린 화폭 속 미녀는 임윤아 자신이었다.
비 오는 밤에 창문을 열고 촛불을 켠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미인도.
“치이……. 완전 멋진 바람둥이야…….”
미인도에는 한 편의 시가 적혀 있었다.
야우기북(夜雨寄北).
밤비 속에 북쪽으로 편지를 붙이다.
“군문귀기미우기(君門歸期未有期)……. 당신은 돌아올 날 묻지만 날을 잡지 못했소.”
임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시를 음미했다.
어렵지 않은 한자들이었다.
동양 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한자 공부도 병행해야 했다.
“파산야우창추지(巴山夜雨漲秋池)……. 파산 밤비에 가을 연못이 불어나오.”
그림을 보는 임윤아의 시선은 따뜻했다.
시에 담겨진 남자의 유쾌함이 느껴졌다.
“하당공전서창촉(何當共剪西窗燭)……. 언제쯤이면 함께 서쪽 창의 촛불을 돋우고……. 완전 나빠……. 누구 때문에 그랬는데!”
말과 달리 입가에 웃음이 진하게 퍼져가는 임윤아.
“각화파산야우시(却話巴山夜雨時).……. 파산 밤비 이야기를 하려는지?”
시가 끝났다.
임윤아는 그대로 멈춰 미인도 속 자신과 시를 보았다.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창문 밖은 어제 늦은 밤부터 내린 비가 아직도 그칠 줄 몰랐다.
함께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약속하고 만날 그날을 기다리겠다는 그리움이 가득한 시였다.
사업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찾아와 시와 그림을 남기고 간 21세기 취화선.
고시를 가져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했다.
“미워하려고 해도…… 미워할 수가 없어……. 이렇게 멋진 바람둥이 같으니라고……. 하아아.”
깊은 한숨을 쉬며 임윤아는 벅차오르는 감동에 맑은 눈물을 또로로 흘렸다.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같이 있던 시간이 불과 얼마 전인데 끔찍하게 보고 싶었다.
“일단 논문 마무리하고!”
임윤아는 힘을 냈다.
힘든 시절에 찾아와 위로가 되고 치유의 손길을 내민 남자 친구를 위해서라도 힘을 내고 싶었다.
“태산 씨…….”
그러나 왈칵 터지는 감정의 봇물은 임윤아를 비처럼 촉촉하게 적시고 말았다.
***
“도대체 일을 이 따위로 하는 거야! 내 귀한 시간에 이런 허접 보고서를 보라고? 미친 거 아냐? 왓더 뻑킹!”
쿠퍼티노에 위치한 애플 본사 공동 대표 집무실에서 욕이 터졌다.
밖에 있던 비서들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터지는 맹수의 포효였다.
견디지 못하면 기막힌 이곳을 떠나야 했다.
“내가 원한 건 원형이라고!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 기괴한 건물 건축에 내 돈을 쓰라고? 미친 거지?!”
애플 본사 디자인 팀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지금까지 수십 번 퇴짜를 맞았다.
“빌어먹을 공원이 아니라 누구나 보면 와! 하고 감탄을 터트릴 그런 멋진 녀석을 만들라고! 내 머릿속에 있는 걸 돈으로 끄집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란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스티븐.”
“당신의 디자인에는 갈망이 없어! 무모한 갈망! 그 단어 뜻을 이해 못하겠지?”
폭행죄로 고소를 당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폭력이 작렬했다.
그러나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는 애플 수석 디자이너 레이먼은 입을 다물었다.
수십억 달러짜리 공사였다.
스티븐 매튜의 집착은 공포스러울 만큼 집요했다.
며칠에 한 번씩 불려가 회의를 빙자한 폭언에 시달렸다.
스티븐은 마음에 들 때까지 디자인을 수정시켰다.
대신 그 대가로 돌아올 파이가 컸다.
성질 더러운 스티븐의 기분만 맞춰준다면 엄청난 보너스가 주어질 것이다.
“레이먼, 잘 들어요. 건물 중앙에 엄청나게 멋진 공원이 있습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둥그런 건물 안쪽에 자리 잡은 유토피아 같은 정원 말이에요. 지금껏 인간들이 창조한 그 어떤 정원도 따라올 수 없어야 합니다.”
말투가 금세 변했다.
설명하는 스티븐의 눈에 광기가 돌았다.
어떤 걸 목표로 하면 나타나는 스티븐 특유의 열정이었다.
언제 욕설을 퍼부었나 싶을 정도로 나근나근한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스티븐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병마와 싸우고 있지만 그의 정신은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괴팍하다 말하지만 스티븐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머릿속에 생각되는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넵!”
들고 온 서류에 메모를 시작하는 수석 디자이너 레이먼.
신형 아이펀도 이렇게 탄생됐다.
“벽들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모든 면이 굽어져 있어야 합니다. 단 하나도 걸리면 안 됩니다. 드넓은 우주를 항해하는 우주선을 떠올려 봐요. 심심하고 지루한 우주여행에서 직각을 만난다면 좌절할지 몰라요. 그러나 둥근 원을 계속 돌다보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끝이 없어 지루하지 않잖아요! 바로 그 점이에요! 모든 유리도 곡선으로 뽑아줘요. 빌어먹을 돈 따위는 내가 더 벌어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친절하다가 갑자기 욕을 퍼붓는 스티븐 매튜.
몇 년 동안 같이 일했던 레이먼도 이때만큼은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설계 디자인을 다시 뽑아야겠어요.”
“네? 다, 다시 말입니까?”
“원주는 1마일을 정확히 맞춰주세요. 단 한 치의 오차도 용서치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 건물에는 단 하나의 틈새나 페인트 브러시 자국도 남지 않아야 합니다. 완벽한 것을 모독하려면 당장 때려치는 게 좋을 겁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이 아니라 완벽하세요. 내가 요구하는 건 완벽! 완벽입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스티븐의 목소리는 요즘 더 커졌다.
병마가 깊어져 가는 탓이었다.
췌장암에 이어 간도 망가져 이식을 받을 예정이었다.
“실물 크기 모형을 만들어 제 허락을 맡아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알겠습니다.”
디자이너 레이먼은 등에 땀이 촉촉하게 배어나는 걸 느꼈다.
항상 스티븐만 만나면 긴장되어 수명이 단축되는 것 같았다.
디자인에 대해 광적으로 집작하는 스티븐이었다.
“건물에 들어간 가구들은 모두 수분과 당 합류가 적은 1월에 벌목된 단풍나무 녀석으로 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단풍나무 특유의 단단함과 강인한 생명력이 그대로 뿜어져 나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1월 벌목산을 말합니까?”
가장 추운 날 벌목하는 단풍나무는 가장 비쌌다.
“나무들을 재배하세요.”
“네?”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자란 나무들이었으면 좋겠어요. 정원은 언제나 마른 나뭇잎들도 덮여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정원이죠~.”
스티븐의 눈은 환상을 쫓고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살고 있지만 스티븐은 천상을 꿈꿨다.
방언이 터지듯 주문이 이어졌다.
“조치하겠습니다.”
“국립공원에서 산책한다고 생각해봐요~ 애플의 직원들이 답답할 때, 창조 능력이 바닥을 칠 때 산책하며 휴식하고 충전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어야 합니다. 레이먼……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죠?”
“상상만으로 행복합니다.”
“바로 그거예요! 모두 다 이 빌어먹을 생태계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게 제 마음입니다. 시공이나 제조 과정은 똑같아야 합니다. 레고처럼 단순하고 명확하게 한 번에 조립되어야 합니다!”
스티븐의 열정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 그려진 그의 상상속의 건물.
애플 본사에 건축에 관한 디자이너만 벌써 100명이 넘어갔다.
스티븐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했다.
쿠퍼티노 의회에 설계에 관해 허락하지 않으면 이사를 가버리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애플 왕국을 거역할 수 없었다.
“우리들만의 나무를 키워요. 아무리 부자라도 오래된 나무는 쉽게 구할 수 없잖아요? 그 자체가 얼마나 매력적인 일입니까? 우리들의 정원에서 자라게 될 수백 년이 넘는 세월을 견딘 나무……. 상상만으로도 행복하군요.”
스티븐 입가에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지붕은 태양전지로 하겠습니다.”
“오! 레이먼. 당연히 그래야죠. 더러운 석유나 미치광이들이 좋아하는 핵발전소에 의지하기보다는 태양신이 주는 축복을 마음껏 받도록 하죠. 효율 좋은 녀석들로 준비해 봐요.”
“조달자들을 닦달하겠습니다.”
“레이먼……. 당신을 사랑할 것 같군요~.”
스티븐의 변덕 넘치는 애정 표현.
“보스의 사랑은 언제나 사양입니다.”
레이먼은 이마의 땀을 훔쳤다.
이렇게 가끔 불려 나와 스티븐의 꿈 이야기를 들어줘야 함도 본인의 일 중의 하나였다.
쿡도 못 말리는 스티븐의 광기였다.
“레이먼. 수고했어요. 이번 달에 보너스를 받을 겁니다.”
“보너스는 절대적으로 사랑합니다.”
“그래요. 나가봐요. 월가의 탐욕스런 황소를 타고 나타난 투자자들을 만나볼 시간이군요.”
스티븐은 약속을 잡았다.
경기가 급격하게 위축된 상태에서 애플 주식에 투자한 투자자가 방문을 요청했다.
거절하려고 했지만 쿡이 말렸다.
“내 귀중한 시간을 빼앗아 먹는 돈벌레 같은 놈들이 무슨 일이야……. 헛소리 하는 이사회 놈들과 함께 지옥으로 꺼져버려!”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방해하는 이사회에 스티븐은 뿔이 났다.
시간이 부족했다.
영원한 제국을 세울 수 있는데 푼돈이나 벌겠다고 투자자에게 지급하라고 난리다.
“멍청한 새끼들……. 그깟 허상뿐인 돈에 미쳐가지고…….”
스티븐은 고개를 저으며 머리칼을 다듬었다.
한바탕 쏟아내자 속이 풀렸다.
“왜 상상을 못하는 거야? 너무 쉽잖아~ 설명하는데 이해를 못하다니……. 역시 난 천재야~. 흐흐.”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칭찬하는 스티븐.
[보스. 손님들이 대기 중입니다.]
인터폰으로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들어오라고 해요.”
[네~.]
“헛소리하면 바로 쫓아낼 줄 알아.”
기세등등하게 자세를 잡는 스티븐.
스르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등장하는 중년 백인 남자와 젊은 동양인 남자.
“스티븐 반가워요~. 월가의 황소를 타고 나타난 로버트 라이언이라고 합니다. 하하.”
밖에서 스티븐의 고함을 듣고도 꿈쩍하지 않던 월가 투자의 신.
“일하다 보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네요~ 로버트 반가워요. 스티븐 매튜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악수를 주고받았다.
불쾌한 말을 자신의 입으로 뱉고 또 그 말을 밖에서 들었음에도 두 사람 다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 친구는 뭐죠? 비서입니까?”
스티븐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동양인을 봤다.
“아닙니다. 이 친구는…….”
“다니엘 장이라고 합니다. 한국 투자자입니다.”
“한국 투자자라고요?”
단박에 인상이 찌푸려지는 스티븐.
요즘 한국 오정 전자에서 아이펀에 대항할 안드로이드 신형 핸드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다.
스티븐은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다.
과거 자신의 투자 제안을 거부했던 멍청한 국가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짙게 깔려있었다.
“문제 있습니까? 당신의 피라미드 같은 화려한 무덤 건축 문제처럼 저를 트집 잡으실 겁니까?”
“Wh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