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
회귀의 전설
293장. Fix You!
“정말 맛있어! 어쩜 이렇게 요리를 잘해? 취미가 요리야?”
임윤아는 젓가락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아니 멈출 수 없다는 표현이 맞았다.
태어나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처음이었다.
지방층이 적당히 섞인 돼지고기 고추장 두루치기를 상추에 싸서 입에 쑤셔 넣었다.
탄탄하고 쫀득한 껍질과 두툼한 앞다리 살코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청양고추와 고추장의 칼칼한 뒷맛이 돼지고기 특유의 비린내를 잡았다.
숙녀의 예의 따위는 멀리 치워버렸다.
시원하게 끓여진 조개가 들어간 호박 된장찌개는 일품이었다.
숟가락에 건져지는 두부는 입안에서 탱글거리며 살아 움직였다.
미국에서 이런 된장국을 먹을 거라 상상도 못했다.
달콤하고 아삭한 땅콩 호두 멸치볶음에 자꾸 손이 갔다.
입에서 씹히는 고소함과 짭조롬한 멸치는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다.
내장과 뼈까지 제거한 정성 가득한 멸치볶음은 그 자체가 사랑이었다.
푸짐하고 고소한 계란말이는 하나만 먹어도 입에 가득 찼다.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새우젓으로 밑간이 됐다.
보기 좋게 들어간 다진 파와 홍당무는 식감을 더했다.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이런 호사는 오랜만이었다.
대부분 끼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시리얼에 우유를 말아 먹고 나갔다.
부잣집 딸이라고 하루 종일 정찬을 먹는 건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수업 내용 따라가기 바빴다.
나머지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살기 때문에 커피에 도넛, 피자, 햄버거나 핫도그 등으로 끼니를 대신했다.
집에 와서 가끔 비행기로 공수된 한국 반찬을 먹지만 차려 먹기가 힘들었다.
밀린 과제를 정리하다보면 하루가 모자랐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야밤에 찾아온 세상 누구보다 반가운 사람이 앞에서 웃고 있었다.
“끄읍…….”
새어 나오는 트림을 임윤아는 손으로 가리며 최대한 억제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실수를 범한 것 같았다.
하지만 행복함은 떠나지 않았다.
오늘은 세상 무엇을 준다 해도 바꿀 수 없었다.
“여기 누룽지로 입가심.”
“태산 씨. 너무 자상한 거 아냐?”
“싫어?”
“나에게만 그런 거 아니라는 거 아니까 샘나는데?”
가벼운 질투에 남자는 웃기만 했다.
임윤아는 구수한 누룽지로 식사를 마무리 했다.
“이 고추장과 된장은 다 뭐야? 태산 씨 집에서 먹던 맛 같은데…….”
“한국에서 가져왔어.”
“저, 정말???”
“맛은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잖아.”
“우아아! 감동이야!”
임윤아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미국까지 고추장을 비롯해 식재료를 가져와 밥상을 차려주는 남자는 세상에 없었다.
마음이 더 한쪽으로 기울었다.
“커피?”
“응…….”
남자는 자연스럽게 그릇을 치웠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됐어. 오늘은 풀 서비스 받아.”
“으흐흐. 고마워~ 앞으로 많이 사랑해 줄게~”
‘당신을 위해 주식 한 주라도 더 받아내겠어!’
임윤아는 언니와 오빠의 변심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집 장가를 가면 사랑하는 이들을 더 챙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지금 같은 마음이면 저 남자를 위해서 세상에 못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깟 주식 아무 의미도 없었다.
비밀 통장에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들어 있었다.
성년이 되던 날 아버지가 챙겨줬던 외국 계좌.
할아버지가 남긴 선물이라고 했다.
언니, 오빠의 욕심이 아쉬웠다.
조금만 내려놓으면 행복할 텐데 그걸 못 한다.
솨아아아아앗.
능숙한 솜씨로 남자는 음식물을 정리하고 그릇을 닦았다.
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끗하게 그릇까지 마른 행주로 마무리하는 남자의 뒷모습은 의외로 매력적이었다.
그릇을 닦을 때 보이는 단단한 근육.
남자 품에 안겨서 잠을 잤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어머……. 나 지금……. 음란마귀가 찾아온 거야?’
임윤아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상상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오늘 밤……!!!’
임윤아는 용기를 냈다.
다 큰 성인 남녀가 알몸 상태로 침대를 뒹굴었음에도 아무 일이 없다는 건 큰 문제였다.
스르르릇.
남자는 설거지를 끝내고 드립 커피를 내렸다.
“그것도 가져온 거야?”
“에티오피아 자연산 원두야. 풍미가 남달라.”
드립 도구까지 가져와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리는 남자.
그 모습을 임윤아는 황홀한 듯 바라봤다.
‘아…… 행복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이 순간이 너무 좋았다.
커피향이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마셔봐.”
나이가 어린데도 전혀 동생 같지 않은 남자가 커피를 건네 왔다.
“흐음~ 향기가 달라.”
“드립 커피는 원두와 함께 드립하는 사람의 심성도 중요해. 차분한 성품은 커피 맛도 부드러워. 반대로 급한 사람이 내린 커피는 화기가 더해져 심장을 자극해.”
“진짜?”
임윤아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음식 맛이 손맛이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하면 돼.”
“아~”
남자의 친절한 설명에 임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맛은 뭐야? 부드러우면서도…….”
임윤아는 뒷말을 뱉지 못했다.
부드러운 커피 맛 속에 담겨 있는 따뜻한 그 무엇.
“당신을 향한 내 마음.”
“…….”
닭살 오글거리는 멘트를 서슴없이 날리는 남자는 전혀 천박하지 않았다.
패션 스타들만이 소화할 수 있는 특이한 옷차림과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아…….”
밥과 후식으로 커피까지 마시자 임윤아는 긴장이 탁 풀렸다.
오랜만에 맛보는 진한 휴식.
임윤아는 옆에 앉아 있던 남자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사랑하는 온기를 아낌없이 나눌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응? 어…….”
“뭐?”
남자는 임윤아의 상태를 귀신 같이 알아챘다.
“논문 때문에 머리 아파. 동양, 그것도 한국 미술사로 석사 학위 준비하라고 지도 교수님이 말했어. 그런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한국 미술사? 대충 생각해 본 인물은 있어?”
“……취화선을 할까 생각 중이야.”
“뭐……. 취화선?!”
***
갑자기 분위기 확 깼다.
하필 골라도 취화선 삼촌을 논문 주제로 삼은 임윤아.
그녀를 위해 서울 집에서 어머니표 각종 음식 재료를 공수했다.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한 공수는 문제없었다.
로버트가 미국 정부에 줄을 댔는지 입국 시에도 외교관급 프리패스였다.
어제 파티는 성대하게 끝났다.
처음 시작은 미약했지만 마지막은 온전하게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베토벤이 작곡한 ‘바람이 그리운 날’이라는 바이올린 소나타.
신계에서 빡시게 살던 그가 인간계를 생각하며 쏟아낸 작품 중 하나였다.
자유를 갈망하는 신계의 하루살이 베토벤의 의지가 그대로 투영 됐다.
내공을 사용해 사람들을 뻑 가게 만들었다.
음률 하나하나에 모두 기를 담았다.
넓은 파티장을 바이올린 음이 휩쓸고 돌았다.
연주하던 악단들이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눈치 빠른 사라 요한슨은 나의 거절 의사를 바로 알아챘다.
우연히 만났지만 예전 만남처럼 호기심에 사고를 치고 싶지 않았다.
비즈니스와 함께 임윤아를 보기 위해 찾아온 미국이다.
사라와 뜨거운 밤을 보냈지만 그건 과거의 일.
자유로운 바람을 붙잡지 말라는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당신이 원한다고 언제나 품에 안길 수 있는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 표현했다.
그날 새벽에 사라가 연락처를 남겼다면 모를까.
사라와는 와인 몇 잔을 더 마셨다.
그녀가 연락처를 알려줬다.
언제든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도 들었다.
유치한 것 같지만 처음 시작부터 뜨거웠기에 예의가 필요했다.
로버트에게 사라 요한슨이 정계 권력자인 리처드 요한슨 상원의원의 딸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로스차일드 방계 가문이라는 정보는 덤이었다.
상대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로스차일드 가는 세계 부를 움켜쥔 인간계의 신급이었다.
사라를 우연히 만났지만 그 또한 신들의 계획일지도 몰랐다.
물론 인간인 나와 사라의 선택이 작용한 건 사실이다.
뭔지 모르지만 끈끈한 전생 인연이 감지 됐다.
“왜? 취화선에 대해 알아?”
임윤아가 물어왔다.
바보가 아니기에 내 반응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 같았다.
“오원 장승업을 모르는 한국인은 드물지 않을까?”
“그렇지? 그런데 생각보다 자료가 빈약해. 영화나 사료집에 나온 것처럼 정말 바람둥이였을까? 일세를 풍미했던 장승업……. 취화선이라는 별명처럼 신이 되었겠지?”
취화선은 알면 알수록 피곤해진다고 말하지 못했다.
바람둥이는 정확히 꿰뚫었다.
세상은 넓고 노바 형님이나 취화선 같은 분들도 많았다.
“신이 되었을 거야……. 그런데 큰 신은 못 됐을 거야.”
더러운 성질 머리로 겨우 노가다 십장 신으로 살던 취화선 삼촌이었다.
오직 나만 아는 비밀이었다.
“응? 왜?”
“바람둥이잖아. 사건도 많이 치고 그 시대의 이단아 같은 분이 좋은 일 많이 했겠어? 여자들 치마폭에 술값으로 그림이나 그려주던 분인데…….”
그 덕분에 신이 되었을 수도 있다.
천시되었던 기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과 어울렸던 괴짜 취화선이었다.
“그래도 멋있잖아~ 편안 일자리가 널린 궁중을 걷어차고 세상 한바탕 진하게 살다 갔잖아~. 자유로운 영혼이지 않아? 태산 씨처럼~.”
“…….”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임윤아는 임성철 회장을 닮아 사람 볼 줄 안다.
“큼큼. 그런데 어떤 자료가 부족해? 내가 취화선 삼촌, 아니 그분에 대해서 좀 많이 알아.”
임윤아를 돕고 싶었다.
과거라면 지금쯤 세상을 하직하고 없을 그녀다.
치아가 가지런히 드러나는 맑은 웃음이 아름다웠다.
저승사자의 기운은 그녀 주변에서 거둬지고 없었다.
자신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걸 그녀와 주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운명은 언제나 바뀔 수 있었다.
타인을 사뿐히 즈려밟기 좋아하는 인간들은 제 운명대로 살 수 없다.
괜한 것에 화를 내고 똥고집을 부리는 이들에게는 평소 행동과 말처럼 악한 기운이 주변으로 몰려들어 맴돈다.
평소 본인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나 액션, 소품마저도 그 사람의 성품 그대로를 반영한다.
어두운 낱말이나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은 가까이 하면 안 된다.
악은 악을 부르는 법이다.
본인들은 모르겠지만 그게 다 오염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임윤아도 고통과 좌절이 더해졌다면 죽음의 강을 건넜을 것이다.
Fix You.
지금 난 임윤아를 치료하는 과정을 밟는 중이다.
그래서 어려운 걸음으로 이곳까지 찾아왔다.
하룻밤 인연도 절대 가볍지 않았다.
엄마와 아버지, 쌍둥이 여동생들은 아가와 언니 보고 싶다가 난리다.
오정 그룹의 귀한 막내딸이라는 걸 가족들은 전혀 몰랐다.
“화풍을 알고 싶은데 그림 자료가 부족해. 취화선의 초기부터 중기, 말기까지의 화풍만 파악해도 여한이 없겠어.”
임윤아는 나를 상대함에 있어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처음 만날 때부터 친구들에게 술을 쐈던 임윤아.
그녀만이 갖고 있는 내면의 빛깔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다만…….
“도와줄까?”
“뭘? 태산 씨가 도와줄 일이 뭐가 있어?”
세상에 나보다 취화선 삼촌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화풍에 대해서라면 입이 아팠다.
머릿속에 기록되어 있는 취화선의 수많은 그림들.
신계에서 최신작품까지 섭렵하고 왔다.
“집에 수묵화 그릴 재료 있어?”
“있긴 한데…….”
미술사 전공자답게 재료들도 상시 준비되어 있는 것 같다.
집 안 곳곳에 그려져 있는 평범하지 않은 그림들은 임윤아 작품 같았다.
간간이 수묵화도 보였다.
기본적으로 미술을 사랑했기에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단아하고 어여쁜 임윤아와 어울렸다.
“삼인문년도, 운림세동도, 난적청산, 호취도, 방황자구법산수도~ 아무거나 골라~ 내가 말이야. 역관 집에서 많이 보고 배웠지. 짱개들 북송화니 남송화를 닮았다고 지랄들 하는데~ 난 나일뿐이야. 우리 민족, 내 정서를 담아왔다.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나의 길을 걸었어!”
아…… X바 왔다. 그분!
취화선을 떠올리며 그 그림을 점검하던 중, 임윤아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있던 취화선 삼촌에게 전달돼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벌어진 사댤.
임윤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변한 내 말투와 분위기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처자……. 사발에 시원하게 그것 좀 따라와 봐.”
“어? 네? 뭐, 뭘요?”
임윤아가 당황하며 말투를 달리 사용했다.
“그거 있잖아~ 양놈들이 마시는 시큼 털털 포도로 만든 담금주~.”
“……와, 와인요?”
“그래 그거 대접에 한 잔 다뿍 따라와. 오늘 이 오빠가……. 화끈하게 그려줄게~ 흐흐.”
오빠란다!
아!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술과 그림, 여자를 좋아하는 화선이 삼촌.
오늘 제대로 필 받았다.
임윤아를 바라보는 끈적끈적한 눈빛.
이대로라면 오늘 제대로…… 사고 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