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2화 (291/1,284)

 # 292

회귀의 전설

292장. 뉴욕 파티 (3)

치링 치링 치리리리리~링~♬

초가을 저녁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로버트 라이언의 별장.

담소를 나누며 파티를 즐기던 손님들은 귀에 들려오는 부드러운 바이올린 선율에 귀를 열었다.

요 근래 열렸던 뉴욕 파티 중 최고였다.

바다가 보이는 넓고 쾌적한 정원은 여름이 물러난 대서양의 장점을 그대로 보여줬다.

바람은 시원했다.

취향에 맞춘 각종 와인들은 한 병에 1000달러 이상이 분명한 퀄리티를 맛보여줬다.

호텔에서 파견된 요리사와 전문 웨이터들은 파티의 수준을 높였다.

일류 쉐프들이 눈앞에서 직접 조리했다.

깔끔한 웨이터들은 손님들 사이를 누비며 눈높이에 맞게 부족한 것들을 채웠다.

넘치는 유명인들은 참석자들의 자부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형성되는 인맥은 불안한 미래의 생존을 보장했다.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속으로는 정보 수집에 다들 열을 올렸다.

치열한 스파이 전쟁터 같은 상류층들의 파티.

처음에는 조용했던 바이올린 소리가 차차 모두를 사로잡았다.

넓은 정원 곳곳까지 정확하게 전달됐다.

VIP 로얄석에서 청음하는 것처럼 귓가에 파고드는 바이올린 소나타.

“…….”

소란 소란하던 대화가 점차 줄어들었다.

사라사테의 인간 감정을 깊숙이 자극하는 지고이네르바이젠 같은 진한 선율.

사람들은 조용히 입을 닫고 자신들도 모르게 무대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슈트 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지그시 눈을 감고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날렵한 키와 어울리는 완벽한 자세.

활대를 따라 섬세한 소리가 바람을 탔다.

남자 주변으로 음표가 떠다니는 환상이 보였다.

개성 넘치는 소나타 독주곡이었다.

악장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웠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불규칙적인 바람을 닮은 듯 바이올린 선율은 정형화되어 있지 않았다.

띠리리 치링~♪ 치르르르르르~♬.

음악 속에 문학이 결합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누구에게 시로써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이 그려졌다.

갑작스런 첫 만남과 달콤했던 밀어의 시간, 그리고 찾아온 폭풍 같은 사랑의 언어가 바이올린 연주로 표현되고 있었다.

“아…….”

“하아…….”

듣고 있던 여성들 입에서 뜨거운 감탄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바이올린 연주자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들려오는 음률들이 온몸을 터치하는 듯 에로티즘을 맛봤다.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음률이 주는 황홀감.

여성들 얼굴에 짙은 홍조가 깃들여졌다.

“으음…….”

그에 반해 남성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로버트 라이언과 함께 등장해 눈길을 끌었던 이십 대 초반의 멋진 동양인.

잘생김은 동서양을 구별하지 않았다.

파티에 참석한 누구보다도 모든 면에서 훌륭했다.

가까이 가 보려 해도 누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리처드 요한슨 상원의원의 딸 사라 요한슨이 다가갔다.

담소를 나누던 두 사람.

와인을 마시던 남자가 갑자기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했다.

초청한 악단이 잠시 쉬는 틈을 타 악기를 빌렸다.

처음에는 흥에 겨워 한 곡 뽑으려는 줄 알았다.

상류층들 중에 가끔 악기에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어릴 적 교양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필수로 습득해 놓았다.

그러나 남자의 연주 실력이 달랐다.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가 초청된 것 같았다.

지그시 감은 눈, 불빛에 반사된 얼굴 라인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했다.

처음 들어보는 곡은 감미로우면서 열정적이었다.

누가 들어도 최고의 감동을 맛봤다.

‘세상에……. 우리 대표님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경계심을 바짝 세웠던 도도희는 깜짝 놀랐다.

투자 회사를 운영하는 수단과 언어 실력만으로도 경악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음악에도 조예가 있음을 확인했다.

미국 유명 음대생도 저렇게 악보 없이 소나타를 연주하지 못했다.

악보를 통째로 외워 연주함이 분명했다.

흐름이 자연스럽고 음도 이탈하지 않았다.

즉석에서 기분에 취해 연주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때 클래식에 심취했었던 도도희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갑자기 나타난 사라 요한슨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순간의 감동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로 감정을 점령당해 버렸다.

대표 곁에서 떠나지 못할 또 하나의 이유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에 누가 있어 저렇게 잘나고, 돈 많고, 예술적일 수 있단 말인가.

도도희 입술에 조용한 미소가 피어났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 더 장태산 대표와 가까운 자신이 자랑스러워졌다.

‘으아아아……. 죽이네!’

클래식에 문외한인 김한별도 감동을 느끼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미친 분위기빨에 음악빨도 더해졌다.

낯선 미국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대표에 질투와 감시보다는 그럼 그렇지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던 김한별이었다.

눈 높은 타샤도 한눈에 호감을 보였던 제비계의 끝판왕 장태산 대표.

클럽에서도 대표 옆에서 땀나게 몸을 비비던 여우들의 표정을 이곳에서도 여실히 봤다.

고상한 척 내숭을 떨지만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상대해 봤던 전직 가이드 눈에는 그들의 심리가 훤히 보였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장태산 대표에게 뻑 가 있었다.

클래식 초짜인 김한별 귀에도 감동할 만한 감미로운 음악이었다.

별이 총총히 떠오른 바닷가 별장 파티에 잘 어울렸다.

처음부터 이 곳, 이 자리, 이 분위기를 위해 완성한 곡 같았다.

김한별도 다른 이들처럼 눈을 감았다.

뭔지 몰라도 심장과 영혼을 간질이는 바이올린 선율의 진한 맛이 눈을 감게 했다.

김한별이 클래식에 감동해 버린 첫 경험의 순간이었다.

‘보스……. 당신은!’

로버트 라이언도 다를 바 없었다.

파도 파도 그 능력의 끝을 알 수 없는 동양의 신비인 보스.

나이와 상관없이 엄청난 투자 실력을 갖췄다.

월가 투자의 전설이라 불리는 로버트 라이언은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보스를 대신한 아바타지 결코 1인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보스가 신이라면 로버트 자신은 일개 하찮은 추종자에 불과했다.

지금 보여주는 음악 실력도 엄청났다.

뉴욕에 살면서 얻게 된 예술적 교양에 비춰볼 때 저 정도 연주 실력이라면…….

‘탑이다! 그것도 원 탑!’

부정할 수 없는 월등한 실력을 보여주는 다니엘 장 보스.

주변인들 모두 입을 다물고 예의 바른 청취자가 됐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이 순간.

침묵만이 예의였다.

“하아아……. 당신…….”

사라 요한슨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만난 남자를 유혹했다.

살면서 이렇게 먼저 손을 내민 적이 거의 없었다.

저 남자 앞에서만 가능했던 일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와인 한 잔 마시자는 간접 메시지에 남자는 빙긋 웃기만 했다.

그날 밤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검은 보석 같은 맑은 눈으로 자신을 그윽이 바라보던 남자는 말없이 무대로 향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닮은 신들린 바이올린 연주.

거절이었다.

다른 여성들은 황홀함에 젖어들었지만 사라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었다.

자신이 말없이 떠났던 그날 밤에 대한 복수(?)였다.

오늘은 너와 함께하지 못한다.

바람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당신도 그러하다.

난 스스로 자유스러운 바람 같은 남자.

붙들려 하지 말라.

난 그렇게 쉬운 남자가 아니다…….

남자는 바이올린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었다.

‘가지고 싶어……. 더!’

차오르는 벅찬 감동과 불붙는 소유욕.

사라 요한슨은 왼손을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꽉 움켜쥐었다.

“베토벤 재림자!”

“아아! 맞아! 베토벤 재림자야!”

어느새 끝난 바이올린 연주.

그때 귓속을 파고드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제야 파티에 참석한 이들은 자신들의 귀를 호강시켜 준 연주자가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베토벤의 재림자라는 걸 알아챘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브라보~ 브라보! 판타스틱 어메이징!!!”

짝짝짝짝짝짝짝.

환호성과 함께 터지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

다니엘 장이 능숙한 바이올리니스트처럼 고개를 숙이며 열렬한 환호를 즐겼다.

그때 사라와 마주친 다니엘의 눈빛.

사라는……. 환하고 짙은 매혹적인 미소를 함빡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으으…….”

오정 그룹의 막내 딸 임윤아는 피곤함에 힘든 신음을 뱉어냈다.

정신적 피로감이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미국 예일 대학원 미술사 석사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하버드 경영학과를 졸업했기에 다른 이들보다 몇 배나 힘들었다.

대학 시절 부전공으로 학점과 기본기를 다져놓았기에 망정이지 큰 낭패를 볼 뻔했다.

차라리 하버드 시절에 시간이 더 남았다.

석사 과정은 이론 밑바탕에 본격적인 실기가 더해졌다.

매일같이 미술에 관한 역사, 인물 그리고 작품에 대한 해석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논문 제출 기한이 점점 다가왔다.

특별한 그 무언가를 노렸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미술사에 감춰진 역사적 비밀 사건을 얻고 싶어 도서관에서 살았다.

그러나 인간들의 노력은 임윤아보다 더 독하고 뛰어났다.

맛있는 먹잇감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한국 미술사를 연구해 볼까? 오원 장승업 같은 인물이 좋을 것 같긴 한데…….”

지도 교수도 넌지시 방법을 제시했다.

세계 미술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미술인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취화선이라 불리는 오원의 미술 자료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미녀들을 희롱하기 좋아했던 희대의 풍류남 취화선.

그가 남긴 그림과 화풍은 학생 신분인 임윤아가 쉽게 접할 수 없었다.

어머니 미술관에도 취화선의 작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름 품격을 따지는 어머니 취향 때문에 더 그랬다.

‘한국에 한 번 가봐?’

귀국 욕구가 훅 치솟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국만 생각하면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임윤아였다.

성인이 된 이후 분열된 형제애.

미혼인 임윤아는 언니들의 변심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언니들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한국에 자주 가고 싶었다.

지금도 비행기 표를 끊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 남자를 만난 이후 삶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가씨 쉬십시오.”

“수고했어요.”

학교 출퇴근 담당 보디가드 두 사람이 맨션 1층 주차장에서 인사하고 돌아섰다.

학교가 위치한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에서 가장 비싸고 안전한 맨션에 거주 중인 임윤아.

무장 경비원들이 자체 경비 시스템을 가동했다.

지금도 맨션 정문에서 두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맨션 건축 이후 도둑 한 번 들지 않았을 만큼 완벽한 경비를 자랑했다.

스르르릇.

임윤아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10층 가장 높은 층 버튼을 눌렀다.

“태산……. 나빴어~ 맨날 바빠. 전화도 띄엄띄엄~ 문자도 그렇고! 바람둥이 취화선과 삼촌 조카하면 아주 그럴싸하겠네~.”

아버지 임성철도 넌지시 말했다.

앞으로 큰 사업할 남자라고 말이다.

큰 사업 하는 남자 중에 한 여자에게만 충실한 남자는 없다는 걸 임윤아는 잘 알고 있었다.

이해는 하지만 현실은 서운했다.

며칠에 한 번 통화하고 문자는 하루에 한두 통이 전부였다.

“하아암~”

긴장이 풀리자 임윤아는 길게 하품을 했다.

꼬로로록.

저녁에 먹은 빵 한 조각와 커피 한 잔이 전부였던 임윤아는 배가 고팠다.

친구도 많지 않았다.

특히 야심한 시각에 만나 배고픔을 해결할 친구는 더더욱 없었다.

“어머님이 해주던…… 두루치기가 먹고 싶다……. 시원한 맥주도……. 으으으! 쌀밥에 김치……. 고기!”

임윤아는 장주시에서 자신을 아가라고 불러주던 태산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시골에 머물면서 맛봤던 음식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신비주의 오정의 어여쁜 막내딸이지만 미국에서는 외로운 학생 신분이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경쾌하게 울렸다.

10층에 거주하는 사람은 임윤아뿐이었다.

전망 좋은 120평의 펜트하우스는 그녀가 오정의 막내딸로서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띠디띠디딕.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응?”

문을 열자마자 코끝을 자극하는 고소하고 매콤한 음식냄새가 났다.

“누, 누구세요? 엄마?”

임윤아는 깜짝 놀랐다.

분명 맨션 입구는 경호원이 지키고 있었다.

비밀번호를 알아야만 입실할 수 있는 자신의 공간.

떨리는 마음으로 임윤아는 부엌 쪽을 바라보며 어쩌면 하는 생각으로 엄마를 찾았다.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은 찾아오는 엄마였다.

탁탁탁 타다닥.

하지만 대답대신 요란한 칼질이 들려왔다.

이해가 안 가는 상황.

1층으로 도망칠까 하는 생각을 하던 임윤아.

갑자기 어떤 순간이 떠올랐다.

얼마 전 자신에게 비밀번호를 물었던 한 사람.

타다다다닥.

임윤아는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부엌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우와아아아아아!”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에이프런을 두르고 활짝 웃는 남자의 품을 향해 힘껏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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