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
회귀의 전설
289장. 쇼핑하러 가다 (3)
‘와우!’
도도희는 대표의 강한 어조에 내심 놀랐다.
포드 재무담당 수석이사 직급이라면 한국에선 사장급에 해당한다.
포드 자동차 그룹의 재무에 관한 모든 권한이 재무담당 수석이사인 그에게 있었다.
이사들과 투자자들을 설득하고 자금을 계획 집행하는 자였다.
평소 포드의 운영 스타일이라면 투자 회사 임원들이 도리어 고개를 숙였다.
저들이 움직이는 한 해 자금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오늘은 사정이 많이 달랐다.
미국 3대 자동차 회사 사장급 인사에게 도산 일보 직전 회사라고 일갈해 버리는 장태산 대표의 뼈아픈 한 마디.
제프 도넬리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변했다.
도도희는 저렇게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해 버리는 남자 처음 봤다.
월가에서는 직원을 쫒아낼 때도 최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력은 뛰어나나 회사와 맞지 않는 게 유감이라고까지 말한다.
앞으로 미래를 축복할 테니 후에 좋은 기회에 보기로 하자는 식이다.
말은 정중하고 예의 있게 건네지만 사실 동료로 함께 일하는 걸 거절하는 것이다.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고 혹 불만을 품고 총기를 휴대하고 있다 등 뒤에서 갈겨 버릴 수 있는 곳이라 최대한 말을 조심해야 했다.
“퐈이어!”를 외치는 일방적 해고 방식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도도희는 눈앞에서 실제 그런 상황을 목격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카리스마가 쩌는 대표 장태산.
미국 자동차 회사 거물 앞에서 위축되는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아니 비웃음 가득한 표정이 차라리 압권이다.
절대 갑의 여유 같은 것이었다.
‘로버트도…… 꿈적도 안 하네.’
월가의 전설적 투자자도 장태산 대표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이다.
두 사람이 쿵 짝이 잘 맞았다.
쾅!
“지, 지금 당신은 나와 회사를 모욕하는 거요!!!”
제프가 탁자를 주먹으로 때리며 흥분했다.
씩씩거리는 얼굴이 당장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왜 모욕이라 생각하십니까? 자금 안 필요하세요? GM과 크라이슬러 재무팀은 내일 예약되어 있는데……. 양보하시겠습니까?”
“!!!”
타 자동차 회사를 언급하자 제프가 당황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니라……. 표현이…….”
제프가 거짓말처럼 바로 얌전해졌다.
‘푸하하하하.’
도도희는 은근히 통쾌함을 맛봤다.
월가에서 근무할 때 대기업 소속 임원들은 한국 그룹 임원들 못지않게 고개가 빳빳했다.
고위급으로 임명되는 순간 미국에서도 인생이 극과 극으로 달라졌다.
인센티브가 보장되면서 회사 비밀을 알게 되고 연봉도 몇 배 이상으로 뛴다.
그러다 보니 덩달아 자존심이 강해졌다.
그런 과정을 거쳐 왔을 포드의 재무담당 수석이사가 오늘 이 순간만은 아주 유순한 양이 됐다.
‘우리 대표님 사람 들었다 놨다 재주 있다니까~.’
어린 만큼 사회 경험이 적을 텐데 저 모습을 보고 누가 스무 살 미성년자라고 믿겠는가.
타이 없는 반팔 셔츠 차림은 다시 봐도 프리 한 스타일로 멋졌다.
큰 키에 날렵한 몸매.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과 자신감 가득한 음성은 거래 상대방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동료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남자였다.
도도희와 로버트, 김한별은 긴장 싹 풀고 의자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관전 모드를 작동했다.
***
지금 나랑 장난해?
미국 자동차 회사들 곧 줄줄이 곡소리 난다.
잘나갈 때 외국계 자동차 회사들을 거침없이 흡수했다.
GM은 한국 대웅자동차를 품고 쪽쪽 단물을 빨아 마셨다.
중, 소형차에서 강점을 보인 대웅 자동차는 헐값에 GM의 캐시 카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소형차도 없고 연비 개판인 미국 차의 약점을 보완해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 대웅 차가 GM 이름으로 팔렸다.
포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적 불황 시기에 자동차 그룹들을 폭식했다.
볼부를 비롯해 자규어, 랜드러버, 에스턴 마린 등 각종 브랜드를 집어 삼켰다.
모든 사람들이 미국 자동차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하지만 탈이 난다.
능력도 안 되는 녀석들이 너무 많은 걸 집어 먹었다.
자동차에 관해 생각하는 철학도 다르고 메이커 생산 국가의 문화도 확연히 달랐다.
그걸 무식하게 한입에 털어먹고 믹스하려던 세기의 장사꾼들이 벌을 받는다.
“소문에 듣기로 회사 유동자금이 바닥이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적을 몰아붙일 때는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져야 하는 법.
“무슨 소립니까? 모기지론 여파로 조금 힘들지만 그렇다고 바닥은 아닙니다. 1903년도부터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온 포드에 대한 모욕입니다!”
강한 반발로 무마하려는 어리석은 수법이다.
이미 제프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말과 알고 있는 사실이 다를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정부에 구제금융을 비밀리에 신청하셨습니까?”
“흐헉!”
직구에 놀라 비명을 토하는 제프 도넬리.
놀랐지?
아직 외부에는 비밀로 취급되는 극비 내용이었다.
다음 달이면 모든 신문들이 대서특필할 엄연한 사실이지만 말이다.
“노조 퇴직자들 의료보험 지급과 높은 인건비, 판매부진으로 인해 적자가 심각합니다. 앞으로 채무 상환을 비롯해 만기 연장을 위해 포드 운영자금으로 수백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내용도 제가 알고 있는 게 틀립니까?”
미래에서 알고 온 명확한 팩트로 몰아붙였다.
제프가 로버트를 돌아봤다.
네가 불었느냐 묻는 눈빛이다.
“제프~ 나 생각보다 똑똑한 사람 아니야. 그런 식으로 바라봐도 내가 해줄 말이 없어. 여기 다니엘의 판단 능력은 나보다 월등해~.”
로버트가 손을 들어 보이며 아니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구제금융 얘기는 오늘 처음 들었어~. 알았다면……. 당장 투자한 주식을 뺏을 거야.”
주식도 없으면서 과한 엄살을 떠는 로버트.
함께 다니면서 내 스타일에 많이 물들었다.
“순수한 제 정보력입니다. 서브 프라임 위기가 극렬하게 준동하는 이 시기에 기름 잡아먹는 하마가 소비자에게 먹힐까요? 아직도 빅3는 상명하복식 경영 패러다임이 존재하더군요. 시대 변화에 아주 둔감하고 노조는 생존 위기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파산이죠.”
이럴 때 빙긋 웃어주는 게 포인트다.
한 번 구겨진 제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핵심을 찌른 공격에 더 이상의 방어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미국 제조 산업의 심장으로…….”
“공화당 쪽에서 구제금융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정권 말기에 접어드는 이때에 독이 든 맹물을 마시고 싶을까요? 소비자로부터 외면 받고 노조는 개판인 빅3를……. 정치인들은 저울질하기 바쁩니다.”
“하아아…….”
제프는 당혹, 경악, 한숨과 침묵으로 자신의 심정을 대변했다.
미국 자동차 산업 발전의 영웅이라 불렸던 조지 룸니는 1950년대부터 콤팩트 카 개발에 집중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빅3는 싼 기름값을 믿고 덩치 크고 무식한 아메리칸 스타일을 고집했다.
그리고 일본차에 밀려 큰 위기에 처한다.
물론 포드는 미국 자동차 회사들 중에서는 양반이다.
위기가 닥치자 바로 덩치를 줄였다.
기다렸다는 듯 브랜드들을 과감하게 바겐세일하며 팔아치웠다.
랜드러버와 자규어를 인도에 매각했다.
마쯔다 지분도 신속하게 팔아먹었다.
그리고 내가 찜하러 찾아온 볼부도 짱개들에게 판다.
그걸 막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직접 온 것이다.
짱개가 볼부를 통해 기술을 축적하고 2020년 세계를 위협했다.
더 이상 품질과 안전이 개판인 차가 아니게 됐다.
저렴한 가격으로 세계 시장을 점령해 나가는 볼부.
대한민국도 2018년도에 중국산 볼부를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저렴한 가격을 메리트로 시장을 잠식하던 볼부.
과거로 돌아와 그걸 막고 싶었다.
안타까운 마음도 가득했다.
연대 자동차가 10조를 들여 쓸모없는 강남 땅을 구매하기보다는 이때 2조 정도로 볼부를 구입했다면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달라졌을 것이다.
연대가 부족했던 인간안전중심의 자동차 공학 기술을 습득하는 게 가능했다.
한 시대를 앞서는 안전기술과 자율주행기술도 볼부는 소유하고 있었다.
연대의 실수는 대한민국의 뼈아픈 후회가 됐다.
그런 의미에서 볼부는 반드시 잡아야 했다.
도도희도 자동차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매해야 할 회사로 보고했었다.
만수르가 축구클럽을 소유하듯 나도 자동차 회사를 구입하고 싶었다.
내가 몰아보고 싶은 차를 뽑아낼 수 있는 자가 자동차 회사.
그 꿈을 위해 오늘 귀한 걸음 했다.
“그,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투자 조건으로 우리 지분이라도 넘기라는 겁니까?”
풀이 죽은 제프.
“지분요? 지금요?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미친 듯 웃었다.
망하는 회사를 지분을 주고 인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제프. 농담도 지나치면 실례입니다. 제프 같으면 돈 주고 포드 회사 주식을 구입하겠습니까?”
웃으며 물었다.
물론 제프는 입을 다물었다.
상식적이지 않았다.
“우리 포드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런 위기를 수없이 넘기고 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남을 겁니다!”
자존심이 상한 듯 으르렁거렸다.
맹수의 마지막 발악 같았다.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정치인들이 멍청하지 않다는 건 우리 모두 알지 않습니까? 디트로이트를 포기하고 대통령이 된 이들은 드물죠~.”
“???”
“그래서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뒷말은 아꼈다.
“로버트 진짜 이 친구와 자네가 원하는 게 뭐야?”
제프가 로버트를 물고 늘어졌다.
명확하게 나의 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파시죠.”
“뭘 말입니까?”
“정치권을 움직이려면 유권자가 납득할 수 있는 조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몸에 달고 있는 쓸모없는 장식품들을 정리하는 게 1순위죠.”
“……우리가 소유한 귀중한 브랜드를 노리고 있었군요.”
“귀중하다는 단어보다는 거추장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군요. 어차피 내부적으로 정리하려고 마음먹고 있지 않았습니까? 단지 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와 당황한 것이구요.”
“!!!”
제프가 입을 벌린 채 날 봤다.
자신들의 미래를 이미 훤히 보고 온 내 앞에서 통밥 굴려봐야 서로 불편했다.
하지만 오늘 끝을 보기에는 때가 아닌 것 같았다.
포드 내부에서 브랜드에 대한 정리가 확실하게 안 된 듯했다.
아직 뜨거운 맛을 덜 본 것이다.
노조 정리에도 시간이 좀 필요했다.
한 달이면 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빅3는 무참히 무너졌다.
“뭘 노리는 겁니까?”
제프가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물어왔다.
미끼를 물었다.
“볼부를 파십시오.”
“음……. 볼부는 우리 포드의 자회사로서 중요한 계열사입니다. 쉽게 매각할 수 있는 회사가 아닙니다.”
단박에 고개를 젓는 제프.
매각가를 높이려는 수작이었다.
중요하다면서 투자에는 인색했다.
볼부는 스웨덴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가며 운영했다.
전형적인 양치기 미국 형님들의 수법이었다.
어차피 미국 스타일과 맞지 않는 볼부였다.
폼 나고 튼튼한 차를 만드는 미국과 안전과 격조가 높은 볼부는 매치가 안 됐다.
“오늘은 더 이상 대화가 안 될 것 같군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제프~.”
길게 끌어봐야 더 이상 답이 안 나왔다.
이런 거래는 보통 몇 달에서 몇 년 동안 협상을 통해 이뤄짐이 일반적이었다.
자리에서 가뿐하게 일어났다.
앞으로의 협상을 위해서라도 이런 냉정한 자세가 필요했다.
쇼핑을 원하지만 요구하는 대로 돈을 처박고 싶지 않았다.
자동차 산업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자긍심이 강하게 작용하는 사업이었다.
돈질 하다가는 역풍에 얻어맞을 수도 있었다.
미국 경제가 더 흔들리고 구제금융이 휩쓸 때가 곧 찾아온다.
그때 로버트를 통해 싹 쓸면 그만이다.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판이 제대로 깔려야 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주식시장을 교란할 수 있지만 참았다.
어차피 쓰러질 놈에게 어퍼컷을 날리고 싶지는 않았다.
알아서 무릎 꿇을 적.
오늘은 맛만 보여줬다.
드르르륵.
도도희와 김한별도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들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나이는 내가 더 어리지만 오늘 이 자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로버트는 남았다.
제프를 다독이고 나머지 판을 마저 깔아야 했다.
철저하게 분업화된 사기 집단 같았다.
“왜 볼부를 원하는 겁니까! 한국은 자동차 강국입니다. 시장이 작아 볼부를 품기에는…….”
자리에 앉은 채 돌아서는 나에게 볼부를 왜 노리느냐 묻는 제프.
“제프~ 당신은 취미 생활도 광고하고 시작합니까?”
“네?”
씨익.
더 이상 답변은 어리석었다.
활짝 웃는 미녀들과 함께 돌아서 퇴장했다.
로버트가 준비한 빡빡한 저녁 스케줄.
그 시간을 위해 미녀들과 뉴욕 거리를 누비며 쇼핑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