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9화 (279/1,284)

 # 279

회귀의 전설

279장. 다시 만난 형님

사비나는 당황스러웠다.

백작이라는 엄청난 작위와 어울리지 않을 만큼 동안이었다.

사비니가 지금껏 만났던 영주들 중에 가장 어렸다.

그러나 능숙한 언변과 자연스러운 행동은 노련한 귀족 같았다.

‘귀족가의 혈통이 분명해.’

말투와 행동을 보면 귀족가의 여러 교육을 받은 귀족 출신이 확실했다.

사비나는 놀라는 와중에도 영주를 자세히 살폈다.

이제 갓 성인이 되었다고 할 만한 얼굴이었다.

거기에다 대륙에서는 보기 힘든 흑발이었다.

완벽한 흑색은 아니었지만 저 정도 검은 빛은 보기가 힘들었다.

얼굴도 꽤 준수했다.

행동도 기품이 넘치고 경망스럽지 않았다.

요즘 보았던 그 어떤 귀족보다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미모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았다.

피 끓는 젊은 사내라면 사비나를 보고 눈빛이 흔들리는 등 뜨겁게 반응했었다.

‘정체가 뭘까?’

정령 소환 가능한 특이한 마력 전투사였다.

사비나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제국이 분열 된 후 수백 개의 귀족 가문과 수많은 기사들이 새로 태어났다.

작위가 마구 남발되면서 귀족들도 누가 진짜 귀족인지 모를 개족보 상태에 이르렀다.

실력만 있으면 기사나 영주가 되는 등 원칙이 무너지고 지켜지지 않았다.

혼란한 대륙은 능력자들을 위한 무한 발판을 제공했고 또 그렇게 흘러갔다.

‘마력석은……. 어디에 사용하려는 거지?’

싱싱한 마력석과 달리 폐 마력석은 마력석 본연의 능력에 5분의 1로 효과가 줄어든다.

마법사들이 연구용으로 사용하거나 귀족 가문의 충전용 등불이나 주방에서 사용되는 게 고작이다.

마력에 마나를 불어 넣는 하급 마법사들이 있을 정도였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용병들도 호기심에 마력석을 무기에 박아 넣는 경우도 있었다.

길가의 돌덩이만큼은 아니지만 제국에 퍼져 있는 폐 마력석 양은 상당히 많았다.

“내가 요청했던 폐 마력석은 준비 됐습니까?”

영주가 물어왔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100여 개 밖에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상단에서 마탑에 연락을 취하는 중입니다. 다음 상행에서는 원하는 만큼 폐 마력석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비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제국 멸망과 동시에 황실이나 귀족에게 물건을 대주던 드워프들이 계약을 끊었다.

신뢰를 쌓기 힘든 드워프를 비롯한 이종족은 경계심이 매우 높았다.

제국이 설립되기 전에는 인간들과 전쟁까지 벌였다.

위상을 떨치던 그런 제국이 멸망했다.

드워프는 인간들이 다시 전쟁에 휘말릴 걸 미리 짐작하고 모든 거래를 종료했다.

그 와중에 새로 독립한 왕들과 귀족들은 사치품에 목말라했다.

고품격 사치품은 귀족의 권위와 명예와 직결되었다.

‘그릇과 접시들만 풀려도…….’

사비나는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흥분에 젖었다.

유베스 상단이 이 제품들을 취급하면 상단에 닥친 위기를 모조리 극복할 수 있었다.

드워프 물건은 그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넓은 대륙에 퍼질 유베스 상단의 이름.

그리고 그 후광을 사비나도 얻게 될 것이다.

‘저 남자……. 뭔가 더 있어.’

사비나는 베커 백작 뒷면에 감춰진 또 다른 진실이 궁금했다.

단정할 수 없는 특별한 매력으로 무장한 베커 백작.

사비나와 눈이 마주치가 그가 빙그레 웃었다.

***

“공기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코에 파고드는 상큼한 공기 맛은 흡입할수록 그 맛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딱 흡기해 보면 아는 맛이다.

바람 속에 담겨 있는 마른 흙냄새, 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나무 냄새, 이름 모를 들꽃 냄새, 시원한 강물 냄새까지 온갖 자연 재료들이 뒤섞여 있었다.

2008년 대한민국은 미세먼지가 심했다.

아직 정확히 미세먼지가 뭔지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했다.

중국에서 넘어오는 새카만 매연 덩어리를 날씨가 흐려서 그런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대한민국과 비교할 수 없는 자연의 보고.

창밖으로 불어오는 가을 냄새를 한껏 보고 즐겼다.

힐링의 대명사가 따로 없었다.

화려한 욜로 인생이 아닌 소소한 가치에 행복을 느끼는 소확행이었다.

익숙한 지구가 편하긴 해도 이곳은 이곳 나름대로 또 맛이 있었다.

가끔 바쁜 틈에도 문득문득 생각이 났다.

영주라 부르는 순박한 백성들을 보듬고 무식한 오크들과 어울려 쌈박질을 일삼았다.

평화로우면서도 스릴 넘쳤다.

낡은 성의 방에서 창밖을 봤다.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 너머로 들판이 보였다.

외성 안쪽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상단과 용병들, 그리고 떠돌이 난민들의 모습이 창밖으로 보였다.

오순도순 모여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낮과 달리 날씨가 저녁이 되면 쌀쌀해졌기에 모두 둘러앉아 온기를 나눴다.

그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귓가에 기분 좋게 들렸다.

- 마나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영주인 나에 대해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모두 포인트로 전환됐다.

“여기가 현실이고 지구가 꿈같네…….”

피도 튀고 땀도 나고 모든 감각이 사실대로 느껴지는 이곳 대륙에서의 생활.

클럽에서 김한별과 맥주를 마시던 순간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뭐가 터질까…….”

오크들이 물러갔지만 그걸로 끝이 아닐 것이다.

점점 주변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지구에서처럼 책임져야 할 운명들이 늘어났다.

어깨가 무겁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다른 인간들과 달리 두 번째 생을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삶이 만만하거나 가볍지 않았다.

“바이올린 한 곡 켜고 싶은 분위기야~”

아공간에 수제 바이올린을 넣어 놨었다.

음악의 신들이 남겨준 수많은 곡들 중에 밤의 야상곡이 떠올랐다.

밤에 들어야 그 맛이 제대로 느껴졌다.

하늘엔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별들이 빛났다.

어릴 적 강원도에서 보았던 은하수 같았다.

별을 바라보며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을 조용히 즐겼다.

강남 한복판에서 느끼기 힘들었던 고즈넉함이 이곳에서는 사방에서 느껴졌다.

똑똑.

밖에서 조심스럽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영주님. 탈만입니다!”

첫 번째 상행을 따라왔던 용병대장 탈만이었다.

그의 방문이 낯설었다.

내성 안에는 불문율처럼 용병들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기사나 수비병이 따로 없었지만 그들이 나를 두려워했다.

“들어오라.”

등을 돌려 탈만을 맞이했다.

탈만을 비롯해 두 명의 용병이 함께 들어섰다.

“무슨 일인가?”

뭔가 큰 걸 결정한 듯한 표정들이었다.

딱히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털썩.

세 명의 용병은 들어서자마자 입구에서 곧바로 무릎을 털썩 꿇었다.

“목숨을 다해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영주님!”

주군? 날?

갑작스런 상황이 황당했다.

“그대들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주군이라 함은 날 주인으로 모신다는 뜻이다.

로버트가 칭하는 보스보다 더 강렬하고 깊은 의미를 포함했다.

생사여탈권을 넘기겠다는 소리다.

“영주님! 비록 무식하게 굴러먹은 용병이지만 충성이 무언지는 잘 압니다! 이 베커 영지와 영주님을 위해 저희들의 마지막 피를 흘리게 해주십시오!”

용병 대장 탈만과 그 휘하 부대장이 합창하듯 외쳤다.

쿵! 쿵! 쿵!

머리를 바닥에 찍었다.

어이가 없어 그들을 다시 쳐다봤다.

“그대들이 내 병사가 되겠다고?”

용병들이 부하가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유로운 영혼들이라 불리는 용병들이다.

목숨 값으로 술 마시고 계집질 하며 인생을 낭비하는 대표적 소설 속 양아치 형님 부류였다.

하지만 그동안 지켜본 바 탈만과 용병들은 조금 달랐다.

그렇다고 저들을 완벽하게 믿을 수 없었다.

부하가 된다면 내 등을 맡긴다는 의미다.

상호 신뢰를 쌓기에는 함께한 시간과 공유한 경험이 일천했다.

“저희들의 충성을 증명하겠습니다!”

스스슥.

말과 함께 탈만과 두 용병은 허리에 차고 있는 단도를 꺼내들었다.

“어!”

서걱.

놀라는 사이 왼손바닥을 빠르고 깊게 그어버렸다.

말릴 사이도 없이 벌어진 사건.

촤아아아아앗.

붉은 피가 뿜어져 바닥을 적셨다.

이래서 용병들을 무식하다고 하는 것 같았다.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대사와 행동을 바로 눈앞에서 벌였다.

고통스러울 텐데도 용병들의 눈빛은 여전히 이글거렸다.

눈빛이 거짓이 아닌 진실이었다.

관상을 천천히 봤다.

인생 후반기에 격정적으로 살아갈 상이었다.

다행히 배반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 나에게도 손발이 필요한 때이긴 했다.

모든 정황이 하늘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사업 확장을 위해서도 반드시 얻어야 할 인맥이었다.

피까지 뿌려주며 믿어달라는데 어쩌겠나.

“그대들을…… 베커 영지의 병사로 받아들이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허락했다.

“주구우우우운!!!”

방이 쩌렁쩌렁 울렸다.

양념처럼 용병들이 눈물을 질질 짰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 이토록 애원하는지 몰랐다.

내가 그렇게 착한 사람만은 아니라는 걸 저들은 몰랐다.

양심이 살짝 찔렸다.

오크의 마빡을 깨 마력석을 빼앗고 상인들에게 스테인리스 접시를 봉 씌워서 팔아먹었다.

나는 그저 귀환용 마나 포인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이다.

어부지리로 얻게 된 듬직한 용병들.

그들에게 다가갔다.

“앞으로 그대들의 피를 함부로 흘리지 마라. 첫 번째 주군으로서 명령이다.”

사극 많이 봐뒀던 덕분에 말이 청산유수다.

탈만의 피 묻은 왼손을 잡았다.

“치료의 성자 아르시오 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파아아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란 빛이 손에서 터졌다.

그리고…….

“서, 성력!”

“오오오오! 주, 주군이시여!”

용병들이 감동에 빠졌다.

나도 감동이다.

내공이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빛으로 승화되었다.

그러더니 탈만의 왼손 상처가 빠르게 사라졌다.

눈으로 봐야만 믿을 수 있는 장면이다.

홍콩에서 총에 맞았을 때도 느꼈던 마법과 성력의 무궁한 효력.

화타의 능력이 합쳐지면 혼자 한방병원 차려도 대박일 것이다.

나머지 두 용병도 치료해줬다.

“주구우우우운!”

스스로 자해하고 상처가 낫자 기뻐하는 또라이 용병들은 성이 떠나가라 주군을 외쳤다.

- 충성스런 부하를 획득했습니다.

- 마나 포인트가 듬뿍 지급됩니다.

- 칭호가 사기꾼 영주와 어울리는 머저리 용병들로 갱신 됐습니다.

***

“형님!!!”

“오~ 형제여!”

세상에 진짜 이곳에서 형님을 만날 줄 몰랐다.

“그동안 어떻게 됐습니까? 지구에서는 그렇게 불러도 대답도 안 하시고!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하하하. 미안하다. 형제여~ 갑자기 여자 친구 따라 이사를 하는 바람에 연락할 틈이 없었다.”

노바 형님의 여자 친구가 떠올랐다.

부러웠다.

살아서 누리던 영광을 죽어서도 이어갔다.

“……여왕님 잘 계시죠?”

워낙 바람둥이라 그사이 바뀌었을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흐흐흐. 당연하지.”

당연하다 말하지만 웃음소리가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사건이 진행 중임이 확실했다.

“신빨이 다르십니다?”

“형제가 보내준 포인트 덕분에 잘 살고 있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눈치챘나?”

“뭡니까? 좋은 건(?) 서로 공유하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딱 한 번 제대로 준 교육 자료를 건네주었던 노바 형님.

진짜 이곳에서 소환이 가능했다.

집이 완전히 바뀌었다.

과거 성체에서 이제는 자연주의 고택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는 거대한 나무 내부에 자리 잡은 원목 저택.

싱그러운 향기와 보는 것만으로 심신이 편안해지는 나무 집기들이 소박하게 자리 잡았다.

자칫 없어 보이겠지만 자세히 보면 자연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노바 형님이 입고 있는 푸른색 옷감도 특이했다.

최고급 왕서방표 비단처럼 완전 고급졌다.

누가 보면 엘프들의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에는 다이아몬드 크게 박힌 왕관이…….

“헉! 설마 왕 되셨어요?”

“아니 신.”

“그건 진작 되셨잖아요.”

“그거 말고 엘프들의 신~”

“네? 형님이요???”

세상에 카사노바가 엘프들의 신이 되었단다.

아무리 여자 친구 덕분에 신분세탁이 됐다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요즘은 남자가 여자를 잘 만나야 인생이 편다는 말이 돌았다.

신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게 모두 다 형제 덕분이다~.”

“하하. 서로 상부상조하는 미덕이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노바 형님만 보면 부럽기도 하고 은긴 기대가 됐다.

그동안 쌓아 놓았을 수많은 교육 자료가 무척 궁금했다.

“형제여. 조만간 좋은 일 많을 것이다.”

“네? 저에게요?”

“흐흐흐. 기다려보라. 형제에게 큰 상이 하사될 것이다.”

“뭐 주신다면야…….”

“여기 포인트가 좀 세다. 많이 벌어서 상부상조하도록 하자.”

“엘프들 신이 되었다면서요? 뭐하시게요?”

“포인트 많아서 나쁠 일 하나 없다. 특히…… 그 녀석들과 맞짱 뜨려면 더 필요하다!”

이글거리는 노바 형님의 눈동자.

“누구요?”

“아직은 알 것 없다. 나와의 만남은 비밀로 간직하라. 이곳 신들 질투가 장난 아니다.”

“그래요?”

“강해져라. 형제여!”

“지금도 약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만…….”

“5서클 마법 한 방이면 형제는 뼈까지 녹아내린다. 이곳에서 죽으면…… 지구로 귀환 못 한다. 영혼이 영원히 이곳에서 머물러야 한다.”

“네? 여, 영원히요?”

처음 듣는 설명에 기겁했다.

“형제여! 우리 이곳에서 제대로 사고 한판 쳐보자! 흐흐흐. 강해져라! 그러면……. 넌 인간계에서 난 신계에서……!”

뭔가 사악한 일을 계획하는 듯한 냄새가 진하게 나는 노바 형님.

사고가 사기로 들렸다.

그렇지만 손해 날 일은 없을 것 같다.

“최신 버전 준비해 놨다. 수련하다 지치고 힘들면 잠시 쉬었다…….”

형님이 찡긋 윙크했다.

그런 일이라면 두말하면 입만 아팠다.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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